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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감독 |
나카시마 테츠야 (2010 / 일본) |
출연 |
마츠 다카코,오카다 마사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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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Tetsuya Nakashima
원작 소설 작가 Kanae Minato
간만에 아오이 유우가 나오지 않는 일본영화를 보았다. 시작은 딸기 우유마시면서 발랄했는데, 피 범벅으로 튀는, 장르는 무려 드라마/스릴러. 내가 조금 더 예술에 미쳐, 감정이 무뎠더라면 환상이라고 훌륭한 점수를 주었을 영화, 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더라면 좋아라했을 듯 하다. 나이가 들었는지, 비릿내나는 영화에 인상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만점을 줄만큼 '환상적'인 부분은 없지만, 피를 아름답게 사용하였고, 소재를 능숙히 다루었고, 관점이 뚜렸하고, 멈춤없는 전개의, 매우 감각있는 영화이다.
목숨
왕따 / 집단성
자살 / 살인
병 / 병에 대한 인식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진정한 지옥
가족 / 부모 / 애정
목숨 -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윤도현씨가, 죽음에 관한 음악을 쓰고있다고 이야기하며, 딱히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치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얘기인 듯,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어색한 자세였달까. 죽음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한다는 자체가 사실 이상했지만, 사회적 시선은 그런가보다. 우리나라 라디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 아무튼 죽음, 목숨의 끝, 삶의 끝을 이야기한다. 영화 대사 중
"목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혹은 "선생님, 목숨은 가벼운 것이에요." 따위의 대사가 있다. 목숨, 과연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물론 답은 없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목숨의 무게 또한 가늠 할 수 없다. 가족을 잃음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진정한 지옥'이 되기도하고, 미디어가 가장 시끄럽게 다루는 주제 또한 '살인' '자살' 따위의 죽음이지만, 학살 따위를 꿈꾸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인물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는, 목숨에 대한, 상반되는, 쉬운 태도 또한 그려진다.
왕따 / 집단성 - 반의 아이들은 한 개체로 그려진다. 그들은 함께 웃고, 기겁하고, 움직이고, 같은 타겟을 공격한다. 그들은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는, 개인의 의견을 만들지 못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손을 들어, 하겠다고 자발적 행위를 보이면, 나머지는 따른다. 그런 그들에게, 기준이란 수시로 바뀐다, 왕따의 대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 처럼. 집단에게 책임을 부여 할 수는 없다. 집단이 행한 행위는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느낀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방법이, 사회에서는 먹힌다.
왕따는 반 전체를 대상하고, 사회는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만든다. 개별적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은 훨씬 많은 비용이 필요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을 개인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청소년의 가장 작은 단위가 '반'이 아닐까 싶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그 단위를 책임지어야하고, 그것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반은 집단이지만, 그 안에 반장이 있고 왕따가 있다. 주체 없는 아이들을 뭉퉁그려 바라보는 시선이,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살 / 살인 - 죽는다는 것, 죽음의 이유에 따라 죽음의 영향은 매우 달라진다. 누구는 병에의해 죽지만 누구는 타인의 자존심, 애정결핍, 따위의 이유로 죽는다. 암으로 죽은이를 보내는 마음은, 타인의 자존심이 죽인 이를 보내는 마음과 다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후자는 보다 수긍이 어렵고, 복수를 부른다.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청소년은 드믈거란 무서운 상상을 해본다. 갈대같은 기준없는 마음에, 바람이 불면, '죽어버릴래'따위의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갈대같은 만큼, '안 죽을래'가 그 뒤를 쉽게 따르기도 한다. '자살은 나약한 자들의 도피'라는 인식이 있다. '자살은 사회로 인한 타살'이라는 인식 또한 있다. 물론 답은 없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는 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있다. 집단이건, 개인의 자존심이건, 받지 못한 사랑이건, 책임을 부여 할 수 있다. 그 책임에 대한 죄책감을 우리는, 누군가는 느껴야 하는가? 글쎄. .
병 / 병에 대한 인식 - AIDS 감염자의 피를 마시더라도, 감염될 확률은 없음에 가깝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하지만 반 학생들은 피 한방울, 키스, 살결이 스치는 것 조차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기겁하고, 소리 꽥 지르고, 시끄럽다. 감염자의 난처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예의보다 본인의 감염되지 않은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못하는 것에 대해 겁이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의 전문의가 될 수는 없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보편적인 인식을 만들어 그 관점으로 그 대상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병' 은 무섭고, 더럽고, '병자'는 가까이 가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병자가 내뱉은 공기만 나눠 마셔도 옮을 것 같고 손길만 스쳐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 아닌데도 말이다. '바보'짓이 분명하다. 그 따위의 취급을 받는 병자는, 신체적 병에 심리적 병의 합병증을 앓게되고, 고립이 오히려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된다.
사회는 관심이 없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단체를 바라 볼 뿐이다. '장애인' '감염자'따위가 그러하다. 뭉퉁그려 기피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고 황당한 현실이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그런 관점을 기대하는 것이, 실망을 부르는,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 이 또한 시스템의 오류이다. 정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것이 국가라는 단위의 집단을 지도하고 인솔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이로 또 다른 집단을 형성하고, 그 두루뭉술한 집단을 다루는 제도들을 디자인한다.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청소년은 기준이 없음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였을때, 그것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옳지 않은 행위에 괜찮다는 인식을 부여하는, 황당한 제도가 아닐까.
진정한 지옥 - 목숨이 가벼운 이에게, 죽음은 오히려 선물일 수 있다. 복수를 원한다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다면,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다 - 훨씬 고통스러울 것다. 가장 아릅다운 복수의 예로써 올드보이가 있겠다. 그 치욕을 안고 살아야한다니, '죽는게 낫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야 본인의 선택. 복수의 대상을 살려두되, 그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 할 것 - 딸의 인생, 엄마의 목숨, 유일한 추억 따위가 있겠다.
굳이 누군가의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이 지옥'이 되는 일은 스스로도 부를 수 있다. 공부에 목을 달고, 학비가 없어 하고싶지 않은 일만을 하는, 삶 따위가 그러 할 것이다. 누구나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하고싶지 않은 일'만'하는 삶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하고싶은 일'을' 주되게하고, 하고싶지 않은 일'도' 취미삼아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를 - 적어도 나 자신은 이러한 기준으로 행복을 찾아가며 살고있다.
가족 / 부모 / 애정 - 사실 몇 일 전 이 것에 관하여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침 영화의 내용과 싱크가 가능하여 여기에 남겨본다. 영화에서도 다루워지듯이, 청소년은 기준이 없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 '부모가' 청소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성적인 것이 현 시대의 현실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자라나는 정신 - 청소년 - 에게 기준을 심어주어야한다. 지나친 클리셰이지만, 그들에게 공부를 바래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바래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정의, 삶의 방식의 기준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청소년이 의사, 박사, 인문학도, 사회 기여자가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왜 자식을 그 딴 것으로 키우고 싶어하는가. 환경은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면, 그 '사람'은 자신의 꿈을 찾을 것이다. 환경이 공장인가? 왜 직원을 만들려 하는가, 왜 본인이 나은 생명체로 사업을 벌이고 돈을 벌려하는가, '사람'으로 키우면 된다.
물론 나는 부모가 아니고, 이상적인 20대임으로, 비 현실적인 소리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뭐 모르고 지꺼리네'라는 소리를 들을테지만, 우리는 모두 이상을 향해 가고있지 않은가. 현실이 더럽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상적인 20대라도 이상적이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만의 논리이다.
영화의 소재로는 위의 것들 이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인상에 남은 것들을 위주로 적었다.
본 영화는, 사회의 중요한 주제를 소재로 다루었다. 사회 시스템의 보편성, 그것이 나은 부작용들 - 왕따, 병 기피, 자살, 살인, 미디어, 따위가 있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시각적 효과이다. 카메라는 앞, 뒤, 사이드, 뿐 아니라 위에서 전지적인 듯 한 시점 또한 그린다. 현 시대의 보편적인 매체, 티비와 핸드폰 또한 유용히 사용되었다. 적절하고 직결되는 음악의 사용 또한 내용을 부각시킨다. 영화를 본 후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ost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bgm이라기에는 비중이 있는 듯한 음악은, 가사를 듣게하고, 영화에 또 다른 입체성을 준다.
또한, 피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피의 성질을 매우 훌륭히 활용하였다. 특히나 벽에 칠해진 피, 손에 범벅이된 피, 땅에 떨어진 피의 구도가 매우 잘 계획되었다. 시각 디렉터, 따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각적 배치와 물체간의 대비가 매우 감각적이다. 피의 새빨간 색감이 하얀 벽, 학생의 뽀얀 피부와 대비하는, 장면들이 훌륭히 구사된다.
영화의 끝자락으로 다가가, 폭발 장면의, 쌩뚱맞은 cg효과 또한 재미있다. 시계라는 아이템을 사용하여,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의 심리를 표현한다. 유리와 파편들이 느리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관객의 집중을 사고, 혼란과 역동적인 심리를 묘사한다.
궁금의 여지가 남는 점은, '과연 그녀는 폭탄을 정말로 전달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폭탄을 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소년은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폭탄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소년은 안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점을 바꾸기에는, 그 거짓말 한 마디, 가상된 사실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작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피 비릿내 잔뜩 나는, 시뻘건 책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사르트레의 '구토'도 읽으며 악몽을 꾸어, 마저 읽지 못한 나인데 말이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누르는 날이 올까 -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충분히 감정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러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 - 나의 감각들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읽을 용기가 아닌, 굳은살이 생기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