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칸
감독 카란 조하르 (2010 / 인도)
출연 샤룩 칸,까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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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diots 만큼이나 멋진 영화. 주제가 인종차별, 종교차별이니 만큼 가볍고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분명 뿌듯하고 와닿는 영화. 2001년의 9 11 테러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역사이다. 내 생의 가장 큰 역사이고,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내 생의 가장 큰 역사로 남을 것 같다. 2011년 9월 11일, 그 날의 아침을 또렷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6학년, 사건의 중대성도 알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World Trade Center 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양치를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tv에서 건물이 흐드러지는 영상을 보았고, 굉장하다는 생각은 하였지만 기겁할 정도는 아니였다. 사건의 무게는 학교에 도착하여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학생들, 선생님들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수업은 카운슬링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예쁘셨던 영어 선생님은, 남편 분이 군인이시라며 눈물을 흘리셨고, 우리는 모두 교실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영화 왈, 미국인들의 영사는 bc 와 ac 로 나뉘지만, 무슬림들에게 역사는 911 이전과 911 이후로 나뉜다고 한다. 사실상, 딱히 그들의 입장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고, 종교적 성향이 강하며, 테러학교라는 기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분명 선과 악이 있고, 분류가 있다 - 매우 많다. 그들을 대하는 시선은 그러한 구분들을 크게 중요시 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는 수천가지의 박테리아 종자가 있지만 그 중 300 종 만이 인체에 해롭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세균을 더럽고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이 처럼 대중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것에 대을 세분화하여 인식하는 습관이 없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을, 보다 어리석게는 모든 중동민족을 테러리스트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
주인공 Khan은 무슬림이지만 마냥 순수한 청년이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 배경 때문에, 그의 이름 때문에, 그의 아들은 죽음으로 몰리고, 그는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대통령에게 전하려 여행을 떠난다. 그가 전하려는 말은 "My name is Khan. I am not a terrorist." 여행 중 그는 다른 이들을 돕고, 자신을 돕고, 사랑으로, 긍정으로 상황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으로 미움으로 뭉친 아내와는 다르게, Khan은 사랑으로 세상을 대한다. 아내는 Khan을 거부하지만, Khan은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아픔을 감수한다.
이러한 사람을 어찌 Terrorist로 모는가. 하지만 분명 이러한 일은 너무나도 흔하다. 분명 9 11 테러 이후에 미국 사람들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였다. 그들의 사업은 사그라 들었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편견으로 가득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매우 흥미롭다. 그야말로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말이다. 유럽에서의 이민가족들, 아시아의 유학생, 이민가족들, 멕시코에서 올라온 노동인력, 동남아시아의 유학, 노동인구 - 그야말로 전 세계가 모여있는 곳이 미국이다. 한국에서 한국어가 서툰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가 서툰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이 모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섞이기도 하는 이 곳 - 인간의 성향을 시험하기 가장 좋은 곳 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집단은 덩어리가 아닌 세부적인 구성원들이 존재한다는 것, 개인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에서도 종교와 인종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이지만, 이 '미국'안에서도 분류가 있다. 편견가득한 시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시선도 있다. 다수가 어느 쪽인지는 분명하지만, 소수 또한 존중받아야하고, 어쩌면 어리석은 다수보다 옳은 기준을 가진 소수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현명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은 개인들로 구성되어있고 옳음이 있는만큼 그름도 있다 - 그렇게 우리는, 모두는 공존한다. 타인의, 다른 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의무가 아닐까 싶다 -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입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훌륭하다.



호박을 건네는 칸, 순수함은 주로 엉뚱히 보이기 마련

 



"No, not Khan. From the epiglottis. Khan. Khan." 칸이 아니고 epiglottis 후두개에서 부터, 크흐흐한 - 크흐흐한 ㅋ ㅋㅋㅋㅋㅋ




"Our Khan has managed to achieve with his love and humanity..." 정의를 위한 싸움도,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만드는 움직임이 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칸. 미움으로 싸우려했지만 결국 칸에게 돌아왔고, 칸의 사랑의 움직임이 옳았음을 인식하는 그녀.






"The death of one innocent is equal to the death of humanity" 정의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무너진다. 그 만큼 정의란 절대적이며, 목숨의 가치는 숫자에 비례하지 않는다 - 하나의 목숨은 천의 목숨과도 같은 것.




"Come back to me baby" 오열하는 엄마 그녀






자동차 따위를 수리하며 여행자금을 마련하는 칸 -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중




기도는 장소와 시선을 가리지 않는다 - 기도 시간에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 있건, 누가 보건, 기도는 기도는 기도는 기도.




여행자 칸




다친 꼬마를 도와주고 Mama Jenny의 집에 머물게 된 칸, Mama Jenny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ㅋ ㅋㅋㅋㅋ




"I... Mama Jenny, I don't know what to say." 양아들은 유일한 최고의 친구였고, 그를 잃음은 - 설명 할 수 없는 일





괜찮을 것을 노래하는 소년 - 아프로 머리 소년의 감성 멜로디, 아들을 바라보는 Mama Jenny의 흐믓한 표정. 네, 괜찮을거에요 -




"This one you cannot repair. Now go." 폭우와 홍수로 Mama Jenny 의 마을이 물로 덮히자 그녀를 찾아온 칸 - 모든 기계를 고칠 수 있더라도 이것은 고칠 수 없다며, 칸의 안전을 위해 돌라가라고 이야기하는 Mama Jenny. 하지만 칸은 돌아갈리 없다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그녀, 칸의 이름 때문에 아들이 죽었고, 칸의 아내가 될 수 없다던 그녀 - 아들의 죽음으로 아픔과 미움으로 뭉쳐있던 그녀, 아들을 보내주기로 결심. 성조기의 색인 빨강, 하얀, 파란 색의 풍선을, 아들이 죽은 자리에서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 나라에 대한, American의 정의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미들, 인종차별, 엇나간 기준들, 이해받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관계들 - 모든 것을 날렸으리라.




드디어 대통령을 만나게되는 칸 - 사랑으로, 순수함으로, 꿈을 이루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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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감독 대니 보일 (2000 / 영국,미국)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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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 디카프리오 오오오 디카프리오, 배경은 무려 방콕. 필연같은 우연으로 전설의 섬을 찾게되는 디카프리오. 전설인지 현실인지 모르지만 지도 한 장으로 옆 방 커플과 일단 출발. 환상의 섬은 전설이 아닌 현실이였고, 그 곳은 진정 paradise. paradise인, 전설인 이유는 극히 비밀로 유지되기 때문.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곳의 위치와 정체를 알렸고, 다른 여행자들이 모이기 시작.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일 - 세상의 공동체도 아닌 자신들 만의 공동체 속에서도 고립되는 주인공.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픔도 죽음도 마다해야하는 paradise.  
사회와 고립된, 여행자들이 모인 정착지. 즐거움과 행복 뿐인 공동체 - 사실일 수 없을 듯 하지만 분명한 사실인 공간. 극적인 환상생활 만큼 극적인 환상악행도 무뎌지는 곳. 남의 고통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 공동체의 즐거움을 위해 무거운 것은 갖다 버리자는 기준. 남들이 괜찮으면 나도 나쁠건 없다는 집단의식. 기준과 가치의 혼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


섬에 도착하는 방법은 수영 뿐




수영하는 셋의 모습




섬에 도착 - 환상을 찾아 왔건만 섬에서 만난 것은 공포와 살인




절벽 - 환상까지의 먼 길




고비를 몇 넘기고 나니 근육질 흑인 옵하 등장, 환상 도착




절벽에서 다시 한 번 뛰어 내림 - 환상의 첫 도착과는 거꾸로의 상황, 이 곳은 진정 paradise인가



작은 공동체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병자는 paradise의 행복의 짐이 될 뿐 - 그의 숨을 거워버리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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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감독 롭 마샬 (2002 / 독일,미국)
출연 르네 젤위거,캐서린 제타 존스,리처드 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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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필요없이 멋진 영화 - 안무 연출 따위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없지만, 정말 멋지다. 언젠가 공연으로 꼭 보고싶다. 한국에서 무려 뮤지컬로 보았던 라이온킹이나 42nd street 보다 멋졌다. 뮤지컬과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려 라이브였던 공연들보다 나의 16' 화면으로 본 영화의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분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쓸 말이 그다지 없다. 시카고라는 상징을 멋지게 소화한, 환상의 연출.

흥미로웠던 점은 캐스팅. Catherine Zeta Jones 는 당연해보이는 캐스팅이다. Richard Gere 는 조금 특이하지만 Renee Zellweger에 비하면 무난한 듯 하다. Richard Gere 와 뮤지컬. . 어정쩡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Renee Zellweger 그녀는 안 예쁘다. 나만의 의견이지만 광대뼈도, 턱선도 가라앉을 듯한 눈도, 예쁘지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에서 그녀의 두루뭉실한 모습은 더욱 예쁘지 않았다. 의도된 것이였지만 정말 예쁘지 않았다. 감탄한 것은 그녀의 연기. 표정을 너무나 편안히 사용한다. 내민 입술 모여진 미간, 의도된 불쌍함을 표현. 난 불쌍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도이고, 너희는 나를 동정하고 동경할거야라는 듯한, 글을 읽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연기한다. 나의 인식중에 있는 생각이여서 그리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배우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기분이였다. 그녀의 꼭두각시 춤 또한 매우 훌륭했다. Richard Gere 의 무릎에 앉아서 팔다리 얼굴을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줄에 매달린 인형같았고, 여기서 그녀의 표정 또한 매우 조절되었다. 자신의 몸, 얼굴의 근육들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 특별하다 할 것 없어보이는 그녀에게서 이러한 환상 움직임 연출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사진 출처 http://www.sheetmusicplus.com/look_inside/4896040/image/228636
http://www.biography.com/famous/fam_episode_guide.jsp?episode=15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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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애듀케이션
감독 론 쉐르픽 (2009 / 영국)
출연 캐리 멀리건,피터 사스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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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ie Mulligan 이 좋아 보았지만 내용적으로도, 영상적으로도 마음에 들게 보았다.
내용은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지만 시대적인 간단히 시대적인 성향을 그리고있다. 여자에 대한 대우, 배우지 않은 이들의 머릿 속, 행동, 명문대에 대한 보편적 인식, 사회의 인식, 부모의 인식, 학생들의 인식, 결혼에 대한 시선, 부모의 마음, 가르치는 이의 마음, 소녀의 마음.
주인공 Jennie는 아버지의 강요로 명문대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와중 나이 많은 남자친구를 만나고, 그와 사회의 '재미'를 알게되고 대학진학마저 포기한다. 아버지또한 Jennie가 금전적으로 안정적인 남자를 만나자 대학을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와 선생님들은 Jennie를 말리지만 머리 좋은 Jennie는 교육의 의미가 없다는 둥, 삶의 재미가 기다리는 와중 지루한 학문을 선택 할 이유가 없는다둥, 여자의 위치는 어차피 같다는 둥, 어리지만 성숙한 생각들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결혼을 다짐한 Jennie 는 남자친구가 유부남인 사실을 알고 좌절. 이혼을 한다니 어쩌더니 하던 인간은 떠나버리고 Jennie는 학교로 돌아갈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 평소 자신을 위해주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요청, 옥스포드 입학, 평범히 생활.
너무나 깔끔히 표현되었다, 성숙해지는 Jennie의 모습은 옷, 화장, 시선, 걸음걸이 등으로 상징되고, 좌절 후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인물들의 성격 또한 군더더기 없이 분명하다. 특히나 똑똑치 않은 Jennie의 새로운 친구의 모습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돈에 대한 상징성 또한 옥션, 옷, 술, 자동차, 악기 등으로 표현되고, 그에 매혹되는 Jennie 와 Jennie의 아빠의 모습 또한 깔끔하고 당연하다.
처음에는 부러웠다. 나이 많은 남자친구를 갖는다는 것이, 보다 많이 알고 새로운 것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같은 사람 - 재미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이차이라는 것이, 나이는 숫자에 불구하다고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속과 겉으로 바꾼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둘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불공평하다.
교육 - 에 대하여, 그것은 필요이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돈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자만이다. 머릿 속으로 떠날 수 있는 곳이 비행기로 떠날 수 있는 곳보다 많고, 배움에는 끝이 없으며, 여자의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사랑을 할 수 있게하는 것이 교육. 음악, 글, 영화등을 통해 프랑스를 만나고 동경하는 Jennie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배움은 아름다움이고 환상이다.
연령별로 같은 나잇대의 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 책을 많이 접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쉽게 공감하고 자신을 그 위치에 넣어볼 수 있기 때문. 이제 20대 주인공의 영화, 책을 보아야하는건가. .


도움을 요청하러 온 Jennie의 모습 , 선생님 집의 연출이 예쁘다. 영화 전체적으로 예쁜 장면이 상당히 많다 - 물론 Jennie가 정말 예쁘다





"...i feel old but not very wise" 도움을 요청하는 Jennie의 눈빛






모든 것이 지나고 결과를 읽고있는 아빠, 집의 연출이 예쁘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안도의 Jen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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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1992 / 미국)
출연 크레이그 셰퍼,브래드 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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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동생, 보수와 진보, 인종차별, 종교, 예술의 완벽함, 인간의 부족함 - 모든 것을 조화롭게, 눈에 띄지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린 영화. 배경 또한 무려 Montana - 아름답다.
A River Runs Through It -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변역되었다. 번역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간다, 반명 쉽게 넘어간 듯 하다. 90년대 초반이기도하고 직역도 해석된 번역도 아닌 쌩퉁맞음. . 제목의 본 의도는 분열, 움직임, 가능성 - 이였을거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가르는 강, 강의 움직임, 강 가득한 가능성. . 제목의 번역이 아쉽지만 번역은 늘 아쉬운 것이겠지.


낚시하는 신난 동생



혼나는 형제




춤추는 동생과 여자친구





우는 형의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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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감독 토드 케슬러 (2008 / )
출연 제시 맥카트니,엘리자베스 하노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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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 그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 그래도 볼만한 이유는 공감일까. 딱히 멋진 구도나 연출도 아니였는데 말이지 -

Walk to Remember 와 똑 닮은 스토리라인 - 다만 아픈 것은 남자 주인공이고, 둘은 연극 대신 화학 랩 파트너이다.

전형적인 Campus queen, 엄마아빠의 공주 - Natalie와 남신경 안써, 자유의 영혼 Keith.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Keith , 명문대 입학을 앞둔 Natalie. Keith는 말하기를 - 나는 죽음을 앞두었고, 너는 너무 잘났다. 너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너에게도 인생의 장난같은 구차함을 , 얼마나 엿같을 수 있는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 삶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사나마나 그따위 것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너.. 네가 모든 것을 이상하게 했다. 너, 너는 너무 굉장했고, 나, 나는.. 시간이 조금 갖고싶어졌다.
사람의 마음에 욕심을 심는 것 -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Keith 에게 , 기대를 심은 Natalie.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거라던 - 꼭 사과나무만이 사과나무는 아니다.

"...and you, you are so amazing. and i, i just wanted a little more time."



Natalie의 이야기를 듣는 Keith의 표정을 보라 - 아유


청소년의 진지함은 남보기엔 귀엽지만, 본인들에게는 정말이지 진지하다, 정말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능글맞게 농담놀이를 즐기는 Keith




"i made love to you"





"...and you, you, are so amazing. and i, i just wanted a little mor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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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감독 숀 펜 (2007 / 미국)
출연 에밀 허쉬,빈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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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영화의 전개에는 서두가 없으나 주인고잉 바라는 점은 하나이고 분명하다. 주인공은 명문 대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비를 대주겠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떠난다. 차르 타고 떠난다, 일단 서쪽으로. 모든 돈을 기부, 물질적인 것들을 떠나고 싶은 욕망. 사회의 규율에 대해, 직업이란 현대사회의 창조물이라는, 그 따위의 것은 필요 없다는 주인공. '영혼의 혁명' spiritual revolution을 향하여, 걷고, 일을하고, 사람을 만나고, 혼자임을 바라고, 야생에서의 생활을 바란다. 야생 열매를 먹고, 작고 큰 동물들을 먹는다. 물을 마시고 얼음을 녹여 마시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한다.  돈을 불태운다. 책을 읽으며 일기를 쓴다. 아기가 있는 짐승을 쏘지 못한다.
부모에 대한 반항감, 사회에 대한 저항. 젊은이의 열정이라기에, 그의 것은 너무나 뜨겁다. 열정과 이성의 중심따위는 없다. 그에게 이 자유에 대한 욕망은 열정이자 이성이고, 모든 것이다. 가족도, 인연도, 여자도, 어떠한 것도 그는 마다하고 '단순한 아름다움' simple beauty를 향하여 계속 걷는다. 그를 만나는 이들은 그에게 가족이 있느냐며, 가족이 되자며, 사랑을 하자며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혼자의 길을 떠나는 주인공.


사과에게 대화를 하며 씹어먹는 모습. 나도 사과가 먹고싶다.



두려움이라던 물에서 카약을 질주하며, 멕시코까지 내려간다. 국경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도 부수고, 국경도, 사회적 인식도, 가족의 틀, 친구의 우정, 돈의 허용범위, 법, 모든 것을 버리고 부순다. 그것들을 깨고 자신만의 이야기 story 를 쓰러 그는 움직인다. 아파도 다쳐도 괴로워도 슬퍼도, 자연에 대한 기쁨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 하다. 멕시코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향한다 - 알라스카. 그야말로 횡량함을 찾아 떠나 움직이는 주인공. 아무것도 누구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내적 혁명을 향한다.
알라스카에서 '매직 버스'를 발견하고, 그곳에서의 생활. 커다란 동물을 잡아 먹으로 쏘지만, 그것은 구더기로 엉망이되고 먹을 수 없게된다. 인생의 최대의 실수라며, 인간에게 혀용되지 않은 야생의 범위에, 괴로움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이 깨트린 수 많은 범위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불가능이라는 제한. 하지만 그러한 벽에 부딫히면서도 그는 기뻤으리라 - 자연의, 야생의 단조로움에, 극단적임에, 그는 기뻤으리라.
"calling each name by its right name - by its right name" 제 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우리는 돈을 행복이라하고, 직업을 필수라하고, 사람을 사랑이라고 한다. 가정을 안정이라하고, 종교를 평화라하고, 권력을 힘이라한다. 착각이다. 모든 것은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간과하여 보는 것에 우리는 익숙치 않다. 그것의 영향에 집중하는 경향이 훨씬 크고, 그 영향은 작은 일부일 경우가 허다하다. 극 중, 모든 것을 떠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위하여 Alexander 라는 이름을 짓는다. 죽음 앞에서 그는 본명인 Christopher 로 자신을 칭한다. 그렇게 그는 떠났지만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when you forgive, you love." 용서는 사랑이라한다. 용서는 사랑 - 괴로워도, 미워도, 싫어도 수용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리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쉽고, 더러운 것을 받아드리기는 어렵다. 어려운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리라 -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떠한 것으로 더러움을 어려움을 괴로움을 부정을 세상에서 외롭지 않게 하겠는가.
그는 삶의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하였고, 죽음의 순간에서 남긴 문구는 'happiness is not real unless shared' 나누지 않은 행복은 사실이 아니다. 혼자임을, 횡량함을 갈망하여 알라스카까지 갔지만, 그 또한 loneliness 외로움에 대하여 글을 썼다. 외로움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 뛰는 심장과 같은 것이리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정이거나 인식하지 못한 아둔함이지 않을까.
"not to be strong, but to feel strong" 자신감이라는 말을, 어감 때문인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뜻을 보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신을 믿는 마음. 자신감이 때로 싫은 것은, 그것과 자만감의 경계가 모호하고, 둘을 넘나드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되, 자신으로 가득차면, 타인과 옳은 기준들이 들어올 틈이 없음으로, 자신을 믿되 겸손이라는 마음으로 늘 자신을 다시 비워야한다. 강할 순 없다, 강할 수록 상대적으로 강한 이가 있으며, 우리는 영원을 향해 늘 움직인다. 하지만 강하고 싶지 또한 않다, 그저 자신을 믿는 마음이 강할 수 있으면  - 하는 바람이다. 그 만큼 나를 믿고, 사랑하고, 수용하면 강함도, 약함도, 용기도, 굉장함도, 이러한 특정 형용사 따위는 모두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면 족하다, 나에 대한 믿음.
틀을 벗어난 그의 모습에서,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간단함을 아낄 줄 아는 모습에서 - 나 안의 그러한 것들 또한 자극을 받는다. 자유, 자유, 자유, 자유 도전 창조. 미니멀한 삶에 대한 동경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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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애
감독 이현승 (2000 / 한국)
출연 이정재,전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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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이정재 주연의 영화. Il Mare 라는 집과, 그의 우체통을 통한 로망스 스토리. 時越愛 시간을 초월한 사랑. Keanu Reeves 와 Sandra Bullock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바가 있다.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아도, 기억력이 부실한 탓인지 새롭다. 다만 한 가지, '하녀'를 본 지라, 이정재를 보며 하녀 속의 이정재가 기억이나 집중을 방해하였다. 외에는 다시 보아도 참으
로 아름다운 영화이다 - 시각적으로도, 내용도.


아, 너무 예쁘다. 일단 영화의 중심인 집 Il Mare 와 그 우체통. 안개가득한 풍경, 빛보다 새벽 혹은 해질녘의 풍경이 계속된다.




집 앞에 심어있는 한 그루 나무 - 잎이 풍성한 적이 없다. 늘 앙상하고 성탄 전구만 휭휭 감겨있다 - 예쁘다.


우체통과 은주 -  영화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데에는 집의 풍경과 이정재와 전지현의 긴 기럭지였으리라



어둠 속의 집 풍경 - 성탄전구 감긴 나무와 혼자 불꽃놀이하는 은주. 어둠과 빛 - 역시나 멋진 풍경. 물론 이 집외에도 많은 장면들이 있고 장소들이 있다, 만화방이라던지, 방송국, 공사현장, 은주의 아파트, 집의 내부, 학교, 카페, 등등. 하지만 다 딱히 중요치 않다, 집의 풍경은 그 만큼 extraordinary 특별히 멋지다. 어둑키도하고, 시리기도한, 흐릿한 빛과 어둠의 풍경. 괜히 시원고 차가운 공기마저 느껴진다.




집, 바다, 능선의 실루엣, 아름답지 아니한가.




빨래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은주의 말에 빨래를 한 성현 - 하아 환상풍경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성현 - 하늘, 바다, 모래와 성현, 단조롭고 간단하고 낭만적인 풍경, 역시나 새벽빛의 조화




보랏빛 하늘 아래 집과 은주, 바다, 능선의 실루엣, 후우. . 숨 넘어감



잠시 등장 할 뿐이지만, Il Mare 의 풍경만큼 아름다운 제주도 산호사 해변의 풍경. 하아, 하늘, 물 모래 - 정말이지 아름다운 환상풍경이다.




개인적으로 왕 웃었던 장면, 비가 내리는건지 창문에 물을 쏟는건지. .





개인적으로 가장가장 좋아하는 장면 ! 밀물이 가득, 계닥마저 물에 잠기고, 사랑에 행운을 빈다며, 계단을 내려가 물고기를 놓아주는 장면. 아아아 물에 비친 집도, 경계 없는 하늘과 물도 아름답다.



우체통 앞에서 우는 은주. 역시나 하이얀 하늘에 모래와 능선과 집, 아아 간단하고 침착한 풍경.



해가 넘어가며 바라보는 집과 집 앞의 나무, 하아 역시나 멋진 집이다 Il Mare




마지막 장면, 은주와 성현 드디어 만나다




만났다, 크으 -

 

 


시각적 아름다움은 이쯤, 내용 또한 말 그대로 '환상' 적이다. 은주는 미래에 살고, 성현은 과거에 살고, 둘은 우체통으로 소통하며, 은주는 사랑을 위해, 성현에게 과거를 바꿔달라고 부탁하고, 성현은 은주를 도우려다 죽는다. 이를 안 미래의 은주는 과거를 다시 쓰기위해 우체통으로 달려가고 울고. . 결국 은주는 성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고 성현은 은주를 찾아간다.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이다. 이렇게 판타스틱한 내용을, 이리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영상으로 그리다니 - 굉장해.
영화의 구성 또한 깔끔하며 의도적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인 은주의 이사장면은, 마지막장면이기도하다. 모든 일은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은 듯, 시간의 원점으로 돌아와버리는 구성 - 바라보면서도 뿌듯한 연출이다. 음악 또한 깔끔히 다시 사용되기도하고, 여러 버전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영화에 어울리게, 또한 매우 '한국'스럽다는 정서가 느껴지는 음악들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깔끕하며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 뿌듯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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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이클 앱티드 (1994 / 미국)
출연 조디 포스터,리암 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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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North Carolina Robbinsville 과 Charlotte 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영화 속의 호숫가 풍경, 그리고 그 밤 호수를 수영하는 Nell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평생을 엄마와 둘이 고립된 숲 속에서 생활하였고, 엄마의 죽음으로 Nell 은 혼자 살아가야한다. 세상을 만나 본 적 없는 그녀, 낮을 두려워하고, 영어도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을 한다. 영화는 넬의 다름을 강조한다. 그녀의 행동, 언어, 습성 등 문명이나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밤에 수영을하고,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고, 팝콘을 처음 먹어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Nell 은 현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누구나 혼자임을 안다 - 엄마도, 동생도, 친구들도 각자임을 알고, 떠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안다. 죽음은 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괴롭도록 그립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음 또한 안다. 상대의 눈을 바라 볼 줄 알고, 마음을 열 줄도 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언제 필요한지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하대하고 다르게 취급한다. 그녀를 농담거리로 삼고, 과학적 예시로 삼으려 안달이다. 정녕 바보가 누구인지는 당연한 질문이다.

nature vs. nurture - 사람의 본성은 어디까지 이며, 양육의 영향은 어디부터인지. Nell 은 세상과 고립되어있던 존재임으로, 심리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된다.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며 자신이 아닌 존재와 교감을 하고, 놀라면 빠르게 서성거리며 괴성을 지른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그녀는 혼자 산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 생을 하였다. 그 동안 엄마의 행동을 보고 닮았을 텐데, 엄마는 문명과 접한 적이 있던 사람이였음으로, 엄마의 행동이 넬의 행동의 표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넬은 여러 트라우마를 겪는다. 이를테면 자신의 쌍둥이 동생의 죽음, 그리고 강간당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러 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그녀의 정신을 불안정케 하였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다시 엄마의 역활을 의심해본다. 그녀는 왜 엄마로써 딸의 안정에 도움을 주지 못 하였을까. 주었다면 그것은 왜 그리도 미미하였을까. 넬은 엄마라는 존재와 살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야생에 가깝다. 물론 그것이 영화의 의도이지만 구성의 억지가 아닌가 싶다.

내용은 흥미롭고, 구성은 얼추 괜찮지만, 가장 멋진 점은 Jodie Foster의 연기이다. Nell 은 영어와 가깝지만 다른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범위가 없는 자신만의 자유에 기준을 두고 생활한다. 이를 연기하기 위하여는 일상의 모든 습관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걸음걸이, 손짓, 시선, 동선, 표정 등 Nell 의 것은 다르다. 새로움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익숙함을 본인의 몸에서 지워야 했을 것이다. Foster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연기하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법정에서의 Nell 은 처음의 Nell과 달랐다. 그녀의 언어는 보다 영어에 가까웠으며, 행동 또한 일상인의 것과 흡사하였다. 마지막 장면의 능히 변화된 Nell의 모습을 보아하니, 법정의 장면도 의도 되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렇게 그Nell 은 우리와 달랐지만 같았으며, 가까워졌고 일부가 되었다. Nell 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는 - 나만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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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감독 카메론 크로우 (2001 / 미국)
출연 톰 크루즈,페넬로페 크루즈,카메론 디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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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Sky

딱히 환상은 아니지만,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iMDb 점수 6.9. 그래 점수는 후할수록 매력 없지.

 

David: 주인공
Sophia: 환상, 이상향 
Juliana: 현실, 저항요소
Brian: 의미부여 없이 친구라 하죠
Money / Company: 책임, 현실의 생활
Love
Dream Reality: 이상과 현실의 사라진 거리, 공존

 David 아버지의 회사를 상속받고, Juliana 그의 놀이관계. Brian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Sophia 만나는 계기. 만난 Sophia에게 David 의미와 환상을 부여. Julia와의 교통사고에서 David 얼굴이 괴물. 자신을 몸은 냉동, 속의 삶을 산다. 하지만 잠재된 의식의 방해로 그의 꿈은 악몽. 마지막에 그는 현실로 돌아갈 기회와 꿈으로 고쳐진 악몽을 살아갈 갈림길에서, 자신의 궁극적 두려움인 고소공포증을 대면하고 현실을 선택.

Open your eyes. 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눈을 떠라. 모든 사람들은 David 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분명 주인공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잃고, 둘을 융합 속에서 객관성을 찾지 못하는 악몽을 살아간다. 그의 제작이기도 환영들은 그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을 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주인공은 가면을 쓴다. 세상의 돈을 모두 가졌지만, 그는 시대의 기술에 갇혀 완벽한 얼굴을 복구하지 못한다. 흉측한 얼굴에 대한 시선을 감추는 이도 많지만, 클럽의 바텐더처럼, 그것을 경계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이처럼 당연한 현실에 분노한다. 사고 후로 Sophia 그가 아닌 그의 친구 Brian 사랑을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의 환상은 환상이니만큼 아름다운 Sophia 그를 구하는 손길이 되어 함께 아름다움을 살아간다. 그것이 주인공이, 누구나가 바라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의지와 공존의 .

하지만 그의 이러한 환상은 잠재된 두려움들로 악몽이 된다. 회사에 대한 책임과 업무적 일의 엮임은 사회의 억압을 대표한다. 그는 자신이 회사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며,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결국 주인공에게 남는 친구란 없다. 사랑하는 Sophia 마저 악몽의 Juliana 구분치 못하고 그녀를 살인하기까지 이른다.

괴로움이 아름다움을 마시고, 그것을 죽이려 주인공은 자신의 환상 또한 함께 포기 밖에 없다.

주인공은 분명 정신적 앓고 있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또한 흐리다. 냉동이라는 방법으로 죽은 사람을 미래까지 보존시키고, 꿈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있게 해준다. 이렇게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아무 것도 정확하지 않으며 평범치 않은 와중, Radiohead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흘러나온다. 적절타.

분명 영화는 보편과 전형의 선에서 이탈하였지만, 누구나 공감 하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하였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바닥에는 사람의 감정이 깔려있다. 두려움, 사랑, 행복, 이상, 동경, 도피, 절망, 혼란, .

또한 영화는 사회적인 압박을 회사와 얼굴이라는 대표적인 개체들로 표현하였고, 그것이 누리는 영향의 범위를 보여준다.

사운드 트랙 또한 퍽이나 보편적이다. Radiohead, Sigur Ros, Beach Boys, Chemical Brothers, U2, Jeff Buckley 꽤나 흔한 음악들이 사용된다. 또한 적절한 아이러니 플레이가 아닌가 싶다.

Vanilla Sky 의미를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그림에 대하여 설명하며 Vanilla Sky 잠시 언급되지만 짧게 넘어간다. 보다 자료를 뒤져보아야겠다.

2001년의 영화, 조금 세련되고 정교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으나 깔끔한 측에 속한다. 사랑, 사람, 바람, 현실, 약간의 공상이 가미된, 괜찮은 주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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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 (2010 / 일본)
출연 마츠 다카코,오카다 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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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Tetsuya Nakashima
원작 소설 작가 Kanae Minato

간만에 아오이 유우가 나오지 않는 일본영화를 보았다. 시작은 딸기 우유마시면서 발랄했는데, 피 범벅으로 튀는, 장르는 무려 드라마/스릴러. 내가 조금 더 예술에 미쳐, 감정이 무뎠더라면 환상이라고 훌륭한 점수를 주었을 영화, 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더라면 좋아라했을 듯 하다. 나이가 들었는지, 비릿내나는 영화에 인상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만점을 줄만큼 '환상적'인 부분은 없지만, 피를 아름답게 사용하였고, 소재를 능숙히 다루었고, 관점이 뚜렸하고, 멈춤없는 전개의, 매우 감각있는 영화이다.

목숨
왕따 / 집단성
자살 / 살인
병 / 병에 대한 인식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진정한 지옥
가족 / 부모 / 애정

목숨 -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윤도현씨가, 죽음에 관한 음악을 쓰고있다고 이야기하며, 딱히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치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얘기인 듯,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어색한 자세였달까. 죽음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한다는 자체가 사실 이상했지만, 사회적 시선은 그런가보다. 우리나라 라디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 아무튼 죽음, 목숨의 끝, 삶의 끝을 이야기한다. 영화 대사 중
"목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혹은 "선생님, 목숨은 가벼운 것이에요." 따위의 대사가 있다. 목숨, 과연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물론 답은 없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목숨의 무게 또한 가늠 할 수 없다. 가족을 잃음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진정한 지옥'이 되기도하고, 미디어가 가장 시끄럽게 다루는 주제 또한 '살인' '자살' 따위의 죽음이지만, 학살 따위를 꿈꾸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인물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는, 목숨에 대한, 상반되는, 쉬운 태도 또한 그려진다.

왕따 / 집단성 - 반의 아이들은 한 개체로 그려진다. 그들은 함께 웃고, 기겁하고, 움직이고, 같은 타겟을 공격한다. 그들은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는, 개인의 의견을 만들지 못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손을 들어, 하겠다고 자발적 행위를 보이면, 나머지는 따른다. 그런 그들에게, 기준이란 수시로 바뀐다, 왕따의 대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 처럼. 집단에게 책임을 부여 할 수는 없다. 집단이 행한 행위는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느낀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방법이, 사회에서는 먹힌다.
왕따는 반 전체를 대상하고, 사회는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만든다. 개별적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은 훨씬 많은 비용이 필요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을 개인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청소년의 가장 작은 단위가 '반'이 아닐까 싶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그 단위를 책임지어야하고, 그것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반은 집단이지만, 그 안에 반장이 있고 왕따가 있다. 주체 없는 아이들을 뭉퉁그려 바라보는 시선이,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살 / 살인 - 죽는다는 것, 죽음의 이유에 따라 죽음의 영향은 매우 달라진다. 누구는 병에의해 죽지만 누구는 타인의 자존심, 애정결핍, 따위의 이유로 죽는다. 암으로 죽은이를 보내는 마음은, 타인의 자존심이 죽인 이를 보내는 마음과 다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후자는 보다 수긍이 어렵고, 복수를 부른다.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청소년은 드믈거란 무서운 상상을 해본다. 갈대같은 기준없는 마음에, 바람이 불면, '죽어버릴래'따위의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갈대같은 만큼, '안 죽을래'가 그 뒤를 쉽게 따르기도 한다. '자살은 나약한 자들의 도피'라는 인식이 있다. '자살은 사회로 인한 타살'이라는 인식 또한 있다. 물론 답은 없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는 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있다. 집단이건, 개인의 자존심이건, 받지 못한 사랑이건, 책임을 부여 할 수 있다. 그 책임에 대한 죄책감을 우리는, 누군가는 느껴야 하는가? 글쎄. .

병 / 병에 대한 인식 - AIDS 감염자의 피를 마시더라도, 감염될 확률은 없음에 가깝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하지만 반 학생들은 피 한방울, 키스, 살결이 스치는 것 조차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기겁하고, 소리 꽥 지르고, 시끄럽다. 감염자의 난처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예의보다 본인의 감염되지 않은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못하는 것에 대해 겁이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의 전문의가 될 수는 없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보편적인 인식을 만들어 그 관점으로 그 대상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병' 은 무섭고, 더럽고, '병자'는 가까이 가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병자가 내뱉은 공기만 나눠 마셔도 옮을 것 같고 손길만 스쳐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 아닌데도 말이다. '바보'짓이 분명하다. 그 따위의 취급을 받는 병자는, 신체적 병에 심리적 병의 합병증을 앓게되고, 고립이 오히려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된다. 
사회는 관심이 없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단체를 바라 볼 뿐이다. '장애인' '감염자'따위가 그러하다. 뭉퉁그려 기피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고 황당한 현실이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그런 관점을 기대하는 것이, 실망을 부르는,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 이 또한 시스템의 오류이다. 정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것이 국가라는 단위의 집단을 지도하고 인솔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이로 또 다른 집단을 형성하고, 그 두루뭉술한 집단을 다루는 제도들을 디자인한다.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청소년은 기준이 없음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였을때, 그것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옳지 않은 행위에 괜찮다는 인식을 부여하는, 황당한 제도가 아닐까.

진정한 지옥 - 목숨이 가벼운 이에게, 죽음은 오히려 선물일 수 있다. 복수를 원한다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다면,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다 - 훨씬 고통스러울 것다. 가장 아릅다운 복수의 예로써 올드보이가 있겠다. 그 치욕을 안고 살아야한다니, '죽는게 낫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야 본인의 선택. 복수의 대상을 살려두되, 그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 할 것 - 딸의 인생, 엄마의 목숨, 유일한 추억 따위가 있겠다.
굳이 누군가의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이 지옥'이 되는 일은 스스로도 부를 수 있다. 공부에 목을 달고, 학비가 없어 하고싶지 않은 일만을 하는, 삶 따위가 그러 할 것이다. 누구나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하고싶지 않은 일'만'하는 삶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하고싶은 일'을' 주되게하고, 하고싶지 않은 일'도' 취미삼아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를 - 적어도 나 자신은 이러한 기준으로 행복을 찾아가며 살고있다.

가족 / 부모 / 애정 - 사실 몇 일 전 이 것에 관하여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침 영화의 내용과 싱크가 가능하여 여기에 남겨본다. 영화에서도 다루워지듯이, 청소년은 기준이 없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 '부모가' 청소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성적인 것이 현 시대의 현실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자라나는 정신 - 청소년 - 에게 기준을 심어주어야한다. 지나친 클리셰이지만, 그들에게 공부를 바래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바래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정의, 삶의 방식의 기준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청소년이 의사, 박사, 인문학도, 사회 기여자가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왜 자식을 그 딴 것으로 키우고 싶어하는가. 환경은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면, 그 '사람'은 자신의 꿈을 찾을 것이다. 환경이 공장인가? 왜 직원을 만들려 하는가, 왜 본인이 나은 생명체로 사업을 벌이고 돈을 벌려하는가, '사람'으로 키우면 된다.
물론 나는 부모가 아니고, 이상적인 20대임으로, 비 현실적인 소리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뭐 모르고 지꺼리네'라는 소리를 들을테지만, 우리는 모두 이상을 향해 가고있지 않은가. 현실이 더럽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상적인 20대라도 이상적이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만의 논리이다.


영화의 소재로는 위의 것들 이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인상에 남은 것들을 위주로 적었다.
본 영화는, 사회의 중요한 주제를 소재로 다루었다. 사회 시스템의 보편성, 그것이 나은 부작용들 - 왕따, 병 기피, 자살, 살인, 미디어, 따위가 있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시각적 효과이다. 카메라는 앞, 뒤, 사이드, 뿐 아니라 위에서 전지적인 듯 한 시점 또한 그린다. 현 시대의 보편적인 매체, 티비와 핸드폰 또한 유용히 사용되었다. 적절하고 직결되는 음악의 사용 또한 내용을 부각시킨다. 영화를 본 후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ost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bgm이라기에는 비중이 있는 듯한 음악은, 가사를 듣게하고, 영화에 또 다른 입체성을 준다.
또한, 피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피의 성질을 매우 훌륭히 활용하였다. 특히나 벽에 칠해진 피, 손에 범벅이된 피, 땅에 떨어진 피의 구도가 매우 잘 계획되었다. 시각 디렉터, 따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각적 배치와 물체간의 대비가 매우 감각적이다. 피의 새빨간 색감이 하얀 벽, 학생의 뽀얀 피부와 대비하는, 장면들이 훌륭히 구사된다. 
영화의 끝자락으로 다가가, 폭발 장면의, 쌩뚱맞은 cg효과 또한 재미있다. 시계라는 아이템을 사용하여,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의 심리를 표현한다. 유리와 파편들이 느리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관객의 집중을 사고, 혼란과 역동적인 심리를 묘사한다.
궁금의 여지가 남는 점은, '과연 그녀는 폭탄을 정말로 전달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폭탄을 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소년은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폭탄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소년은 안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점을 바꾸기에는, 그 거짓말 한 마디, 가상된 사실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작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피 비릿내 잔뜩 나는, 시뻘건 책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사르트레의 '구토'도 읽으며 악몽을 꾸어, 마저 읽지 못한 나인데 말이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누르는 날이 올까 -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충분히 감정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러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 - 나의 감각들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읽을 용기가 아닌, 굳은살이 생기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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