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칸
감독 카란 조하르 (2010 / 인도)
출연 샤룩 칸,까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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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diots 만큼이나 멋진 영화. 주제가 인종차별, 종교차별이니 만큼 가볍고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분명 뿌듯하고 와닿는 영화. 2001년의 9 11 테러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역사이다. 내 생의 가장 큰 역사이고,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내 생의 가장 큰 역사로 남을 것 같다. 2011년 9월 11일, 그 날의 아침을 또렷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6학년, 사건의 중대성도 알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World Trade Center 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양치를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tv에서 건물이 흐드러지는 영상을 보았고, 굉장하다는 생각은 하였지만 기겁할 정도는 아니였다. 사건의 무게는 학교에 도착하여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학생들, 선생님들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수업은 카운슬링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예쁘셨던 영어 선생님은, 남편 분이 군인이시라며 눈물을 흘리셨고, 우리는 모두 교실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영화 왈, 미국인들의 영사는 bc 와 ac 로 나뉘지만, 무슬림들에게 역사는 911 이전과 911 이후로 나뉜다고 한다. 사실상, 딱히 그들의 입장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고, 종교적 성향이 강하며, 테러학교라는 기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분명 선과 악이 있고, 분류가 있다 - 매우 많다. 그들을 대하는 시선은 그러한 구분들을 크게 중요시 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는 수천가지의 박테리아 종자가 있지만 그 중 300 종 만이 인체에 해롭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세균을 더럽고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이 처럼 대중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것에 대을 세분화하여 인식하는 습관이 없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을, 보다 어리석게는 모든 중동민족을 테러리스트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
주인공 Khan은 무슬림이지만 마냥 순수한 청년이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 배경 때문에, 그의 이름 때문에, 그의 아들은 죽음으로 몰리고, 그는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대통령에게 전하려 여행을 떠난다. 그가 전하려는 말은 "My name is Khan. I am not a terrorist." 여행 중 그는 다른 이들을 돕고, 자신을 돕고, 사랑으로, 긍정으로 상황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으로 미움으로 뭉친 아내와는 다르게, Khan은 사랑으로 세상을 대한다. 아내는 Khan을 거부하지만, Khan은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아픔을 감수한다.
이러한 사람을 어찌 Terrorist로 모는가. 하지만 분명 이러한 일은 너무나도 흔하다. 분명 9 11 테러 이후에 미국 사람들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였다. 그들의 사업은 사그라 들었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편견으로 가득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매우 흥미롭다. 그야말로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말이다. 유럽에서의 이민가족들, 아시아의 유학생, 이민가족들, 멕시코에서 올라온 노동인력, 동남아시아의 유학, 노동인구 - 그야말로 전 세계가 모여있는 곳이 미국이다. 한국에서 한국어가 서툰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가 서툰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이 모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섞이기도 하는 이 곳 - 인간의 성향을 시험하기 가장 좋은 곳 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집단은 덩어리가 아닌 세부적인 구성원들이 존재한다는 것, 개인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에서도 종교와 인종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이지만, 이 '미국'안에서도 분류가 있다. 편견가득한 시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시선도 있다. 다수가 어느 쪽인지는 분명하지만, 소수 또한 존중받아야하고, 어쩌면 어리석은 다수보다 옳은 기준을 가진 소수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현명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은 개인들로 구성되어있고 옳음이 있는만큼 그름도 있다 - 그렇게 우리는, 모두는 공존한다. 타인의, 다른 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의무가 아닐까 싶다 -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입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훌륭하다.



호박을 건네는 칸, 순수함은 주로 엉뚱히 보이기 마련

 



"No, not Khan. From the epiglottis. Khan. Khan." 칸이 아니고 epiglottis 후두개에서 부터, 크흐흐한 - 크흐흐한 ㅋ ㅋㅋㅋㅋㅋ




"Our Khan has managed to achieve with his love and humanity..." 정의를 위한 싸움도,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만드는 움직임이 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칸. 미움으로 싸우려했지만 결국 칸에게 돌아왔고, 칸의 사랑의 움직임이 옳았음을 인식하는 그녀.






"The death of one innocent is equal to the death of humanity" 정의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무너진다. 그 만큼 정의란 절대적이며, 목숨의 가치는 숫자에 비례하지 않는다 - 하나의 목숨은 천의 목숨과도 같은 것.




"Come back to me baby" 오열하는 엄마 그녀






자동차 따위를 수리하며 여행자금을 마련하는 칸 -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중




기도는 장소와 시선을 가리지 않는다 - 기도 시간에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 있건, 누가 보건, 기도는 기도는 기도는 기도.




여행자 칸




다친 꼬마를 도와주고 Mama Jenny의 집에 머물게 된 칸, Mama Jenny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ㅋ ㅋㅋㅋㅋ




"I... Mama Jenny, I don't know what to say." 양아들은 유일한 최고의 친구였고, 그를 잃음은 - 설명 할 수 없는 일





괜찮을 것을 노래하는 소년 - 아프로 머리 소년의 감성 멜로디, 아들을 바라보는 Mama Jenny의 흐믓한 표정. 네, 괜찮을거에요 -




"This one you cannot repair. Now go." 폭우와 홍수로 Mama Jenny 의 마을이 물로 덮히자 그녀를 찾아온 칸 - 모든 기계를 고칠 수 있더라도 이것은 고칠 수 없다며, 칸의 안전을 위해 돌라가라고 이야기하는 Mama Jenny. 하지만 칸은 돌아갈리 없다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그녀, 칸의 이름 때문에 아들이 죽었고, 칸의 아내가 될 수 없다던 그녀 - 아들의 죽음으로 아픔과 미움으로 뭉쳐있던 그녀, 아들을 보내주기로 결심. 성조기의 색인 빨강, 하얀, 파란 색의 풍선을, 아들이 죽은 자리에서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 나라에 대한, American의 정의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미들, 인종차별, 엇나간 기준들, 이해받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관계들 - 모든 것을 날렸으리라.




드디어 대통령을 만나게되는 칸 - 사랑으로, 순수함으로, 꿈을 이루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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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감독 대니 보일 (2000 / 영국,미국)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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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 디카프리오 오오오 디카프리오, 배경은 무려 방콕. 필연같은 우연으로 전설의 섬을 찾게되는 디카프리오. 전설인지 현실인지 모르지만 지도 한 장으로 옆 방 커플과 일단 출발. 환상의 섬은 전설이 아닌 현실이였고, 그 곳은 진정 paradise. paradise인, 전설인 이유는 극히 비밀로 유지되기 때문.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곳의 위치와 정체를 알렸고, 다른 여행자들이 모이기 시작.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일 - 세상의 공동체도 아닌 자신들 만의 공동체 속에서도 고립되는 주인공.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픔도 죽음도 마다해야하는 paradise.  
사회와 고립된, 여행자들이 모인 정착지. 즐거움과 행복 뿐인 공동체 - 사실일 수 없을 듯 하지만 분명한 사실인 공간. 극적인 환상생활 만큼 극적인 환상악행도 무뎌지는 곳. 남의 고통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 공동체의 즐거움을 위해 무거운 것은 갖다 버리자는 기준. 남들이 괜찮으면 나도 나쁠건 없다는 집단의식. 기준과 가치의 혼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


섬에 도착하는 방법은 수영 뿐




수영하는 셋의 모습




섬에 도착 - 환상을 찾아 왔건만 섬에서 만난 것은 공포와 살인




절벽 - 환상까지의 먼 길




고비를 몇 넘기고 나니 근육질 흑인 옵하 등장, 환상 도착




절벽에서 다시 한 번 뛰어 내림 - 환상의 첫 도착과는 거꾸로의 상황, 이 곳은 진정 paradise인가



작은 공동체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병자는 paradise의 행복의 짐이 될 뿐 - 그의 숨을 거워버리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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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감독 롭 마샬 (2002 / 독일,미국)
출연 르네 젤위거,캐서린 제타 존스,리처드 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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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필요없이 멋진 영화 - 안무 연출 따위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없지만, 정말 멋지다. 언젠가 공연으로 꼭 보고싶다. 한국에서 무려 뮤지컬로 보았던 라이온킹이나 42nd street 보다 멋졌다. 뮤지컬과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려 라이브였던 공연들보다 나의 16' 화면으로 본 영화의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분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쓸 말이 그다지 없다. 시카고라는 상징을 멋지게 소화한, 환상의 연출.

흥미로웠던 점은 캐스팅. Catherine Zeta Jones 는 당연해보이는 캐스팅이다. Richard Gere 는 조금 특이하지만 Renee Zellweger에 비하면 무난한 듯 하다. Richard Gere 와 뮤지컬. . 어정쩡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Renee Zellweger 그녀는 안 예쁘다. 나만의 의견이지만 광대뼈도, 턱선도 가라앉을 듯한 눈도, 예쁘지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에서 그녀의 두루뭉실한 모습은 더욱 예쁘지 않았다. 의도된 것이였지만 정말 예쁘지 않았다. 감탄한 것은 그녀의 연기. 표정을 너무나 편안히 사용한다. 내민 입술 모여진 미간, 의도된 불쌍함을 표현. 난 불쌍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도이고, 너희는 나를 동정하고 동경할거야라는 듯한, 글을 읽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연기한다. 나의 인식중에 있는 생각이여서 그리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배우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기분이였다. 그녀의 꼭두각시 춤 또한 매우 훌륭했다. Richard Gere 의 무릎에 앉아서 팔다리 얼굴을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줄에 매달린 인형같았고, 여기서 그녀의 표정 또한 매우 조절되었다. 자신의 몸, 얼굴의 근육들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 특별하다 할 것 없어보이는 그녀에게서 이러한 환상 움직임 연출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사진 출처 http://www.sheetmusicplus.com/look_inside/4896040/image/228636
http://www.biography.com/famous/fam_episode_guide.jsp?episode=15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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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1992 / 미국)
출연 크레이그 셰퍼,브래드 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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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동생, 보수와 진보, 인종차별, 종교, 예술의 완벽함, 인간의 부족함 - 모든 것을 조화롭게, 눈에 띄지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린 영화. 배경 또한 무려 Montana - 아름답다.
A River Runs Through It -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변역되었다. 번역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간다, 반명 쉽게 넘어간 듯 하다. 90년대 초반이기도하고 직역도 해석된 번역도 아닌 쌩퉁맞음. . 제목의 본 의도는 분열, 움직임, 가능성 - 이였을거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가르는 강, 강의 움직임, 강 가득한 가능성. . 제목의 번역이 아쉽지만 번역은 늘 아쉬운 것이겠지.


낚시하는 신난 동생



혼나는 형제




춤추는 동생과 여자친구





우는 형의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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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감독 토드 케슬러 (2008 / )
출연 제시 맥카트니,엘리자베스 하노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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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 그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 그래도 볼만한 이유는 공감일까. 딱히 멋진 구도나 연출도 아니였는데 말이지 -

Walk to Remember 와 똑 닮은 스토리라인 - 다만 아픈 것은 남자 주인공이고, 둘은 연극 대신 화학 랩 파트너이다.

전형적인 Campus queen, 엄마아빠의 공주 - Natalie와 남신경 안써, 자유의 영혼 Keith.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Keith , 명문대 입학을 앞둔 Natalie. Keith는 말하기를 - 나는 죽음을 앞두었고, 너는 너무 잘났다. 너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너에게도 인생의 장난같은 구차함을 , 얼마나 엿같을 수 있는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 삶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사나마나 그따위 것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너.. 네가 모든 것을 이상하게 했다. 너, 너는 너무 굉장했고, 나, 나는.. 시간이 조금 갖고싶어졌다.
사람의 마음에 욕심을 심는 것 -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Keith 에게 , 기대를 심은 Natalie.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거라던 - 꼭 사과나무만이 사과나무는 아니다.

"...and you, you are so amazing. and i, i just wanted a little more time."



Natalie의 이야기를 듣는 Keith의 표정을 보라 - 아유


청소년의 진지함은 남보기엔 귀엽지만, 본인들에게는 정말이지 진지하다, 정말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능글맞게 농담놀이를 즐기는 Keith




"i made love to you"





"...and you, you, are so amazing. and i, i just wanted a little mor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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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감독 숀 펜 (2007 / 미국)
출연 에밀 허쉬,빈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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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영화의 전개에는 서두가 없으나 주인고잉 바라는 점은 하나이고 분명하다. 주인공은 명문 대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비를 대주겠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떠난다. 차르 타고 떠난다, 일단 서쪽으로. 모든 돈을 기부, 물질적인 것들을 떠나고 싶은 욕망. 사회의 규율에 대해, 직업이란 현대사회의 창조물이라는, 그 따위의 것은 필요 없다는 주인공. '영혼의 혁명' spiritual revolution을 향하여, 걷고, 일을하고, 사람을 만나고, 혼자임을 바라고, 야생에서의 생활을 바란다. 야생 열매를 먹고, 작고 큰 동물들을 먹는다. 물을 마시고 얼음을 녹여 마시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한다.  돈을 불태운다. 책을 읽으며 일기를 쓴다. 아기가 있는 짐승을 쏘지 못한다.
부모에 대한 반항감, 사회에 대한 저항. 젊은이의 열정이라기에, 그의 것은 너무나 뜨겁다. 열정과 이성의 중심따위는 없다. 그에게 이 자유에 대한 욕망은 열정이자 이성이고, 모든 것이다. 가족도, 인연도, 여자도, 어떠한 것도 그는 마다하고 '단순한 아름다움' simple beauty를 향하여 계속 걷는다. 그를 만나는 이들은 그에게 가족이 있느냐며, 가족이 되자며, 사랑을 하자며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혼자의 길을 떠나는 주인공.


사과에게 대화를 하며 씹어먹는 모습. 나도 사과가 먹고싶다.



두려움이라던 물에서 카약을 질주하며, 멕시코까지 내려간다. 국경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도 부수고, 국경도, 사회적 인식도, 가족의 틀, 친구의 우정, 돈의 허용범위, 법, 모든 것을 버리고 부순다. 그것들을 깨고 자신만의 이야기 story 를 쓰러 그는 움직인다. 아파도 다쳐도 괴로워도 슬퍼도, 자연에 대한 기쁨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 하다. 멕시코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향한다 - 알라스카. 그야말로 횡량함을 찾아 떠나 움직이는 주인공. 아무것도 누구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내적 혁명을 향한다.
알라스카에서 '매직 버스'를 발견하고, 그곳에서의 생활. 커다란 동물을 잡아 먹으로 쏘지만, 그것은 구더기로 엉망이되고 먹을 수 없게된다. 인생의 최대의 실수라며, 인간에게 혀용되지 않은 야생의 범위에, 괴로움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이 깨트린 수 많은 범위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불가능이라는 제한. 하지만 그러한 벽에 부딫히면서도 그는 기뻤으리라 - 자연의, 야생의 단조로움에, 극단적임에, 그는 기뻤으리라.
"calling each name by its right name - by its right name" 제 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우리는 돈을 행복이라하고, 직업을 필수라하고, 사람을 사랑이라고 한다. 가정을 안정이라하고, 종교를 평화라하고, 권력을 힘이라한다. 착각이다. 모든 것은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간과하여 보는 것에 우리는 익숙치 않다. 그것의 영향에 집중하는 경향이 훨씬 크고, 그 영향은 작은 일부일 경우가 허다하다. 극 중, 모든 것을 떠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위하여 Alexander 라는 이름을 짓는다. 죽음 앞에서 그는 본명인 Christopher 로 자신을 칭한다. 그렇게 그는 떠났지만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when you forgive, you love." 용서는 사랑이라한다. 용서는 사랑 - 괴로워도, 미워도, 싫어도 수용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리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쉽고, 더러운 것을 받아드리기는 어렵다. 어려운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리라 -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떠한 것으로 더러움을 어려움을 괴로움을 부정을 세상에서 외롭지 않게 하겠는가.
그는 삶의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하였고, 죽음의 순간에서 남긴 문구는 'happiness is not real unless shared' 나누지 않은 행복은 사실이 아니다. 혼자임을, 횡량함을 갈망하여 알라스카까지 갔지만, 그 또한 loneliness 외로움에 대하여 글을 썼다. 외로움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 뛰는 심장과 같은 것이리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정이거나 인식하지 못한 아둔함이지 않을까.
"not to be strong, but to feel strong" 자신감이라는 말을, 어감 때문인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뜻을 보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신을 믿는 마음. 자신감이 때로 싫은 것은, 그것과 자만감의 경계가 모호하고, 둘을 넘나드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되, 자신으로 가득차면, 타인과 옳은 기준들이 들어올 틈이 없음으로, 자신을 믿되 겸손이라는 마음으로 늘 자신을 다시 비워야한다. 강할 순 없다, 강할 수록 상대적으로 강한 이가 있으며, 우리는 영원을 향해 늘 움직인다. 하지만 강하고 싶지 또한 않다, 그저 자신을 믿는 마음이 강할 수 있으면  - 하는 바람이다. 그 만큼 나를 믿고, 사랑하고, 수용하면 강함도, 약함도, 용기도, 굉장함도, 이러한 특정 형용사 따위는 모두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면 족하다, 나에 대한 믿음.
틀을 벗어난 그의 모습에서,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간단함을 아낄 줄 아는 모습에서 - 나 안의 그러한 것들 또한 자극을 받는다. 자유, 자유, 자유, 자유 도전 창조. 미니멀한 삶에 대한 동경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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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이클 앱티드 (1994 / 미국)
출연 조디 포스터,리암 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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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North Carolina Robbinsville 과 Charlotte 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영화 속의 호숫가 풍경, 그리고 그 밤 호수를 수영하는 Nell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평생을 엄마와 둘이 고립된 숲 속에서 생활하였고, 엄마의 죽음으로 Nell 은 혼자 살아가야한다. 세상을 만나 본 적 없는 그녀, 낮을 두려워하고, 영어도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을 한다. 영화는 넬의 다름을 강조한다. 그녀의 행동, 언어, 습성 등 문명이나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밤에 수영을하고,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고, 팝콘을 처음 먹어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Nell 은 현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누구나 혼자임을 안다 - 엄마도, 동생도, 친구들도 각자임을 알고, 떠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안다. 죽음은 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괴롭도록 그립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음 또한 안다. 상대의 눈을 바라 볼 줄 알고, 마음을 열 줄도 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언제 필요한지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하대하고 다르게 취급한다. 그녀를 농담거리로 삼고, 과학적 예시로 삼으려 안달이다. 정녕 바보가 누구인지는 당연한 질문이다.

nature vs. nurture - 사람의 본성은 어디까지 이며, 양육의 영향은 어디부터인지. Nell 은 세상과 고립되어있던 존재임으로, 심리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된다.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며 자신이 아닌 존재와 교감을 하고, 놀라면 빠르게 서성거리며 괴성을 지른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그녀는 혼자 산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 생을 하였다. 그 동안 엄마의 행동을 보고 닮았을 텐데, 엄마는 문명과 접한 적이 있던 사람이였음으로, 엄마의 행동이 넬의 행동의 표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넬은 여러 트라우마를 겪는다. 이를테면 자신의 쌍둥이 동생의 죽음, 그리고 강간당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러 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그녀의 정신을 불안정케 하였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다시 엄마의 역활을 의심해본다. 그녀는 왜 엄마로써 딸의 안정에 도움을 주지 못 하였을까. 주었다면 그것은 왜 그리도 미미하였을까. 넬은 엄마라는 존재와 살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야생에 가깝다. 물론 그것이 영화의 의도이지만 구성의 억지가 아닌가 싶다.

내용은 흥미롭고, 구성은 얼추 괜찮지만, 가장 멋진 점은 Jodie Foster의 연기이다. Nell 은 영어와 가깝지만 다른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범위가 없는 자신만의 자유에 기준을 두고 생활한다. 이를 연기하기 위하여는 일상의 모든 습관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걸음걸이, 손짓, 시선, 동선, 표정 등 Nell 의 것은 다르다. 새로움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익숙함을 본인의 몸에서 지워야 했을 것이다. Foster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연기하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법정에서의 Nell 은 처음의 Nell과 달랐다. 그녀의 언어는 보다 영어에 가까웠으며, 행동 또한 일상인의 것과 흡사하였다. 마지막 장면의 능히 변화된 Nell의 모습을 보아하니, 법정의 장면도 의도 되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렇게 그Nell 은 우리와 달랐지만 같았으며, 가까워졌고 일부가 되었다. Nell 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는 - 나만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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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감독 카메론 크로우 (2001 / 미국)
출연 톰 크루즈,페넬로페 크루즈,카메론 디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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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Sky

딱히 환상은 아니지만,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iMDb 점수 6.9. 그래 점수는 후할수록 매력 없지.

 

David: 주인공
Sophia: 환상, 이상향 
Juliana: 현실, 저항요소
Brian: 의미부여 없이 친구라 하죠
Money / Company: 책임, 현실의 생활
Love
Dream Reality: 이상과 현실의 사라진 거리, 공존

 David 아버지의 회사를 상속받고, Juliana 그의 놀이관계. Brian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Sophia 만나는 계기. 만난 Sophia에게 David 의미와 환상을 부여. Julia와의 교통사고에서 David 얼굴이 괴물. 자신을 몸은 냉동, 속의 삶을 산다. 하지만 잠재된 의식의 방해로 그의 꿈은 악몽. 마지막에 그는 현실로 돌아갈 기회와 꿈으로 고쳐진 악몽을 살아갈 갈림길에서, 자신의 궁극적 두려움인 고소공포증을 대면하고 현실을 선택.

Open your eyes. 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눈을 떠라. 모든 사람들은 David 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분명 주인공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잃고, 둘을 융합 속에서 객관성을 찾지 못하는 악몽을 살아간다. 그의 제작이기도 환영들은 그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을 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주인공은 가면을 쓴다. 세상의 돈을 모두 가졌지만, 그는 시대의 기술에 갇혀 완벽한 얼굴을 복구하지 못한다. 흉측한 얼굴에 대한 시선을 감추는 이도 많지만, 클럽의 바텐더처럼, 그것을 경계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이처럼 당연한 현실에 분노한다. 사고 후로 Sophia 그가 아닌 그의 친구 Brian 사랑을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의 환상은 환상이니만큼 아름다운 Sophia 그를 구하는 손길이 되어 함께 아름다움을 살아간다. 그것이 주인공이, 누구나가 바라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의지와 공존의 .

하지만 그의 이러한 환상은 잠재된 두려움들로 악몽이 된다. 회사에 대한 책임과 업무적 일의 엮임은 사회의 억압을 대표한다. 그는 자신이 회사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며,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결국 주인공에게 남는 친구란 없다. 사랑하는 Sophia 마저 악몽의 Juliana 구분치 못하고 그녀를 살인하기까지 이른다.

괴로움이 아름다움을 마시고, 그것을 죽이려 주인공은 자신의 환상 또한 함께 포기 밖에 없다.

주인공은 분명 정신적 앓고 있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또한 흐리다. 냉동이라는 방법으로 죽은 사람을 미래까지 보존시키고, 꿈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있게 해준다. 이렇게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아무 것도 정확하지 않으며 평범치 않은 와중, Radiohead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흘러나온다. 적절타.

분명 영화는 보편과 전형의 선에서 이탈하였지만, 누구나 공감 하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하였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바닥에는 사람의 감정이 깔려있다. 두려움, 사랑, 행복, 이상, 동경, 도피, 절망, 혼란, .

또한 영화는 사회적인 압박을 회사와 얼굴이라는 대표적인 개체들로 표현하였고, 그것이 누리는 영향의 범위를 보여준다.

사운드 트랙 또한 퍽이나 보편적이다. Radiohead, Sigur Ros, Beach Boys, Chemical Brothers, U2, Jeff Buckley 꽤나 흔한 음악들이 사용된다. 또한 적절한 아이러니 플레이가 아닌가 싶다.

Vanilla Sky 의미를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그림에 대하여 설명하며 Vanilla Sky 잠시 언급되지만 짧게 넘어간다. 보다 자료를 뒤져보아야겠다.

2001년의 영화, 조금 세련되고 정교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으나 깔끔한 측에 속한다. 사랑, 사람, 바람, 현실, 약간의 공상이 가미된, 괜찮은 주말영화.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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