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조언으로 한 밤 중에 거울을 보며 웃고 사진도 찍었다. 제법 괜찮은 조언이다, 고마운 친구. 힘들어서 .. 어지간이 아니라 결코 절대 하고싶지 않은 이야기였는데 해버렸다. 잘 했다, 참 잘 했다. 나눔은 상당히 너무 굉장히 많이 무겁게 어려운 것이지, 해서는 안되는 금기 할 수 없는 불가능은 아니었다. 세상은 어제 오늘 다른 것이 없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단계의 끝이고 다음 단계의 시작이기에, 천천히 하지만 결국은 새로움에 닿게 될 것이다. 기대 긴장 안도 무섭 ..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감사 감사,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이들이 숫자로도 많고 그 개인들이 나에게 주는 역량은 숫자라는 개념으로 담을 수 없이 아름답다. 
낮과 밤의 반복처럼 기쁘고 슬프고, 괜찮고 괜찮지 않고, 외롭고 외롭지 않고 .. 돌고돌고 반복반복, 궁극적으로는 기쁘고 괜찮고 외롭지 않다, 믿는다, 응 끄덕끄덕. 친구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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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나간 하루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는 그 자체로써 이롭다. 이따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굳이 필요하다. 어제가 그립고 오년 전, 십년 전이 그립다. 지나간 하루는, 그야말로 '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좋다 아름답다. 지난 날을 미화하는 것은 긍정적인 습관이거나 합리화.
예쁘고 개성있는 사람들이 가득 앉은 카페에,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나의 하루는 결코 춥거나 배고프지 않고, 피곤 할 수 있지만 괴롭지않으며, 적당한 양의 할 일이 주어지고,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과 교류가 이루어진다. 재미있는 일은 가까이 있고 위험은 나에게서 멀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하루하루들로 채워진 나의 생활은 그야말로 좋은 팔자이다. 
몇 시간 전까지 내야했던 에세이는 마무리 되지 않았고, 자신에 대해 장점이다 할 것을 찾지 못하며, 게으름을 휴식이라 합리화한다. 졸업은 일년이 넘게 남았고 학부 교과과정이 나를 차지하고, 사랑을 탐험 할 시간은 없다. 거리의 예쁜 사람들을 동경하며 맛있는 요리를 만들지 못하고 마지막 운동은 한 달이 지났다. 이 알록달록 재미있는 카페에, 나는 에세이를 쓰러 왔다. 망할 나의 젊은 날의 에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매일. 잔은 늘 반이다. 반 뿐인지, 반씩이나 인지는 관점차이라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감히 모든 것을 불구하고 확신함은 외로움은 마르지 않는다, 결코. 외로움은 젊음의 친구가 아닌 존재의 친구인 것이다, 녀석도 외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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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월 15일 0128시 - 새로운 친구와 즐거운 데이트 후 새벽

딱히 맛있지는 않은 밥을 먹고 , 마실 것을 마시러 갔지만 조용한 곳을 찾지 못하야 대략 귀가. 나는 외모지상주의 임을 심히 느끼는 요즘이다 - 구여운 친구는 좋고 그렇지 않은 친구는 그다지니 말이다 ...
친구는 어둡고 슬픈 것을 좋아한다 - 음, 간만에 어둡고 슬픈 것들을 기억하며 이리저리 관심의 방향과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시험은 다가오는데 읽고 싶은 책이며 하고싶은 놀이며 보고싶은 곳이며 많다 쿠.. 크 ! 행복하다 감사하다 겸손하자 아멘 -

 


09월 18일 2348시 - 자전거의 하루 

역시나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끄적거리다가 성당에 미사를 드리고 내리막 길을 슝 내려가 -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자전거와 좋은 풍경을 보며 슈슈 즐거운 하루가 지났구나.
하 .... 체력의 한계는 일상과 너무 가깝다 - 참으로 자주 느끼는 운동의 필요성. 다음 학기도 꾸준히 계획을 두고 운동을 해야겠다는 - 차분히 무어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고등학교 때에 비해 생각들이 어렵지 않고 간단히 정리되는 것이 - 마음이 편안하고 이런게 어른이 됨인가 싶지만서도 갈 길이 멀고 멀다. 음 ~ 오늘은 잘 잘 것 같은 좋은 예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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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준이가 Project Friend에 해당이 되는지 ..... 친구를 적극적으로 만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어찌 창준이가 과반수 일 것 같다는 허허. 창준이가 짜응이니 뭐 아무렴 어떠리요. 창준이와 도서관 갔다가 저녁에는 무심천 도로를 달렸다는.도서관에서는 창분이보다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공부 오예 오후에는 나보다 창준이가 백배 더 잘하는 운동 오예! 백년만의 운동 하아 ....... 운동에 대해 새로운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개월 정도 운동을 쉰 듯 한데 - 운동이라는 것이 생활에 참 필요한 것이라는 것 ! 을 다시 깨달으며......
무엇보다도 창준이의 '굉장함'을 느낄 수 있는 운동시간이였음. 창준이 한 달 10kg 감량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내 동생이 이렇게 굉장한 인간이라니 ..... 아침 저녁을 계란으로 먹고 점심을 김밥 한 줄 먹었단다. 플러스 근력운동 2시간 장거리 달리기 2시간 - 매일 운동 4시간..... 근력운동은 3분 운동 30초 휴식 반복을 2시간 돌리고, 장거리 달리기는 그냥 계속 달리는거임 ........ 달리기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운동종목이라는데, 창준이의 인내심을 새로이 느끼는 날이였음. 내 눈은 반짝반짝 사랑스런 나의 동생, 어딘지 조금 안타깝기도하고.. 그 아픈 무릎으로 청주 약수터길을 - 그 길고 고부랑지고 언덕진 길을 20분만에 왕복으로 뛰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누나는 감탄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 하아. 창준아 네가 짜응임.

공부 중 목마르다니까 창준이가 사다 준 비타민 음료 크크 둘 다 만원짜리 밖에 없어서 가방뒤져 나온 오백원으로 자판기에서 하나 겨우 뽑음 크크


비타민 음료 나눠 마시기


셀카 윤영과 사진촬영을 거부하는 창준이


운동 후 셀카 윤영과 사진촬영 거부 창준 ㅋ ㅋㅋ 다른 장소 같은 상황 - 내 표정도 이전과 같음 ㅋ ㅋㅋㅋ


창준이 방학해서 너무 행복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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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아르바이트를 하게되었다. Outdoor Research (OR)은 Backpacking, hiking, skiing, snowshoeing, 등등 outdoor 기어들을 파는 회사이다. Nordstrom의 일부로, 설립된지는 10년이 조금 넘은 듯 하다. 다음 Season 의 제품들을 가지고 Domestic/International Buyer들을 위해 3일 동안 Presentation 형식의 Show 를 연다고 한다. 그 중 한국 Buyer를 위한, 한인 assistant 로 고용되었다. 따라서 OR은 나를 3일 동안 고용하였다, 하하.
Show 가 있기 전에, 진행형식 등 회사에 대해 조금 더 알고싶다고 하자 나를 회사로 초대하였다.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였다. Show의 스캐줄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Conference 장의 위치, 한인 Buyer에 대한 설명 등 자세한 설명들을 듣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불어 회사 Tour를 시켜주었는데, 회사는 7층 건물로, 1층에는 매장이 있고, 7층은 오피스들, 그 사이는 무려 공장과 Storage가 있더라. 정부를 위해서도 물건들을 만드는데, 그러한 제품들은 State 주 내에서 만들어져야한다는 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이 곳에서 만들고, 이 외의 제품들은 China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장갑이나 헤드기어 따위가 만들어지는 모습들을 보았는데 대부분 중국, 베트남, 멕시코 계의 노동자들이였다. 바느질 작업과 커팅 작업 등 모두 손으로 이루워지는 모습은 신기했다. 플러스 상당히 깔끔히 정돈되어있는 모습 또한 멋졌음.
어떠한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J Crew 이후로 처음, 그 회사의 본사를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보게 된 것은 처음이다. 나를 고용한 Jackton이라는 사람은 미생물을 전공하였는데 현재 International marketing manager 자리로 일하고 있다. 회사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당히 깔끔하고 편안하지만 책임감있는 느낌이였다. 회사에 대해 매우 좋은 이미지를 받았다. 이렇게 사회에 대해서 하나씩 배워가는 것 같아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다.
Show 는 다음 주, 기대된다. 샘플 등, 제품들을 선물할테니 싸이즈를 알려달라던 고용주. 무엇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등산용품이니 유용히 쓸 수 있는 것 들일테지, 기대가 된다. 하하



회사 도착, 이 때까지만해도 긴장했음 하하


화장실에 매우 친환경적인 손 타올이 있었다


오피스 입구


새로 진행되는 암벽 세트란다, 제품들을 실험하기 위한 핑계로, 놀으려고 만들었단다 허허


아직 미완성임





6/1 day 1 그 후
아, 첫 날이 끝났다. 조금은 긴장하였지만 전혀 두려울 일 없던 하루였다. 종일 한인 바이어 곁에서 통역과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지를, 또 사회라는 곳이 얼마나 기이한지를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를 고용한 OR 의 international marketing manager 는 나에게 한인 바이어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고 이야기하였다. 오늘 만난 한인 바이어는 미국 녀석들의 비즈니스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하였다. 서로 순조롭지만은 않은 관계인 것 같다. 서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지만 중립적이고 양문화를 어느정도 수용하는 나에게는 두 파티 모두 서슴없이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정작 서로 앞에서는 별 말들이 없다 .. 아무튼, OR 측은, 한인 바이어의 구체적이지 않은 마케팅 제안서에 불만을 표했고, 한인 바이어는 OR 측의 느린 서비스와, 일본 시장이 넓어지면서 한국에 소홀해하는 것 같다는 점에 불만이 가장 컸다.
한인 바이어분에게 불만을 직접 이야기해보시는게 어떻냐고 제안하자 저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셨다. 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하지도 않고, 그들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수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쩌면 전형적인 동양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어 분은 더이상 OR 에게 대화나 기대보다 그저 비즈니스만 하고싶어했다. 반면에OR 측은 한국의 시장에 대한 이해, 앞으로의 전망 등을 공유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둘의 소통은 ,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내가 고용되면서 OR 측에서 들은 바로는, 통역가라기보다 바이어가 본인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의 생각을 끌어내는, 협정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바이어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얼만큼을 OR 측에 전달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바이어분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그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의, 편안한 마음에 나에게 이야기를 쉽게 하셨으리라. 그러한 이야기들을 OR 측에 전달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편을 들려 하는 일이라기보다 그저 나의 의견이 그러하다. 이런 점을 고려 할 때에 나는 한인의 정서보다 서양의 정서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하지만 정보와 요구사항을 공유하고, 현재의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전망들을 나누는 것이 보다 전반적인 사업에 효과적인 것 아닐까? 나의 의견에 대한 옳고 그름은 없으리라.
더불어, 바이어에게서 한인 사회문화에 대해서 조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본인이 수입한 물건들을 여러 매장측에 공급한다고한다. 이 또한 물주와 바이어들의 만남이 이루워지는데, 이번 OR 측의 행사와 의도는 같다 - 도매점들에게 물건을 설명하고 홍보하는 것.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다르다고한다. 오늘 OR 측의 쇼같은 경우, 제품들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많았다. 예를들어 Gaiter 를 착용하고, 흙 위를 달리는 wii 를 설치해둔다던가, 래프팅을 위한 모자를 위해 강풍 선풍기와 래프팅을 준비해두는 모습들을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고 한다. 아무도 그러한 세팅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물주와 바이어들은 점심부터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물건을 팔고 사는데에 물건을 설명하는 시간보다 개인적 bonding 을 하는 음주의 시간을 갖는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며, 역시나 미국의 work ethic 이 보다 나에게 편안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비록 잠시 뿐이였지만 J CREW 에서의 경험, 그리고 OR 에서의 경험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물론 한국의 제주도 IVY CAMP 의 경험도 재미는 있었지만, 미국의 비즈니스만큼 깔끔함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회사의 규모에서 수백배의 차이가 있지만, 시스템의 기초라는 것이 애초에 한국 비즈니스에서는 약한 것 같다. 전반적인 틀과, 세부적인 규정들이 매우 부실하거나, 딱히 중요시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기준이 흐릿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결코 유쾌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졸업 후에 어디에서 살고싶냐는 질문을 물어온다. 가장 이상적인 일은 미국에서 국제기업에 취직하여, 어느정도 경력을 쌓은 후에 한국으로 발령을 받는 것이다. 오늘 바이어분도 이 이야기를 하셨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아무튼 어떠한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솔직히 어떠한 일을 하여도, 그 시스템이 깔끔하고 환경이 유쾌하다면 즐거울 것 같다. 그 일이 한국이냐 미국이냐 사이에서는 솔직히 미국에서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비록 짧았지만 한국에서의 사회경험에는 술이 너무나 쉽게 포함되어있고, 그것의 비중감이 결코 적지않다. 사교또한 이제는 오히려 이 곳이 편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이렇게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는 것일까 .. 결국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중간계 정도의 오지의 , 소속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 딱히 걱정되는 일은 아니지만 유쾌하지만도 않은 일이다. 물론 유학생의 인구가 늚으로써 나와 비슷한 다사회적인 인구가 늘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유학파인구의 소속이 될 수 있을까, 그 또한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객관적으로 그래 보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오늘 미팅에는 도메스틱 국내, 그리고 인터네셔널 국제 바이어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룹을 미국 팀, 캐나다 팀, 그리고 그 외 국가들 팀으로 나누어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또한 매우 인상적이였다. 한국, 일본, 대만, 칠레, 유럽대표팀 이 있었다. 일본은 지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한동안 등산을 기피하였지만, 등산복과 같은 옷들을 대비하여 많이 사는 바람에 매출이 늘기도 했다고 한다. 지진의 여파는 여전히 느껴지지만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고한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지진의 가능성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였따. 대만이 가장 흥미로왔다. 어쩌면 내가 중국에 가장 흥미를 두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국의 outdoor sports 시장 규모는 점점커지고 있다고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 물론 많은 땅이 있지만, 공적인 땅들도 개인의 소유인 곳들이 많고, 정부의 규제가 여전히 심하다고한다. 이리하여 스키와 같은 outdoor 문화를 성립하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OR 측이 중국의 문화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얼마나 거시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성립되지 않은 중국 시장이지만 그 시작을 분명히 감지하고, 정부의 개입 때문에 어려워보이는 문화육성에 기대를걸고 있었다. climbing festival 이라는 행사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움직임은 움직임이니라. 이 처럼 OR은 제품을 팔기위하여 문화를 양성하고 지지하고있었다. 칠레는 지진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으나 대부분의 혼란은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경제는 건강하고 환경적인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수로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유럽 대표는 여러 국가들의 대표들을 모아야 함으로 미팅이 비교적 어렵다고하였다. 더불어 러시아의 정치적 움직임 또한 경제와 문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 대표의 주장은 내가 번역하였다. 한국 현재 시장은 매우 경쟁적이다. 거의 모든 해외 outdoor 브랜드들이 한국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고객들의 기준이 높다. 더불어 아이템이 나오는 족족 국내 브랜드에서 유사제품을 보다 저렴한 값으로 만들기 때문에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더불어 이처럼 많은 경쟁과 제품들 사이에서 브랜드 밸류와 값은 둘째이고, 첫 째는 기능이라고 한다. 또한 인터넷 쇼핑의 문화는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세계의 국가들이 개인적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또한, OR 의 제품들을 보면서, 참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서 차별화 됨을 만들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어가는지에대해 놀랐다. 솔직히 왠만한 방수 자켓은 비슷해 보이기 마련이다. 시장에 나와있는 방수 자켓의 수는 대여섯 쯤 되고, 그 사이에서 가격, 기능, 디자인 등을 꼼꼼히 따져 고르는 것이 고객이다.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브랜드를 개별화 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엇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디자인 면에서 볼 때에 많이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다. 트렌드를 따라야하고 대중성이 있어야한다. 기능면에서 뛰어나는 것은 값에 큰 타격을 입히고, 가격 내에서 기능의 차별화를 두는 것에는 정도의 한계가 있다. 더불어 미세한 기능의 차이는 어떻게 마케팅되느냐가 강권이고, 대중에게 이해받기란 쉽지 않다. 매 해 비슷한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회사들도, 이렇게 미세한 것들을 연구하고 수정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어느정도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흥미로운 배움이였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조금씩 사회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내일도 무사히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점심 메뉴가 맛있게 나와서 좋았다 크크. 페이 또한 기대되는 바이다. 이왕하는 일 열심히 해보자 !

6/4 끝

끝났다. 일이 끝났다. Jackton도 한인 바이어 분도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미팅을 가진 듯 하였다. 둘의 한계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한 분위기였으나, 마무리는 모두 서로의 노력과 제한적인 부분들을 수긍하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역시나 마무리가 깔금하고 정리되어야 긍정적인 전반적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듯 하다. 나의 업무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나 또한 좋은 마무리의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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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4일 동안 인터넷에 코를 박고 있었다. 정신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던 듯 - 아무것도 없는, 세상아닌 곳에서 올라오는 글들만 읽었다. 괴로운 마음에 그나마 웃음을 주었던 글들 - 제 각기의 상황이 있는 글들이기에 이렇게 정리하면 이해 할 수 없을테지만, 나를 위해하는 정리이니, 나는 지금 읽어도 웃기고 좋다 하하하.

농협이 좀 보고 배워야 할 듯.. 국정원 출신인가?
이지아는 근로 소득 신고도 안하나 봄..
왜 이지아가 이혼소송장을 냈는지 알겠다. 하는 거 보면 욜라 답답해 느려 터졌음.
지금 스토커들 직무유기라고 탓하는거임?
지아덕에 진서가 광명찾네.
둘이 있을때 외계어로 대화했을 듯.
석중이가 형수님 발언했을 때 그 표정,,
타로점 보고있음.
포기했으면 그냥 가... 걍 가...
미친년 중에 수더분 골랐으니 미친년
영화촬영이였음.
본능에 충실한거지.
외계인 얘기 해줄게 컵케익보다 니가 소중하니까 (도배)
팬덤 물갈이 되면서 1급수들만 남겠지. 그럼 난 청정수. 
속 안 좋을때 얹히다 하잖아.
서태지씨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독거노인
수트입은 남자의 등짝.
인터넷 덕후
임백천
피부에서 빛이난다. 나이 40에 은가루 뿌려 놓은거 같애. 징그러.
간신이 연산군을 그렇게 만들었지.
(애들에게) 우황청심환 쏴주고 싶음.
다리 세개 달린 것들 믿지 말랬지.
교탁이 없어서 못한다.
(애들) 되새김질 쩔어.
왜 이러니 진짜, 이 정도로 우리 친해졌니?
까야 제맛.
앉아서 천리.
조증인가봐.
모기소리 되고.
동네 바바리맨.
난 이제 남자 귓방맹이를 날릴거임.
나 그거보고 얼굴도 구리게 나왔는데 스토리는 더 어이없어서 팬질 접으려고 했어.
그냥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싸보지.
호구데이
당신의 건초가 될게요



와중 와 닿았던 글들.....
익숙한 세계가 무너진 기분.
서태지의 꿈은 감춰진 정현철의 행복.
세상이 다 알아도 나는 몰랐음 좋앗을걸 그렇다.
진흙탕이다.


웃긴데 슬펐던 글....
차라리 맨슨같은 애를 좋아할껄 어떤 사고를 쳐도 아무렇지 않은 놈으로
링겔주사



무튼 함께하는 팬들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였다. 태지의 문화가 즐거운 큰 이유가 그의, 우리의 팬덤이다. 지금 생각하니 ... 모르겠다 마음을 놓아버렸으니. 이에 대한 마음의 정리는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일단 보류.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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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따끈따끈한 햇빛을 스미며 누워있었더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근래 계속 하는 이야기지만 기분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 교통법 딱지, 자동차 사고, 기름값 (차를 갖다 버려야. .), 적자통장, 게으른 나의 모습, 기다려야하는 대학통지, 정리해야 하는 책들, 뭔 소리 하는지 알 수 없는 생물교수. . 이 정도가 근래 생활의 번거로움 인 듯 하다. 왠지 쓰고보니 순위도 딱 저 정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차를 버려야한다는 결과가나오는구나. . 아무튼, 딱지를 받은 날에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 알고있었고, 기분이 더러웠지만, 무언가 감정의 집착이 사라져버린 요즘. . 이 또한 6개월 후면 쉽게 잊을, 아무런 쓸모없는 에너지, 감정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사실 생활의 번거로움을 찾아보자니 저러한 리스트가 작성되지만, 저들에 대해 나의 에너지의 5%도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근래 나의 기분이 좋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된다. 나의 기분은 왜 좋은가? 얼마전 주위 친구들, 사람관계를 돌아보며, 그것에 블로그를 쓰기도 하였다. (http://watericious.tistory.com/101) 확실히 주위 지인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더불어 사순시기 동안 시간을 들여 읽고있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들에 대한 공감 또한 마음을 비우는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 나의 21년 삶을 돌아보면, 나의 전반적 분위기는 중립, 혹은 어둡에 가깝다. 중립보다 어둠에 가깝다고 해도 되리라. 복잡한 지능싸움따위의 영화를 즐겼고, 나 자신을 더럽게 여겼으며, 가볍기보다는 무거운 주제들의 글을 읽고 썼고, 쉬운 일들은 하소롭게 대하였다. 나의 즐거움은 나에게 매우 생소하다. 나의 변화는 분명하다. 무언가 편안한 일이 하고싶어졌고, 나의 생활에 대해 수긍하고있다. 세상의 불합리를 합리로써 이해한지는 오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최근에 일이고,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작아지기도 하였다. 안락은 나약함이라 믿었던 기준또한 변하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마음의 무게가 변함에 따라 매우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분명히 어느정도 변하였다. 궁금한 것은 왜, 나는 왜 변하였을까?
사람. . 사람이란, 사람이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하느냐가 보다 관심두어야 할 이야기이지 않을까. 개인마다 필요한 것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활의 근본에,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오늘 '선택'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내용이언정 30의 싱글이, 말이 통하지만 공부를하고있는 경쟁력이 없는 남자와, 가정과 사회생활이 안정되어있지만 특별히 재미가 없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글이였다. 글의 댓글 중에는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경쟁력 무시 못 해', '둘 다 아니야', '나이에 압박받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등등 다양하지만 흔한 답변들이 있었다. 보기에, 이것은 매우 흔한 질문이며, 매우 흔한 답변들이다. 이러한 질문은 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600년 후에도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 또한, 시대를 반영하겠지만 멀리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생물의 육체적인 공통분모도 있지만,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바닥은 외로움과 사랑일 것이다. 모두들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사실, 외로움. .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사랑 뿐. .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 순간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감정도, 시간이 지난 후 착각이라 느끼고, 사랑이 아니라 느꼈던 믿음도, 돌아서서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외로움, 누구나 알고있고, 필요하고, 정확히 정의 할 수 없는,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 애매하고도 근본적인 감정들.
외로움에 대하여 - 우리는 외로운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는 사람인가? 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울 수 있는 것이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때로 배가 고프기도하고, 고프지 않기도 한 것과 같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같은 논리로, 인간은 누구나 외롭지 않다. 얼마 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처럼, 혼자인 사람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고? 어차피 혼자사는 세상. . 이 또한 외로움과 배고픔과 같다. 우리는 혼자이기도하고, 혼자이지 않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지 않다. 우리가 배가 고프지만 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배고픔 이상의 배부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만큼 우리는 궁극적으로 혼자이지 않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으며, 가족이 없는 이더라도, 친구가있고, 친구가 없더라도 지인이 있고, 지인이 없더라도 인류가 있다. 이렇게 우리는 분명 속해있는 존재이고 이러한 단체성은 우리에게 속함 belonging을 제공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지 얼마 되지않아 한 생각 중, '인류와 동질감을 느낀 후 살만하다'라는 생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의 감정을 뚜렷히 전달 할 곳이 없었다. 나의 이유없는 감정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가까이 없었으며, 그렇게 영화, 글, 음악들 속으로 빠지는 것이 보다 편안했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의 가까운 지인 중에는 없었지만, 음악, 책, 영화 속에는 나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특정한 인물들이 아닐지언정, 나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다니며 배운 것은, 그러한 감각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음악의 속도, 글자들의 배열, 영화 속 색감의 사용, 그 철학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는, 이상한 일이지만 모르겠다. 그러한 매개체들을,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한데에는, 의식 중 나 자신을 고립하려는 나의 일부가 아니였나 싶다. 무튼 그렇게 나는 '인류와 나'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끼고 삶이 어느정도 괜찮다라고 느꼈던 기억이있다.
사물도, 자연도, 시간과 세상의 방식들에 마모되고 변화된다. 이처럼, 진화 처럼 나의 변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들 처럼, 나를 만진 에너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아끼는 사람들, 사회, 종교, 자연, 예술. . 이 정도로 추려질 것 같다.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는, 어느정도 나 자신을 이 것들에게 expose 노출하였고, 그들은 나를, 나의 사상들을 만지고 변화시켰다. 나의 기분이 좋은 것은 나에게 기이하고 새로운 일이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또한 기이하다. 마치 늘 그랬던 것 처럼, 늘 입던 옷처럼, 편안하다기보다, 아무런 어색함이 없어 인지하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요즘 근심이 없을 뿐 더러, 불편함이 없다. 번거로움도 마땅히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할 일들은 그저 하고 지나가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일들. 딱지를 너무 많에 떼어 면허 기록이 더러우면 어떠한가. 어느 대학을 가면 어떠한가. 어느 곳에 살면 어떠한가. 우주가 움직이고 있고, 그 안에 내가 있고, 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듯, 나도 나의 자리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에 안심일 뿐.
글을 쓰다보니 해탈한 듯한 글이 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덕인이 되지 못한다. 해탈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평시에도 상당히 조심스럽다. 사실상 사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 전부 그 자체이셨지만,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고 필요치도 않으셨다고하셨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인것 같다. 딱히 이것이 사람보다 우등하여서라기보다, 그저 사람의 자리가 아닌 것이다. 우주에 앞뒤가 어디있고, 위아래가 어디있겠는가. 내가 앉은 자리가 나의 자리이고, 그대의 자리는 그대 것이니라. 나의 것 이외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그냥 그런 것.
나의 부족함,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고, 나는 나를 수용 할 뿐. 이래서 근래 마음이 편안하니 즐거운가보다, 아멘 so b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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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학교 생활이 매우 즐겁다. 가장 큰 이유는 친구들인 것 같다. 언제인가 행복의 지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일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였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의 친구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즐겁고, 일 또한 즐겁게 할 수 있다. 이 처럼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학교에서 이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1년 이상 알고지낸 친구들, 여러 수업을 함께 들은 친구들 또한 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오며가며 마주치는 친구들도 있고, 나의 주변에 반갑게 인사 할 수 있고, 함께 공부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학교 친구들이 깊이 개입되어있는 매우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 또한 비교적 편안한 인간관계인 것 같다. 함께 공부를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즐거운 만남을 갖지만 서로에 대해 깊히 알려하지 않고, 가볍게 만날 수 있다는 점.
수업 자체는 늘상 비슷하다. 기준이 뚜렷하고 정확한 교수가 있는가 하면, 히피마냥 자유로와 도저히 어디가 기준인지 모르겠는 교수들이 있고, 자신만의 기이한 철학을 고집하는 교수들 또한 있다. 수업 내용 또한 복잡하기고 머릿 속으로 형상화 할 수 없어 난해하기도 하고 복잡하더라도 글 읽히듯 편히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보다 나의 생활 행복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나의 주변 사람들이다. 의지 할 수 있는 주변인들이 있으면 즐겁고 편안하다. 하지만 대화 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지만 나의 진심을 말 할 수 없고 편안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나의 고민은 곪을 뿐이고, 마음의 안정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와중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 Happiness Is 'Infectious' In Network Of Friends: Collective -- Not Just Individual -- Phenomenon (2008)
이십년간 5000명을 연구한 결과, 한 사람의 행복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친구들의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친구들의 친구들 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 영향은 1년 동안 살아있다고 한다. 반면에, 흥미롭게도, 슬픔은 이렇게 행복처럼 영향력이 강하지 않다. 이 처럼 한 사람의 감정은 내가 알지 못하는, 두, 세 다리 건너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복은 그저 한 순간의 기분좋음이 아닌 '행복'이라는 것. 또한 이러한 감정의 전달은 친구와의 직접적 '거리'와도 큰 관계가 있다고한다. 가까이 사는 친구 일 수록 영향이 크다는 것.
가까이 살 수록 영향이 크다는 것은 약간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Three Degree' 친구의 친구의 친구, 세번째 지인, 이라고 정도 해석이 가능하겠다. 이러한 시스템을 이해, 그리고 1년이라는 기간적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더불어, 인기도또한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한다. 지인들 관계에 '중심'역활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 할 확률이 높다. 이는 친구가 많을 확률 또한 높힌다. 하지만 행복한 것이 한 사람을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밀지는 못한다고 한다. 행복은 인간관계의 시스템, 그 구성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자료가 흥미롭다. 또한, 크게 공감 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행복했던 이유는 친구가, 즐거운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동안 나의 심리가 매우 어두운 편이였지만서도,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또한, 근래 학교에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생활이 즐거워지고 활기를 띈다. 전반적인 나의 마음의 안정도도, 긍정도 또한 이와 큰 관계가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생각 와중, 나의 행복 또한 다른이들의 감정에 얼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또한 생각하게 된다. so be it





http://www.sciencedaily.com/releases/2008/12/08120509450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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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t 사순절 사순시기

Liturgical calendar Ash Wednesday 부터 Easter 지지 46일 간의 시간. 성서에 다르면 예수님은 공적인 ministry 이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드리며 사탄의 유혹을 견뎌냈다고 기록되어있다. Ash Wednesday 이름은 신자들이 하느님에게 후회와 비탄을 표현으로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는 것에서 유래. 2011년도 의 Ash Wednesday 3 9. Easter 4 22일이다. Easter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복하는 날.


사순이라는 말은
40이라는 숫자에서 유래된 것. 4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홍수에서 나온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벌하기 위하여 40밤과 40낮 동안 비를 내리셨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판을 받기 위하여 40일을 엄재. 광야에서 40일의 단식.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 40의 상징적 의미가 중요한 것. 속죄, 보속, 참회, 자신의 쇄신 등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준비한다는 상징적인 기간이 사순시기이다.


파스카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40. 신자들은 받은 세례를 다시 생각하며 참회행위를 통하여 파스카의 신비체험을 준비. 사순절의 시작부터 부활 전야제 까지는 미사 중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 사순절의 시작하는 수요일은 세계의 단식일이며 머리에 재를 얹는다. 사순 제 1, 2, 3, 4, 5 주일 성 주간이 시작. 6주일은 주의 수난 성지주일이라 부른다. 성주간은 메시아로써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엄격히 단식하던 것을 본받아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노력해야 함. 자신을 이기는 극기의 자세를 요구. 40일 동안 단식과 금육을 통해 절약한 것을 모아 두었다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기도, 미사참여, 사랑의 나눔 등을 실천.


단식의 의미
, 형식, 신자들의 의무에 관한 규정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 참된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단식은 초대 교회시대부터 사순절 기간과 사계의 재일 중 신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하나로 행해짐. 단식 규정은 상당히 엄격. 단식으로 절약된 양식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사용되도록.

자료 출처 http://www.catholic.or.kr/ 가톨릭인터넷 Goodnews 굿 뉴스

Vatican Holy See 바티칸 2010년 사순절 http://www.vatican.va/liturgical_year/lent/2010/index_en.htm

 

 

이번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성당에서 집중하여 기도 할 제안들을 나무에 걸어놓아 하나 들고 왔다. “Pray that all Christians may be light for the world by living out their faith in service.”  마침 방학인지라 금식에도 참여한다. 매일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하나씩 찾아 적겠다. 비록 학교가 시작되면 일상으로 돌아 갈 테지만, 방학 동안 꾸준히 할 것을 다짐하고, 이 후 에도 추기경님의 어록과 기도, 묵상, 은 계속 잇겠다. 4 22일 까지니 일일일식을 해야겠다.

하루하루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며  

3/23 Wed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다.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태우고 희생하여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죽기까지 가는 것.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3/24

사랑 -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3/25

 

3/26 Sat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 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 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한다."

3/27

"인간은 영원을 향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 그릇은 영원을 향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목마름은 '영원에의 동경, 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8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퀼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동굴 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3/29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기도 "오 사랑의 주님 ! 존경받으려는 ... 사랑받으려는 ... 칭찬 받으려는 . .. 명예로와지려는 ... 찬양 받으려는 ... 선택 받으려는 ... 인정 받으려는 ... 인기 끌려는 ...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3/30 Wed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만큼 사랑할 것인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전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결코 내 마음이 내킬 때에만 사랑하겠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사랑하겠다는 식이 아닙니다. 

3/31

세상은 시간적으로 새날이 오고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진실된 인간, 정의로운 인간, 사랑하는 인간'으로 달라질 때에 비로소 새로워집니다.

4/1

형제들을 부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들에게 앞서 봉사하는 자 되게 하소서.

4/2 Sat

 

4/3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거듭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높은 분이었지만 낮아지고 부한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었는데 나는 거꾸로 낮은 자가 높이 오르고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어 주님과 '반대로 살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4/4

 

4/5

 

4/6 Wed

 

4/7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이 네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4/8

땅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모든 것 아래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을 딛고 살지만 땅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뿐더러 땅에다 모든 더러운 것, 썩은 것을 다 버립니다. 그러나 땅은 자신을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땅의 이 겸손을 배우세요. 그리하여 여러분이 겪은 모든 것, 병고, 고독, 절망까지 다 받아들이세요.  

4/9 Sat

고통은 참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되도록 고통을 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을 때, 고통을 모르는 인간, 고통이 없는 인생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더 찾고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역시 고통이 없었다면 아마도 하느님을 전혀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술에 물 탄 것처럼 싱겁고 아무런 깊이도 없을 것입니다.

4/10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4/11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꿈입니다. 이 꿈의 실현이 인간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에게 이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4/12

 

4/13 Wed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없애야 합니다. 불화의 뿌리를 뽑아야 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 믿지 않으려는 불신, 용서할 줄 모르는 미움, 나만을 위하는 소유욕과 지배욕, 질투와 경잼심을 버려야 합니다.

4/14

 

4/15

하느님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알려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는 자체이시나 아무 것도 갖지 않았습니다.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소유물도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았습니다.

4/16 Sat

겸손한 사람만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슬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4/17

주변에서도 건강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권유해 주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4/18

 

4/19

 

4/20

내 이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차를 타는 사람이든, 걸어 다니는 사람이든, 교통법규를 성실히 지키고 실수 할 때에는 지체없이 용서를 먼저 청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21

 

4/22 Easter

 

 

기도, 묵상, 참회 - 속죄, 보속, 참회, 자신의 쇄신

3/23
하나씩 천천히 짚어보자.

속죄 상대방에게 지은 죄를 씻고 상호간에 범죄 이전의 유대를 회복하는 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거슬린 인간의 죄를 구세주 그리스도가 대신 보속하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킨 일을 지칭한다. 구약성서에서 속죄는 야훼께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친교를 회복하는 일. 야훼 편에서는 자비의 행위,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는 야훼께서 지정한 특정 행위를 이행하는 일. 야훼께서 지시한 속죄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벗었던 예에서 발전. 속죄제물을 바침으로써 야훼의 분노를 풀어드린다는 속죄사상은 퇴조. ‘야훼의 고난받은 종이 인간의 죄를 대신 보속해 준다는 예언을 믿기에 이르심. 야훼께서 인류의 죄를 그에게 지우셔서 그 몸에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는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으므로 우리의 병을 고쳐 준 것.’ 신약성서에서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셧고’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다이 속죄는 하느님이 베푸신 자비이며 진실한 대사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인한 결과. 속죄개념은 속죄의 근본을 이루는 의화관념과 관련.

속죄를 그리스도의 구석사업과 관련지어 죄에 대한 보속이라고 본 관점이 있음.

보속 – satisfaction 넓은 의미로 끼친 손해의 배상 및 보환. 그리스도 신학에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벌을 받음.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죄를 충분히 보속한다고 주석한 데에서 비롯. 가톨릭 윤리신학상의 보속은 고백성사의 본질적 요건의 하나로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약.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는 성세성사로써 벌까지도 사하지만 세례 후에 범한 죄는 고백성사로 사하여진다. 그러나 죄의 벌까지도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벌만 사하여 질 뿐 잠벌은 남아있다. 잠벌이란 영원한 벌에 대하여 일시적인 벌, 혹은 연옥벌이라는 뜻이며, 우리는 자신이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보속이라는 것이 필요.

교회는 그리스도 보속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당신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시오라는  말씀대로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였음. 구약성서도 죄는 용서받았으나 벌은 남아있는 경우가 많음. 원조는 은총상태로 회복되었으나 고통과 죽음은 며치 못했고, 모세의 불신은 용서받았으나 약속한 땅에서는 제외되었다. 신약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 했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라 하였다.

참회 – repentance 참회의 일반적 의미 과거의 범죄사실을 기억, 현재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인식적 요소와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죄가 사해지기를 원하며, 죄를 혐오하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 참회는 죄악의 상태에서 벗어남을 목적.

참회는 인간이 개인적 죄의 용서를 받아 의화되는 경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었음.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행위와 교회의 대표자인 사제의 사죄 및 통회, 고백, 보속을 하는 참회자의 행위가 필요. 4자의 행위 중 죄의 용서라는 효과를 가져오는 실질적인 요건은 어느 행위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 아퀴나스에 의하면, 참회자의 행위는 성사의 재료요, 사제의 사죄는 형상, 인데, 양자는 동등하게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유효한 원인작용을 이룸. 전체과정에서 최종적 원인작용은 하느님께 속하므로, 성사적 표시를 도구적 원인작용의 행사라 함. 성사를 받으려는 뜻을 겸한 상등통회를 한 참회자는 고해성사의 예식을 받기 전에 죄의 사함을 받았음을 인정. 성사는 예식 자체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발전해 가는 상태로 보아야 하므로 참회자의 첫 행위에서 성사가 시작되어 성사 예식 자체에서 절정에 달한다는 것.

자신의 쇄신 신도 개인, 수도회, 특히 교회가 그 모형인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 교회는 신인 (神人)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인양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오류가 있을 없으나 인적 (人的) 실재라는 점에서 교회 안에 과실과 죄악이 현존 있는 . 한편 교회는 인간 성화를 (聖化) 이룩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성화되는 과정에서 있는 신자들을 포함. 따라서 거룩하지만, 순례하는 교회는 바로 죄인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죄는 거부하지만 죄인은 맞아들인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무죄하시고 죄를 모르시며 다만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교회는 품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성스러운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 하며 회개와 쇄신을 끊임 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교회가 계속 정화되고 쇄신되어야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의 무한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실천 능력의 유한성에 있다. 신자 각자의 차원에서 아니라 공동체의 제도적 차원에서도 반성과 쇄신이 계속되어야 .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유한성 때문에 어느 특정한 시대나 지역이나 인간들의 제도나 방법이,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 따라서 교회는 시대, 환경, 대상, 인물이 변함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정확하고 유효하게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방법을 쇄신, 제도를 개혁, 생활을 현실에 맞게 조정. ‘교회의 쇄신은 모두 본질적으로 교회사명에 대한 충실성에 있는 것이므로…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불리움을 받음’.

교회는 이러한 쇄신의 능력을 주님의 약속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미 갖추고 있다. 쇄신의 원리는 더욱 복음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 위하여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진술하기 전에 경건하게 들어야함. 신앙의 원천인 복음에로 돌아가야 거기서 쇄신의 방향을 찾을 있음. 원래에서 연역할 있는 방향은 전통과 진보의 조화.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내용과 표현의 일치, 대화와 협력의 자세 .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다.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태우고 희생하여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죽기까지 가는 것.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무턱코 고른 첫 어록인데, 첫 날에 극히 적합하다. 나 자신의 희생, 이상향을 향한 노력. 사랑,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쉽게여겼고, 그것은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논리도 없었던 움직임들. 나 자신을 비우고 아픔을 겪고, 그것을 꺽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바람 조차도 비워 버리리라. 옳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모든, 나 자신 조차도 비워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옳다.
딱히 오늘부터 해야지 - 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 시험이 끝났을 뿐이고, 오늘 저녁부터 해야겠다 - 라고 마음이 생겨, 시작하였을 뿐.모레인 금요일 부터는 주말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 매일 글을 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펜과 김수환 추기경님의 책을 꼭 챙겨가 practice를 소홀하지 않겠다. 예수님은 40 일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과 싸우며 수행을 하셨다. 나는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나 자신을 싸우면 되는 것이기에, 비교 할 수 없는 practice이다. 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꾸준한 의지를 기르겠다. 선을 그어놓으니 마음이 기이하게 편안하다. 즉흥적이고 매우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22세, 나의 첫 사순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또한 비록 시작 또한 늦고, 학교와는 병행이 어렵겠지만, 완전하지 못하지만 나의 첫 노력임으로 보다 열심히 해야겠다. 사순에 대한 이해 또한 부족함으로 시작하였고, 여전히 부족하다. 인상 깊은 점은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 나 자신을 비울 수 있다는 것.


3/24
사랑 -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둘째날. 이른 아침 일어나 산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 내일 심부름을 하고 점심을 먹고가라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먹을 생각을 하니 금식 이 후 처음의 식욕이 돋았다. 잠을자고 2000시 할머니의 전화에 다시 깨었다. 통화 후,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끓여져 있던 콩나물 국과 고구마를 먹었다 - 아아, 얼마나 미약한 나의 모습인가. 고민은 대략 2분에 불과하였다. 정신은 음식을 찾았고, 몸을 움직였다. 기도를 드리고 국과 고구마를 20분 가량에 걸쳐 먹었다. '먹어도 된다'라는 생각을 하니, 몸의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판의 미로에서 요정의 말을 어기고 포도를 따아 먹은 오필리아의 모습이 나와 겹치며, 분노하던 요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아, 미약한 나의 의지에 큰 실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식단은 몸에 좋지 않다며 따위의 구차한 변명을 드는 나의 모습을 보며, 국을 떠 먹으면서도 아쉬웠다. 사람이란, 아니 나란 허용되는 범위가 생기는 순간 그 범위의 틀을 제 멋대로 정하는 것 같다.

다음 주에는 크로스 컨트리 스키 약속과, 등산약속이 있다. 둘 다 날짜가 정확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굶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예상은 한 일이지만, 이유가 이유인지라, 그저 죄송 할 따름이다.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현대인을 위한 금식 방법을 다시 읽어보니 Ash Wednesday 와 Good Friday 에 금식을 하기로 되어있다.




3/26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 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한다."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 느낀 감정 - 실망과 죄책. 아아,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잘 해야한다는 생각에, 성스러운 일이기에, 보다 잘하고 싶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굉장한 무게와 실망감을 느꼈다. 저녁인 지금, 실망감은 커졌을 뿐. 나의 신앙심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도리에 맞지 않다. 자신을 보다 , 마음을 보다 의지를 보다, 굳게 심어야한다. 그것이 목적이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나 쉬워서야, 아무런 발전도 있을 수 없다.
격일 금식과, 격일 일일일식을 해야겠다. 애초 10일 가량을 굶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등산을 다닌 다는 것이 무리한 계획이였다. 다만 약속이 이렇게 빨리 잡힌 것이 계획의 변화를 일찍 불렀을 뿐. 합리화라 하여도 사실이고, 계획은 다시 세우면 되는 것이다. 아직 셋째날이지 않은가.
오전, 일어나 수녀님과 매리 제인에게 편지를 썼다. 패추릭에게 카드와 선물도 주었다. 옷장을 정리하여 옷 40 여 개를 기부하고 할머니 댁에 가 점심을 먹고 작은 고모에게 심부름을 다녀와,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집에와 떡을 먹었다. 이야말로 실망스러운 일이였다. 나에게, 주님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성체를 모신 사실 조차 잊고, 나 자신을, 주님을 더럽히다니. 생각이 짧은 것을 떠나 없었다. 의지, 의지, 의지 - 자제하는 의지가 1보다 0에 가깝다. 1mm 라도 움직여야 할 텐데, 쉽지 않음은 불가능이 아님을 다시 기억하자. 할 수 있다.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는 추기경님의 말씀. 나에게 사람이란, 커뮤니티란 즐겁기도 하지만 피하고 싶기도하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대화의 불필요함, 말의 복잡성 등이 이유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로 인해 존재하고, 서로에게 밖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미니멀의 인간관계가 아닌, 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로써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으려 - 이에는 노력이 필요하겠지. 상대의 태도를 관찰해야하고 분석해야하니, 나에게는 습관이 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롭겠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러한 프랙티스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어려운, 새로운, 편치 않은 일이기에 기억해보려 한다.

3/27
"인간은 영원을 향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 그릇은 영원을 향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목마름은 '영원에의 동경, 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Rattlesnake ledge에 다녀왔다. North Bend는 가까우면서도 환상의 풍경이다. 새로운 아름다움의 발견에 감사할 따름.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였다. 비록 짧은 기도였지만, 그러한 나의 모습에 감사함을 느낀다. 산에 다녀와 샤워를하고 고구마와 떡을 한 접시 먹었다. 금새 배가 구릉구릉하더니 배가 부르다. 이렇게 사람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기도와 작은 양의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울 것이면 족하다. 이것이 이번 프랙티스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나 그 동안 얼마나 넘치고 풍족히 살아왔는가. 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낭비와 그로 인한 상처를 남겼는가. 부족히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결여였고 자만한 나의 옳지 못한 기준이였다. 새로운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더럽고 부당한 것을 잊고, 미니멀하고 옳은 것을 보다 지향하는, 그러한 새로운 기준의 성립. 부활절 까지 이렇게 일일일식을 실천해야겠다. 물론 어려움도 있을테지만, 꾸준히 해보겠다. 할 수 있다.
수녀님에게 말씀 드린 것 처럼, 수녀님께서 일러주신 것 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걱정 주님께 맡겨두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해야겠다. 어제의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이 다시 생각난다. 고립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많은 기준들이 모여, 가장 옳은 기준을 성립하는 것이다. 많은 기준들의 분포를, 가장 옳은 곳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옳은 이들과의 소통과 나눔이 필요하고, 그로 부터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수녀님,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바른 것을 배우고, 바른 의견을 수용하며, 새로운 나를 성립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목마르다.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러하다. 만족한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늘 보다 나음을 바라고, 완벽 할 수 없음을 인지한다. 이렇게 부족한 나의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향해 만들어졌다고 추기경님이 말씀하신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을 주님으로, 성모님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길을 돌아보고, 그들의 배움을 이해하려 노력해야한다. 그렇게 부족한 나를 계속 채우고 비워야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오로지 주님의 기준으로 나를 채우리 - 할 수 있다, 아멘.

3/28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퀼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동굴 속에 세겨져 있었습니다."
어제 마침 'Schindler's List'라는 영화를 보아, 이 문구가 보다 와 닿는다. 주인공 쉰들러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그의 삶으로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할 수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을 하였다 - 목숨을 구하였다. 전쟁의 풍경은 상상 할 수 없고, 보아도 믿을 수가 없다. 시대를 살았던 이들도, 들려오는 소문들을 믿을 수 없다하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너무나 터무니가 없어 헛 소문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와중에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 Into the Wild 와 대조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은 환경에 충분히 좌우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느님을, 굳이 하느님이라는 성서의 인물이 아닌더라도, 우리 이외의 존재를,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매일 피의 향을 맡고, 구토 악취 폭력 공포에 쌓여 산다면, 악마의 기운을 믿을지도 모르고, 역으로 하느님에게 더 메달릴지도 모르겠다.
무튼 오늘 문구의 중점은, 보이지 않는 것, 느껴지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 것 같다. 믿음이라 - 단순하고도 어려운 감정이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나 자신을 믿는 일 또한 많은 시간, 노력, 용기, 훈련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믿는 일 또한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습관과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익숙치 않아, 나 자신에게 의지하기 일쑤이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짐도, 나누는 방법을 몰라 혼자 짊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느님에게도 청하는 방법 또한 어색 할 수 있고 익숙 할 수 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어색하다. 혼자가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 갈 수록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 자동차 사고 후에도,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니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 주 등산 계획 중에도 고모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의지가 어색하기도하고, 싫기도 하지만, 도움이란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상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나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지를 기억하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조금씩 보다 익혀야 겠다고 생각한다. 의지하고 싶지 않더라도, 공존하는 것을 배우는 것 같다.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만감 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느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보다 비우고, 하느님의 기준을 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맡기고, 나의 질문들과 고민들을 넘기면, 그 분은 나보다 옳은 올바른 기준으로, 정답을 주시리라.


3/29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기도 "오 사랑의 주님 ! 존경받으려는 ... 사랑받으려는 ... 칭찬 받으려는 ... 명예로와지려는 ... 찬양 받으려는 ... 선택 받으려는 ... 인정 받으려는 ... 인기 끌려는 . ..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더러운 하루, 좋지 않을 뿐 더러 괴롭습니다. 오전에 등산을 다녀오고, 오후에 많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필요 이상을 - 최소한을 지키려 했는데, 더불어 간식에 와인까지 마셨습니다. 미루어둔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몰려오듯, 그 동안 참았으니 괜찮을거라는 합리화로, 다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짐의 무너짐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은 더욱이나 어렵습니다. 약쟁이가 Overdose 로 죽은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두려웠습니다, 죽고싶지 않은데 - 나의 무너진 다짐들, 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떠한 대안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 어렵네요.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의 기준, 당신의 희생을 몸소 닮으려 노력하지만 어렵습니다. 아아 어렵지만 할 수 있다고 ,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아, 다짐합니다 - 이 못난 버릇을 버리겠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어떠한 합리화도 용납하지 않으리요 - 기도와 우정으로 노력하고 버리고 고치겠습니다 - 도와주실거라 믿습니다. 할 수 있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죽이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 모든 것이 욕심과 욕망때문이겠지요 - 옳지 않은 기준에 나를 맞추려는 더러운, 부질 없는 욕망. 옳은 것 만 따르겠습니다, 옳지 않은 기준은 버리고, 그것에 나를 맞추려는 더러운 움직임도 멈추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모든 것을 비우고, 비우고 비워, 옳은 것 만이 가득 할 수 있도록, 넘칠 수 있도록, 나를 비우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3/30
"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만큼 사랑할 것인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전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결코 내 마음이 내킬 때에만 사랑하겠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사랑하겠다는 식이 아닙니다. 
원하던 시간보다 일찍, 보험회사의 전화로 잠에서 깼다 - 아아 인내심의 시험. 따라서 오늘은 사순에 대한 기억으로 하루를 시작하려한다. 복잡한 일이 생겨도, 번거로운 일이 생겨도, 어려운 조건에서도 바른 마음가짐으로 판단커나 안정을 잃지 않도록.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 나가서 몇가지 일을 보러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작은 일들로 체워지는 생활이 이상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러한 소소한 일들이 나의 삶을 체우다니. 날씨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하늘이 허옇다 - 전형적인 시애틀 날씨. 보험일만 아니면 꽤나 기분이 좋았을 날이다. 하아, 침착히 해결하면 되리라. 어제의 피로로 얼굴이 붓고 속이 좋지 않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듯하며 눈의 붓기가 무겁다. 미래를 기억하며, 곧 잊혀질 일들임을 기억해본다. 오랜만에 만나는친구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괜찮다 괜찮다 알 이즈 웰 - 기도로 승화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아멘 - 약속을 지키는 일, 그은 선을 넘지 않는 일, 할 수 있다, 지킬 수 있다. promise 지키리 - 아멘.


3/31
"세상은 시간적으로 새날이 오고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진실된 인간, 정의로운 인간, 사랑하는 인간'으로 달라질 때에 비로소 새로워집니다."
어제 마신 커피 덕인지 잠을 한 숨도 잘 수 없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며 낙서를하고 돈 보스코의 생애를 읽고, 영화를 보았으며 여러 생각도 하였습니다. 0530시가 되자마자 카페로 달려가 커피 한 잔과 스콘을 하나 먹었습니다. 커피로 이루지 못한 잠인데 다시 커피를 마시다니 -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속이 좋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OD 로 죽은 친구를 보는 듯, 아픔이 조금씩 나타나고 잇고 - 그것의 충격은 가히 말 할 수 없습니다. 잠을 못 잤더니 보다 지치는군요. 머리가 무겁고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습니다 - 아무래도 집에가서 자야 할 것 같네요 - 머리가 너무나 피곤합니다.
당신이라는 새로운 의지를 찾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많은 것은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여유의 시간 - 차분함이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밤 새 여러가지 잡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 하지만 밤은 딱히 길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정도라 할까요 - 감사합니다. 변화 - 많은 이가 간절히 바라지만 , 실행에 있어 , 행동에 있어 변화를 주지 않고 결과적 변화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수 년을 그렇게 보냈고 , 이제는 몸이 지쳐 - 괴로움의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을 긋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 더 이상 용납 할 수 없다고 - 안된다고. 이제 당신에게 의지하겠습니다. 당신과 마리아님과 묵주에 의지하여 나의 원동력을 찾겠습니다 - 나의 시간의 에너지의 주인을 당신으로 섬기겠습니다. 기도로 승화 할 수 없는 것은 없을테지요 - 도와 주실테지요 - 괜찮을테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아멘.
좀 잤다 - 마음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자고 일어나 최소한이 아니지만 밥을 먹었습니다. 최소한을 실천한다는 것 - 예외는 있어야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습이 너무 싫고, 물론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지만 마음만큼 강하지 못한 자신을 자주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약한 마음 모습 모두 주님에게 의지하여 맡기도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도로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약속을 하나 취소하였고 조금 쉬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몇가지 생산적인 일을하였고 괜찮을 수 있음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일부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침 내내 내리던 비도 그쳤네요 - 내일은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타인을 외면 말라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을 기억해봅니다.
새로운 날이 새로운 모습은 아니라는 추기경님의 말씀 너무나 옳습니다 - 몇 날이 지나고 몇 해가 지나도 변하지 못한, 버리지 못한 습관들 - 몹쓸 버릇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당신에게 맡기고 저의 죄를 달게 받되 용서를 구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당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신께 묻고 - 당신의 기운을 따르겠습니다. 딱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많은 이들의 것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당신은 포용하고 수용하고 있을터라 믿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인지를, 인식을 넘어 , 저희의 범위와는 무관한 무한함이실테니까요. 감사합니다 , 노력하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아멘 - so be it.

4/1
사월이네요. 사순시기를 처음 접하던 방학 맞이하던 날 보다 마음이 많이 풀렸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밥도 먹고있고 간식도 먹고있고 , 굶음이 없으니 기도도 덜하네요. 몇 일 동안이지만 기복이 있고 흐름이 있네요. 달리기를 시작하기 위해 이것 저것 준비를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듯 깊음과 더불어 당신을 보다 기억하겠다는 다짐 , 꾸준함 또한 기억해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어야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 요즘 들어 세삼 느껴집니다. 그래도 포기않고 다짐에 다짐을 해 봅니다.
"형제들을 부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들에게 앞서 봉사하는 자 되게 하소서."
비움 비움 비움 -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번 사순시기에 깨닳았습니다. 우리가 , 내가 얼마나 적게 필요로하는지 ,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닳았고, 가장 최소한으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잊기 쉬운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기억하도록 도와주세요. 기도드립니다. 나를 위해가 아닌, 형제를 위해 산다는 것 - 저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타인보다 자신이 무조건인듯 앞섭니다. 보다 너그럽고 관용적이며 포용적일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 노력하겠습니다. 다짐에 다짐에 다짐 - 실천을 전달하겠습니다.


4/3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거듭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높은 분이었지만 낮아지고 부한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었는데 나는 거꾸로 낮은 자가 높이 오르고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어 주님과 '반대로 살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어제 너무나 좋지 않은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다짐이 다시 무너졌습니다. 성당에서 7시간의 세미나가 있었는데 잠을 못 잤고 많은 유혹이 있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핑계를 대봅니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제 자신임을 기억하며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미사도 드리고 성체도 모셨는데 죄스럽습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다시는 안되리라고, 다짐해봅니다. 무려 문구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네요, 역시나 죄는 죄를 부릅니다.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어 글을 먼저 씁니다. 조금은 체계가 있는 하루이기도하고, 내일부터는 학기의 시작이기에 기대가 많습니다.
어제 아프리카와 자매를 맺은 본당들의 모임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에 다녀왔고 그 곳의 본당들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물과 같은 프로젝트들도 진행되고있고 꽤나 체계가 세워지고 있는 듯 합니다. 저 또한 언젠간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졸업이 먼저 하고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리된 삶을 살고싶습니다. 와중 늘 주님을 기억하고 기준으로 살고싶다는 생각 또한합니다. 그들의 미사음악은 참으로 흥겨웠습니다. 와중 쭈뻣쭈뻣 어색해하는 미국인들의 모습과 저의 어중간한 모습이 즐거웠습니다. 하느님의 단체에 이렇게 참여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초등학교 교리활동 이후로 미사 이외의 활동을 하지 않았네요. 수녀원에서도 미사만 참석 할 뿐, 사람들이, 사람들이 모이면 생기는 말들이 싫다며 늘 피하곤했는지, 옳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느님, 인도해주세요 - 비우겠습니다.

4/7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이 네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개강을 하여, 몇 일 소홀했네요 - 아직 부활절이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순시기나마 매일 당신의 뜻을 보다 되세겨 보려하였는데, 수업이라는 핑계로 마음이 나태해졌군요, 죄송합니다. 기도라고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식사 전 기도 정도가 전부이네요. 다시 마음을 잡고 학교 생활 중에서도 당신을 기억 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합니다.
매일 김수환 추기경의 문구를 하나씩 읽으며,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닮으려는 것이 취지였는데 오늘의 문구는 경이의 감탄에 가깝네요. 그 중에서도 '어쩔 수 없는 사랑' 이라는 문구가 새롭게 와닿네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당신께 이야기하고 고백하죠 - 노력하겠노라고. 당신을 향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기억하지만 김수경 추기경님의 글은 자신의 능력과 힘이 아닌, 당신의 힘에 모든 것을 그야말로 맡기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당신에게 맡기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나를 맡겼기에, 나는 당신에게 드리고 당신의 손에 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겠지요.
아, 참으로 아름다우신 당신이고 추기경님이십니다. 나의 삶에, 세계에 여러 영향들이 계시고 기준들이 있어주셔서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 그 중 가장 옳고 아름다운 것을 따르게 하소서, 맡기겠습니다. 놓겠습니다, 아멘.

4/8
"땅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모든 것 아래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을 딛고 살지만 땅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뿐더러 땅에다 모든 더러운 것, 썩은 것을 다 버립니다. 그러나 땅은 자신을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땅의 이 겸손을 배우세요. 그리하여 여러분이 겪은 모든 것, 병고, 고독, 절망까지 다 받아들이세요."  

정말 울고싶네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째 다짐한 다짐들, 왜 여전히 지키지 못할까요. 내 자신을 놓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다는 듯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나는 자신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도 원하는데 나 자신을 당신에게, 우주의 기운에게, 만물의 손에 놓지 못할까요. .눈물도 나지 않아요. 몇 년 전까지만해도, 정말 낙엽 굴러다고 웃고 울었는데, 이제는 감정의 기복이 적어지고, 다짐의 무너짐에 대한 속상함도 줄어버렸어요. 감정의 '양'이 줄어버렸어요. 이렇게 무뎌져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은데,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보다 자신을 조절하려는 것이 보여요 - 나의 움직임, 행동 하나하나를 조절하려는 모습. 자신을 놓겠다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저를 자유로 풀어주시리라 믿을게요. 나의 자유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닌, 우주의 기운이 주는 것임을 그저 숨만 쉴게요, 그저 숨만, 숨만.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요 - 노력 따위도.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였을 때는 분명 정보전달적인 -이다 어투로 시작하여, 현재는 당신에게 빌고있는 대화형이군요. 음, 내 자신이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인지 - 모르겠다. 내일 금식을 해야겠다, 나 자신을 위해, 우주를 위해, 자유를 위해. 누가 나를 제발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도움을 요청 할 수가 없다.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움을 거부할까요? 역으로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람이거늘, 자신감을 넘은 자만감이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이 아닐까 - 이를 알면서도 궁지에서 나 자신을 가두고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 울지도 못하는 나를. .
절망까지, 이러한 처절함도 괜찮습니다 - 뭐 어쩌렵니까, 시간이 흐르는 것은 같고, 어떻게든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들로 시간을 보냅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실수이고 비겁하고 더럽지만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나의 일부이고, 나는 퍽이나 괜찮은 사람입니다. . 그럴거에요 아마. .


4/9
"고통은 참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되도록 고통을 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을 떄, 고통을 모르는 인간, 고통이 없는 인생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더 찾고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역시 고통이 없었다면 아마도 하느님을 전혀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술에 물 탄 것 처럼 싱겁고 아무런 깊이도 없을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글을 읽으며 - 정말이지 솔직하신 모습에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고통이 없었더라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 추기경이라는 주목받는 위치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종교를 규탄하려는 수많은 이목이 있고, 반종교 지향적인 과학 단체들이 바다를 이룰 정도로 많은 오늘 날, 고통없이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 매우 자극적이다. 하느님은 목발이다 - 라는 주장은, 반종교적인 주장들 중 주요 논리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들은 종교를 나약한 이들의 정신적 자위정도로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을 했었고,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부엌에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엄마는 그러한 관점도 수용해야하며, 종교에 대한, 세상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것 없이 당돌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찌되었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마련인데, 솔직하게 글로 남길 수 있는 추기경님의 모습에 겸손해진다.
고통, 고통, 피하고 싶고 싫다. 하지만 이를 수용해야한다. 하지만 보다 큰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고통을 수용해야하는 것이냐 - 인 것 같다. 어려움, 고통 따위를 수용함으로써 나의 발전을 막는 것 같기도하다. 더러워도 괜찮다는, 고통도 나의 일부라는 생각에, 나 자신의 악에서 나를 보다 절실히 구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놓으리라, 주님이 맡아 주시리라, 아멘 -

4/10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하아, 근래 아침마다 되뇌는 생각 - 비우자. 딱히 바쁘지 않은 생활, 수업의 내용도 어렵지만은 않은 듯 하여, 그 만큼 여유로운 마음을 보다 나를 필요로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좋을텐데, 특별히 중요치 않은 잡념들에게 빼앗기는 것 같아 속상타. 자신을 비우는 것, 나를 위함이 아닌 타인을 위하여, 내가 아닌 우주를 위하여, 이타적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그릇을 깨끗이 비워버리고,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수 있기를 - 아멘 so be it

4/11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꿈입니다. 이 꿈의 실현이 인간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에게 이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꿈이라. . 한 번 읽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의 꿈이라 하면, 이루워 질 수 없는, 인간의 '아버지의 닮음'에 대한 끝 없는 동경을 말하는구나 싶었을텐데, 인간은 하느님의 꿈이라니.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를 꿈꾸신다는 것일까. . (그것은 영화 nine 의 내용인데. . 인간을 꿈꾸는 god) 인간은 하느님의 꿈, 인간은 하느님의 꿈을 형상화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닐가. 하느님은 꿈이 있었고, 그것을 우리 인간을 통해 실현한다는 뜻이 아닐까. 순간 나의 삶은 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추기경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보면, 우리는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말하신다. 우리 자신의 꿈들도 세상의 것이기에 우리를 채울 수 없는 것이요, 우리를 완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꿈을 실현하는 것 뿐이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가장 집중하였던 것은 비움이였다. 나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나를 채울 수 있는 것 - 추기경님의 어떠한 문구를 읽어도 같은 맥락인 듯 하다. 나로 가득한이 아닌, 나의 비움,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과 타인을 위한, 내가 아닌 어떠한 매개체가 되는 것에 가까운 듯 하다. 이는 지난 특전미사 중 Father Kelvin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 우리는 영혼이요 육신이 아니고, 우리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몸이지, 완전한 내가 아니다. 하루하루 이어저 가는 점들 사이의 선을 보며, 사순시기도 부활절이 다가오고있다. 마지막까지, 시작의 마음, 초심을 잃지 않기를, 나를 보다 비울 수 있기를, 이러한 원함마저 비우기를, 아멘 so be it.

4/13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없애야 합니다. 불화의 뿌리를 뽑아야 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 믿지 않으려는 불신, 용서할 줄 모르는 미움, 나만을 위하는 소유욕과 지배욕, 질투와 경쟁심을 버려야 합니다."
휴, 너무 사실이다.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만이요, 믿지 못함은 불신이요, 용서치 못함은 미움이요, 나만을 위한 것은 소유욕과 지배욕이고, 질투와 경쟁심 또한 나의 나약한 모습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각자의 정도로 있으리라. 버리리라, 버리리라, 버렸느니라, 휙 휙 휙 슝슝슝
이미 모두 버렸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보자 - 휴 아멘 so be it
나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자세가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감정적인 관념들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우편물 중 교통위반에 대한 비용을 내라는 편지가 있었다.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이 보다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괜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이번 달 역시 한도를 넘은 통장내역이 나올테지만, 보다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일이 충격이라는 것은 특별히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근래 많은 일이 즐겁다. 약속도 빈번하고, 입을 옷, 잘 수 있는 집, 쉴 수 있는 침대, 먹을 수 있는 식량,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수업마다 귀여운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즐겁다.
이 즐거움의 이유는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째 마음을 계속적을 비우려는 자세로 생활한다. 둘 째 수업에 즐거운 친구들이 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나의 실수에 너그러워지고, 보다 긍정적인 마음의 안정을 준다.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특정한 방법으로 해야한다는 기준이 사라지니, 마음이 편안하고 그저 쉬운 마음으로 생활 할 수 있다. 쉽게 잊을 수 있고, 쉽게 실천한다. 그저 생활의 시간적 단위들을 지내는, 보내는 기분이랄까. 마음이 비교적 가볍다. 친구들에 관해서는 길어질 것 같으니 다른 글로 적어야겠다. 감사할 따름. 내일이 시험임으로, 오늘은 공부를 해야한다, 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amen - so be it


4/14
"하느님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알려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는 자체이시나 아무 것도 갖지 않았습니다.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소유물도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괜찮은 마음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시험 때문인지 잠을 길게 잘 수 없었다. 0600시 쯤 눈을 떠, 샤워를하고, 빵에 계란을 입혀 먹고 공부를 하니 벌써 0830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하루가 길고 딱히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오늘은 마음이 편안한 것이, 근래 얼마나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오에 유기화학 시험을 보고 온실에 화분에 물을 주고 은행에 들렸다가, 할머니 댁에 가기로 되어있다. 이렇게 주말이 불과 몇 시간 내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 문득 마주친 글에서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와, 졸업을 하고도 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일을하며 집으로 돈을 보내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읽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한 달을 꼬박 일하면 120만원을 벌 수 있는데 그것은 베트남 돈으로 1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이라고 한다. 120만원을 버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듯 해보이지만, 하루도 쉬지 않으신다니, 나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루 수업 5시간 정도 듣고도 지쳐 주말을 입에 달고 지내는데, 하루도 쉬지 않는다니. . 120만원을 버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쪼개 자신의 생활비를 사용하고 가족의 것을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 지방의 가장 저렴한 방값도 30만원 정도 하지 않는가. 기본 생활비 또한 최소한 30만원 정도 들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60만원 보내기도 빠듯 할 듯 하다. 하지만 베트남 돈으로는 꽤나 큰 돈이 되니, 그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리라.
이에 비해 나의 생활비는 터무니 없이 많이 나간다. 방값부터 시작하여, 학비, 기름값, 식비, 기본적인 것 외에도 입는 것, 차에 들어가는 돈, 취미생활로 들어가는 돈 등이 한 달 생활비가 꽤나 드는 것 같다. 줄인다고 하여도 방값을 제외하고도 60만원 정도는 족히 쓰는 듯 하다.
하느님은 가난하셨다. 그는 어떠한 것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학벌을 위해 유학을 왔고, 괜찮은 집에 살고 있으며 무려 차도있다. 취미생활을 위해 옷과 도구들을 '필요'로하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구입하고, 내가 가진 물건들에 집착하는 일도 흔하다. 나의 가장 큰 집착은 책. 솔직히 방에 있는 책들 중 읽지 않은 것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책을 보면 갖고싶다. 방에 두면 언젠가는 읽게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정말 원한다면 도서관에서 충분히 빌려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나의 지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밑줄을 치고싶고, 소유하고 싶고, 언제든지 돌아가서 읽고 싶을 때에 읽고싶다는 이유로 책들을 하나 둘 씩 사다보니 어느세 오선반을 가득 채운다.
또한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 드는 가장 큰 지출은 옷. 딱히 많이 사는 것은 아닌데 한 달에 한 두 장 정도는 사게된다. 계절에 따라 사는 옷들이거나, 운동복이 다수. 옷의 세계를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옷이 비싸 마땅한 이유는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닌, 부수에 가까우니, 특별히 저렴하지 않아도 된다. 책은 보다 들어가는 노력에 비하여 저렴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책은 보다 널리 보급되야 하는 것임으로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어떠한 시스템에 의해서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어찌되었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과 옷을 적게 사는 것이다. 지금도 최소한으로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으셨고, 모든 것 그 자체이셨다. 이 처럼 나의 관념을 바꾸면 새로운 지향을, 방향을, 생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일찍 일어났더니 역시나 눈이 따끔거린다. 어서 시험을 마무리하고 할머니 댁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먹고 한 숨 자야겠다. 휙 쿵 - 아멘 so be it.

4/16
"겸손한 사람만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슬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배움이라는 것, 겸손이 유일한 방법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자신으로 가득차, 그야말로 자만하여 나 이외의 것을 수용 할 수 없다. 나 자신을 비울 수 있는 방법은 겸손 뿐이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원망치 않고, 보다 옳은 것을 비울 수 있는 여유를 자신에게 허락해야만 무엇이든 배울 수 있고 수용 할 수 있다.
오늘은 토요일, 특전미사에 가는 날이다. 벌써 부활절이 가깝게 다가왔다. 사순시기 동안 비움에 중점을 두고 기도를 하였고, 뿌듯하지만은 않은 날들도 많았다. 반 정도는 뿌듯하지 않고, 반 정도는 뿌듯했던 것 같다. 하지만 net 포괄적으로 전체를 고려했을때, 나의 현재 마음은 시작에 비하여 보다 편안하다. 이것이 100%기도와 비움에 인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매우 큰 부분이 비움으로 부터 오는 행복임은 확실하다. 그것은 나에게 긍정과 편안 - 곧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해 주었다. 이렇게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순의 마무리를 향하는 오늘, 바른 자세로 특전미사를 드리겠다. 나는 비우려 노력했고, 그 노력마저 버리며,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아멘 so be it.

4/17
"주변에서도 건강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권유해 주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수녀님도 그렇게 말씁하셨지요, 부활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지향하면서도 기쁨을 향하는군요. . 아프고도 기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자만하지 않도록 비워주세요, 비우겠습니다, 비웠습니다. 부활이 훌쩍 다가왔네요. 당신의 못 박히심을 기억하며. . 감사합니다, 아멘 so be it

4/20
"내 이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차를 타는 사람이든, 걸어 다니는 사람이든, 교통법규를 성실히 지키고 실수 할 때에는 지체없이 용서를 먼저 청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른 나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부활에 가까워 졌네요. 글이 길어 수정이 어렵군요, 다른 포스팅으로 옮기겠습니다.



자료 출처
http://www.catholic.or.kr/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 (산호와 진주)



자료는 다시 쓴 것임으로 오타 혹은 내용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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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때로 허무함을 느낀다. 그것이 나를 눌러 생활을 불가능케 하던 날들도 있었다. 오늘 문득 약국의 앞을 지나가면서 이를 잠시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전에 느꼈던 절망감과는 많이 달랐음을 또한 느꼈다. 이러한 때에 나 자신이 변했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같은 감정에 대한 나의 반응이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은 불행에 덤덤 할 수 있는 자신이 생소키도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내적인 것들에 집중하여 외적인 것들에게 신경 쓸 여지가 없던 -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불과 몇 년 전의 나의 모습을 기억한다. 외적인 것들에 내적인 것들을 때로 무시하는 현재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느 것이 나은 것인지는 구분 할 수 없다. 다만 보다 편안한 구석에 정착하고 싶을 따름. 비교적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 중 현재의 내가 편안하다. 나 자신의 안락 - 이 외의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중요하지 않다.
잠이 올 듯 오지 않을 듯 - 영화를 한 편 보고싶지만 딱히 볼만한 것이 없다. 비 소리가 듣고싶은데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이것 저것 좋다 - 싶은 것이 없는 것을 보니 반 정도 졸린가보다. 나를 웃게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가족 친구 자연 - 사실 자연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가족 - 자연만하지 못하다. 물론 인간이 자연과 본인들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필요치 않은 보편이지만, 인간관계란 자연과 거리를 갖게 만드는 그러한 기가 있다. 사람들 또한 자연이거늘 - 그들, 우리들에게는 자연적이지 않은 어떠한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들이 없다면 나 또한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에게는 피곤함, 어려움, 번거로움, 안타까움, 속상함 - 한 마디로 '싫음'이라는 것이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자연에는 싫음이란 없다. 그것은 부드러우며 그 어려움 조차도 '좋음'의 일부이고 조화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반감에서 나오는 나의 편협적인 편린이다. 분명 자연에도 어려움이 있고 그것이 싫을 수가 있는 것이거늘 - 사람이 싫다 - 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둘러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찾을 수 없던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생겨 - 불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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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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