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조언으로 한 밤 중에 거울을 보며 웃고 사진도 찍었다. 제법 괜찮은 조언이다, 고마운 친구. 힘들어서 .. 어지간이 아니라 결코 절대 하고싶지 않은 이야기였는데 해버렸다. 잘 했다, 참 잘 했다. 나눔은 상당히 너무 굉장히 많이 무겁게 어려운 것이지, 해서는 안되는 금기 할 수 없는 불가능은 아니었다. 세상은 어제 오늘 다른 것이 없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단계의 끝이고 다음 단계의 시작이기에, 천천히 하지만 결국은 새로움에 닿게 될 것이다. 기대 긴장 안도 무섭 ..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감사 감사,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이들이 숫자로도 많고 그 개인들이 나에게 주는 역량은 숫자라는 개념으로 담을 수 없이 아름답다. 
낮과 밤의 반복처럼 기쁘고 슬프고, 괜찮고 괜찮지 않고, 외롭고 외롭지 않고 .. 돌고돌고 반복반복, 궁극적으로는 기쁘고 괜찮고 외롭지 않다, 믿는다, 응 끄덕끄덕. 친구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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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나간 하루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는 그 자체로써 이롭다. 이따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굳이 필요하다. 어제가 그립고 오년 전, 십년 전이 그립다. 지나간 하루는, 그야말로 '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좋다 아름답다. 지난 날을 미화하는 것은 긍정적인 습관이거나 합리화.
예쁘고 개성있는 사람들이 가득 앉은 카페에,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나의 하루는 결코 춥거나 배고프지 않고, 피곤 할 수 있지만 괴롭지않으며, 적당한 양의 할 일이 주어지고,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과 교류가 이루어진다. 재미있는 일은 가까이 있고 위험은 나에게서 멀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하루하루들로 채워진 나의 생활은 그야말로 좋은 팔자이다. 
몇 시간 전까지 내야했던 에세이는 마무리 되지 않았고, 자신에 대해 장점이다 할 것을 찾지 못하며, 게으름을 휴식이라 합리화한다. 졸업은 일년이 넘게 남았고 학부 교과과정이 나를 차지하고, 사랑을 탐험 할 시간은 없다. 거리의 예쁜 사람들을 동경하며 맛있는 요리를 만들지 못하고 마지막 운동은 한 달이 지났다. 이 알록달록 재미있는 카페에, 나는 에세이를 쓰러 왔다. 망할 나의 젊은 날의 에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매일. 잔은 늘 반이다. 반 뿐인지, 반씩이나 인지는 관점차이라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감히 모든 것을 불구하고 확신함은 외로움은 마르지 않는다, 결코. 외로움은 젊음의 친구가 아닌 존재의 친구인 것이다, 녀석도 외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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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수요일 0717시 세시간 잠 후 맞는 새벽의 커피숍
스타벅스는 싫지만 커피 볶는 향은 좋구나. 왜인지 모르겠다 - 공삼시에 잠들었는데 공육시 직전 쯔음 깨어 느리지만 빠른 밝아짐을 창으로 바라보고, 다시 잠 들 수 없음을 알기에 샤워를하고 옷을입고 카페에 앉아있는 아침. 눈은 따끔히 피곤하지만 딱히 나쁘지만은 기분. 몸은 피곤치만 누군가의 기도로 움직여진다는 기이하고도 괜찮은 느낌의 하루가 시작된다.
집도 동네도 새로운 곳, 전화기도 새로운 것,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기. 새롭다하여 사용되지 않은, 느낌은 아니라는 것 - 오히려 오래되고 닳은 느낌의 환경에 천천히 적응이되어간다. 집이라기보다 숙소같은 스튜디오와 학교라기보다 시장같은 캠퍼스. 새롭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 - 새로움이라는 표현도, 낯설다는 표현도 아닌 .... '다르다'외로는 딱히 표현 할 수 없구나. 하지만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것읕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 - 모르는 오지의 곳도 아니고 멀지 않은, 익숙하고 감사한 이들과 가깝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에 편안하다.
모든 일에 그렇지만 이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을 찾는 과정은 나의 몫이였지만, 짐을 옮기고, 나의 공간을 만드는데에 많은 선물들을 주셨다. 식기, 세제, 음식, 사무용품 어느 하나 빠지는 분야 없이 기여가 있었다. 하물며 오리털 자켓까지, 하 !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사람들 인연들. 예상치 않았던터라 보다 놀랍고 겹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동안 너무 무심했는지도 - 무심했던 것이 맞다. 많은 감사함에 무뎠던 것이다.
감사하고 겸손해야지, 감사하고 겸손해야지 - 감사하고 겸손해야지. 좋은 아침이다.



9/5 아르바이트 첫 날 너무 일찍 일어난 아침
역시나 알람따위 필요 없다는 듯 - 알람보다 먼저 깬 아침. 오늘은 긴장이 컸는지 무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하. 준비를하고 카페에 앉아 인터넷 사용 중, 한 시간이나 남았다. 거울과는 거리가 먼 내가 남에게 나를 선보여야한다니 부담이 되었는지 어젯 밤에는 자신감이 바닥을 기더라. 중학생이나 할 법한 외모에 대한 자신감과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 - 그래도 감사히 세상은 나에게 친구를 주었다. 이야기하고 웃어 넘길 수 있는 친구들 덕에 감사하고 다행이다. 처음이 어렵지 잘 할거면서 라며 ... 하 - 무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건강히 잘 지내냐는, 창준이는 어찌 지내며 엄마와 아빠는 어찌 지낸다는, 주말에는 무엇을 했으며 누구를 만났다는 이야기들. 일상의 이야기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슬프지 않게 하더라.
미국에 온 지 정확히 이주가 지냈다 - 돈을 정말 많이 썼다 ... 특별히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매 번 놀라운 것은 왜일까. 매 번 반성하지만 하하 지켜지지는 않는다.
생활의 동력을 찾아서 탄력으로 뒹굴뒹굴 실컷 굴렀으면 ! 좋겠다. 윤영 화이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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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이러브유
감독 리차드 라그라브네스 (2007 / 미국)
출연 힐러리 스웽크,제라드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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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가...... “If we’re all alone, we’re in that together too. Sometimes that helps me.”

영화를 봤어. 영화에서 .. 영화의 시작은 둘이 싸워 , 불안한 마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에 화를 내고 떠나고 싶으면 가라고 소리를 지르지. 그러면 그는 떠나고 , 불과 뒤에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 그는 장면 지나지 않아 죽어. 그렇게 둘은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않았어. 그는 떠났지만 계속해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사랑한다는 추신과 함께 그녀가 아픔을 겪는 과정을 돕고 , 위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계하여 전달하지. 보는데 자꾸 너에게 편지를 쓰던 기억이 나고 무언가 글을 쓰고 싶어져. ….. 솔직히 나도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 시간도 어느 정도 흘렀는데 , 그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듯 , 시간과 무관히 그냥 .. 생각이 많이 . 분명 내가 선택한 일이였어. 과정이 너무 이기적이여서 미안하고 선택이 극단적이여서 후회해. 어쩔 없는 일이기에 , 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특별히 하고 싶은 마음에도 두려움이 앞서. 그래서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변화 없이, 정체된 공간에 지내는 것이 편해. 사람을 만나고 시간의 움직임을 느끼고 , 변화들에 동조되면 또한 움직일까봐, 그것이 두려운건지 , 왜인지 피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냥 네가 편해서,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 너를 놓았을 너는 너무나 덤덤했어. 그래서 속상했어. 내가 놓았는데 또한 나를 놓을 줄은 몰랐어. 그때 어느 때보다 너에게 미안했어. 얼마나 내가 고집을 부리고, 나의 선택만이 옳은 것이라 여겼으면, 나를 설득 시도 조차, 번도 하지 않았을까..싶은 마음에 , 얼마나 두고두고 지금까지 미안한지 부질없는 변명인데 이런 이야기가 너에게 하고싶은지, 죄책감 책임감 괜한 이해따위를 받고 싶은 심리 같은 인가봐.  

나는 이상했어 , 원하는 것도 정확히 없으면서도 주장은 강했고, 감정에 치우쳤고 나의 몸보다 마음 편한 위주로 움직였지. 그런 하나하나 굳이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대부분 이해해주었던 모습들이 기억나. 나의 기억의 조작인건지나의 기억은 그래. 왜인지 자신을 가두는 기분이 들어. 이번 여름이 유난히 그렇네, 나가는 것도 누구를 만나는 일도 괜스럽고, 기억 너에게 들리지도 않는 앞뒤도 없는 이야기들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데 , 나의 어느 정도는 나아가도, 어느 정도는   기억과 이전의 시간들 속에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야.

요즘 자신이 얼마나 자만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왕왕해. 내가 얼마나 듣지 않았는지, 인정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는지 내가 이해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나를 설명하고 , 내가 이해받으려는데에 너무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였었지. 그러한 점에도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모습들, 이제야 고맙네. 그래서 미안해.


블루 발렌타인
감독 데렉 시안 (2010 / 미국)
출연 라이언 고슬링,미셸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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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 근래 영화를 보면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 - 엄마에게도 얘기했지만 끝난 것은 없는 듯 .. "you said for better or worse, you said that you said it. it was a promise. this is my worst, this is my worst but i will get better. i will bet better you gotta give me a chance." 약속된 것들 ,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것들 promises made or those not made - may not be the best of options in retrospect, but choices are choices and cannot be changed. only direction is forward no back.
i'm watching this movie, this movie called blue valentine. it's so simple so simple ... nothing extra and everything ordinary - and it seems so beautiful, so beautiful romantic. he writes her a song - a song for two of them and it's so beautiful - the fact that he writes themselves a song a song. the song is simple and seventies, its original and precious. he snaps to its beats because he knows it well so well - and the moment is such a pretty.
so many precious pretties in the past , but make it sure to have many more in the future - the pretty beauties.

파인만(특별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과학자
지은이 리처드 파인만 (사이언스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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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파인만! 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잠시 읽는데 - 그 중 '남이야 뭐라하건!'이라는 챕터가 있더라. 본 책은 과학자 파인만의 과학적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지만 이 챕터만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지. 훑어 읽으며 사랑이라는 주제아래 다시 생각나는 이름에 - 이 반복되는 패턴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 어쩌면 이것이 사랑 그 자체이라기보다 , 사랑이라는 주제를 공감하기 위한 나의 해석적 경로가 아닌지. 엄마에 관한 영화를 보면 나에게 하나뿐인 엄마가 생각나는 것 처럼 , 특정 대상을 나와 직결된 누군가와 연관 시키는 버릇 따위이지. 이 처럼 나의 기억 속에 사랑이라는 , 혹은 그에 가장 가까운 누군가라면 그 모습이 생각나는 것이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보았어. 특별히 ..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와는 다른 - 평범하지만 다른, 고유의 어떠한 교감이 있었어. 그것이 사랑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시 ,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했고 믿었지.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고 - 너라는 존재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몰라. 영원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지 - 어찌 되었건 모두 괜찮아. 정의 따위는 굳이 필요한 ㄱ서이 아니고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아무튼 오늘 나는 그러한 생각을 했다, 너에 대한 그러한 생각.

키친
감독 홍지영 (2009 / 한국)
출연 신민아,주지훈,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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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왜 이렇게 뭐만 보면 니 생각이 나고 할 말이 많은지... 이제는 둘레둘레 돌려서 이야기 하기도 피곤타. 그냥 자꾸 생각나서 , 할 말들이 생각나서 쓸 수 밖에 없는 주저리주저리 글 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이 가장 좋은 모습일지도 몰라.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도 여러번 생각했는데 , 한 숨이 나오네.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모르겠어서. 나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는데 네가 없었어... 네 탓 할 수 있는 일 아니란거 알아 , 그래도 네 탓 하고 싶구 나도모르게 하게되. 왜인지 네 책임 같구, 때 장소 상황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기댈 수 있는 곳 같은데 아니더라. 그래서 슬펐구 아쉬웠구 , 무엇보다 미안했구, 힘들었어. 기댈 수 있었더라도 힘들었겠지, 그래도 네 탓이라고 말하는건, .. 괜한 투정이겠지. 남자들은 여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들 하잖아 , 사실은 본인 마음도 알 수 없는 것인데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알다가도 모르겠고, 객관성 따위는 잊은지 오래고, 뻔한데도 의문하게 되고, 확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 .. 네가 없어서, 힘들었다고 괜히 징징대고 싶은... 잠도 오지 않는 새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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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오빠라 부르는 어머니...묶어놓았습니다
소녀가 된 어머니 보살피기... 외할머니, 저 잘하고 있는 걸까요
김수복 
11.04.19 
 

외할머니. 기다리던 휠체어가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살면서 휠체어를 만져본 적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이틀에 걸쳐 그 조작법을 읽혀야 했습니다. 목욕을 하는 중에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인 어머니이고 보니 저로서는 제가 아직 모르는 사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오전 날씨가 너무 좋아서 휠체어를 마당에 펴놓은 다음 어머니를 품에 안고 나왔습니다.

 저는 내심 "아따 꽃이 피었네, 좋다" 소리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봄이 오고 꽃도 피면 휠체어를 반드시 장만해야 겠다고 생각한 원래의 목적이 사실은 그런 탄성을 듣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니는 한 말씀도 없이 그냥 잠들어 버리시는군요. 아니 사실은 제가 품에 안는 순간에만 잠시 깨었을 뿐 어머니는 내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어머니는 일주일 중에 5일은 거의 하루 내내 주무시기만 합니다. 오줌을 누자고 이동식 변기에 앉히면 어머니는 거기서도 잠들어버립니다. 제가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졸다가 그대로 굴러떨어지곤 합니다. 목욕통 안에서도 졸다가 물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에 이부자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항상 곁에서 지켜봐야 하고, 잠시라도 자리를 떠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보자기 두 개를 어머니의 겨드랑이 사이로 끼워넣어서 의자라든가 변기라든가 그때그때 적당한 기둥에 묶어놓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 자신이 무슨 고문기술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암담해져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 묶어놓는 것 이상의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중에 이틀 정도는 또 거의 잠을 안 자고 놀자고만 하십니다. 제가 잠이 쏟아져서 이제 그만 자자고 하면 눈을 '오꿈하게' 치켜뜨면서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놀다가 자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강제로 품에 안아서 이부자리로 옮길라치면 새처럼 가녀리게 우는 목소리로 "으째 그러셔요, 으째 그러셔요" 하시는데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쏟아져서 어쩔 줄 몰라하게 됩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5천 배는 더 즐거워진다"

 외할머니. 오래 전부터 삶이 아득할 때면 들려오는 외할머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알면 삶이 5천 배는 더 즐거워진다는 말씀이지요. 언제 어디서 왜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누군가에게 하시는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입니다.

 외할머니의 그 말씀을 들을 때는 아마 건성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테마를 만지작거리기에는 그때의 제 나이가 많이 어렸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이후 제 안에서 무엇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외할머니의 그 말씀은 제 삶의 기둥이 되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면 으레 외할머니의 그 말씀이 머릿속을 흔들어대며 눈빛을 빛내곤 했으니까요.

 사람이 죽음을 안다는 게 무엇일까요. 조금씩 철이 들어가면서 저는 늘 목이 말랐습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런데 외할머니는 제가 철이 들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셨습니다. 가끔은 외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지?'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온통 공부 잘해야 한다, 돈 많이 벌어야 한다, 출세를 해라 등 추상적인 충고와 조언만 할 뿐이었습니다. 외할머니처럼 그렇게 죽음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을 가슴에 비수처럼 푹 꽂아주며 "여기에 삶의 비밀이 있다" 하고 말해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외할머니에 버금가는 사람을 찾겠다고 산으로 들로 미친 듯이 쏘다니기도 했었지요. 그 즈음의 어느 날 산속에서 '도사'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을 보니 공부할 때가 되었다고, 그러니 자기를 따라와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따라가기에 앞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도사' 말하기를 사람 마음을 읽는 게 중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사람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나중에 '철학관' 간판을 걸었을 때 금방 족집게로 소문나고 돈방석에도 앉고 그런다는 거였습니다.

 살아가기 팍팍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앞날의 방향을 점쳐주는 게 아니라, 찾아온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급한 게 무엇인지를 금방 감지해서 그것으로 족집게 소리를 듣는 그런 공부를 하라고 권했던 그 '도사'는 결국 자기가 '제자'로 삼고자 하는 애송이의 마음 하나도 읽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접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우리 오빠, 닭이라도 사다 드려야 쓰겄는디"

 외할머니.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가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 이즈막에 이르러서야 죽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혀줘서 고맙다고 하실 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연거푸 고맙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실 때 저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싶어집니다. 단순하게 그냥 껴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부러지도록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로 마구 몸부림을 쳐보고 싶어집니다.

 몇 번인가 실제로 그렇게 해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큰 위안은 없이 매번 눈물만 나오려 하더군요. 그런데다 어머니는 또 "아이고, 이러지 마시오.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애원을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민망하고 머쓱해져서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혼자 맹세를 하며 어머니를 이부자리 위에 가만히 눕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죽어서도 안 잊어 먹을라요, 이 고마움을…."

 죽어서도 안 잊겠다는 어머니의 이 말씀이 저를 숙연하게 합니다. 지난 3년여 동안 아마 3천 번은 들었던 것 같은데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한참 동안 멍해지곤 합니다. 도대체 죽어서도 안 잊겠다는 발언은 어떤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지난 시기 그 어느 때보다 확신과 자신감에 차 계십니다. 아들은 의심할 필요 없는 오빠이고, 까마득한 과거에 돌아가신 당신의 친정어머니는 지금 어딘가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은 아직 옷도 입을 줄 몰라서 아랫도리를 벗고 다니는 아주 작은 소녀입니다. '오빠'가 '소녀'를 안아다가 자리에 눕히거나 목욕을 끝낸 뒤에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그녀는 또 이런 말로 저를 웃겨주십니다.

 "아이고 우리 오빠, 닭이라도 한 마리 사다 드려야 쓰겄는디."

 사 주고 싶으신 게 항상 닭인 것은 아닙니다. 수박도 사 주고 싶고 오징어도 사 주고 싶고, 풍천장어도 사 주고 싶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사 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도 유독 닭을 더 많이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아무튼 어머니가 그렇게 무엇을 사 주고 싶다 하실 때마다 저는 슬쩍슬쩍 장난기가 발동해서 파고들어가 봅니다. 무슨 돈이 있어서 닭을 사 온다는 것이냐고, 돈도 없으면서 거짓말이나 한다고 책망하는 투로 어머니를 놀려보는 것입니다. 그런 때 어머니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음마, 오빠도 참. 아, 우리 어머니한테 달라고 해야지요."

 그런 말씀을 하실 때의 어머니는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갸름하게 뜨고 고개를 살짝 틀어서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정색을 하는, 너무도 진지하고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그 표정에 저는 그만 헷갈려서 한참씩 눈을 깜빡이게 됩니다. '가만 있어, 외할머니가 지금 살아 계시는 건가?'하고 말입니다. 하긴 이런 어리둥절함이 제게는 그리 낯선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 어머니에게서 받는 용돈이어야 합니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의 외할머니는 살아 계실 당시의 외할머니보다 훨씬 자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외손자인 저를 맞아주곤 하셨지요. 제가 밤늦게까지 친구 집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집 앞의 측백나무 밑에 앉아 계시다가 사르르 일어나시며 "아이고 너무 늦었다, 어서 들어가자"하시는 거였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왜 이렇게 살아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가, 의아하고 무서워서 처음에는 도망치기도 했지만, 차츰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일부러 늦게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요즘은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품에 안고 '정지간'으로 나가서 목욕을 시키던 날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떠올라오곤 합니다. 때가 되면 가야 할 곳을 알고 살던 데를 떠난다고 하는 늙은 코끼리처럼 외할머니는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우리 곁으로 오셨었지요. 마치 "나 여기서 죽을란다, 괜찮지?" 하는 듯이 말입니다.

 5남 1녀 육 남매,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씻기고 먹이면서 부엌일에 들일까지 하시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친정어머니라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는 아마 생각이 제법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으로 살다가 다시 아이가 되는구나' 하는 인식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뭉클하고 거룩했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와는 다른 생을 예비하는 과정쯤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흘린 눈물은 끈적이지 않고 담담했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의 꽃상여가 마당을 빠져나가던 날 별로 울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별로 울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짠하다고 눈물을 많이 흘려주셨지요. 아들 집이 아닌 딸네 집에 와서 돌아가셨다고 말입니다.

 외할머니. 혼자서는 일어나서 앉지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 이후로 어머니는 돈 쓸 일이 부쩍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자식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한 사람,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받는 용돈이어야만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외할머니께서 지금까지 그래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아니 좀 더 자주 어머니의 꿈속을 방문해서 위로도 해주시고 용돈도 쥐어주고 그래주십시오. 어머니가 그 돈으로 오빠라는 이름의 아들에게 닭도 사 주고 수박도 사 주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사 주실 수 있도록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꿈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 행복해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름 즐거워하는 외손자가 혹시 기도만으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귀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 한 편의 작은 글로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출처 : 나를 오빠라 부르는 어머니...묶어놓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할머니, 엄마, 나, 삼대. . 할머니는 엄마를 나았고, 엄마는 나를 나았고, 나도 언젠가 생명의 엄마가 될 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존재. . 엄마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코 끝이 따뜻한 것이, 엄마 사랑해, 그냥 항상 미안해. . 근래 대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얼마 전 아빠 또한 나에게 이러한 철학은 옳지 않다며 전화너머 긴 위로의 말을 해주셨다. 분명 나는 자살의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지만서도, 아빠는 준비한 듯, 아니 마음의 쌓여있던 걱정을 봇물 터지듯 풀어놓으셨다. 듣기 싫었지만 얼마나. . 아빠의 진심이 느껴져 얼마나 속이 따뜻해지던지. . 이렇게 나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부모님께서 길러주셨다.
세 해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누워계셨던 할머니, 따라서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었던 일이였으리라. 미국으로 오기 전의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던 여름, 당시 할머니는 누워계셨다. 병원에서 투석을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모두 보았다. 나는 투석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과정을 조용히 누워 받으시는 할머니를, 곁에서 보았다. 그 해 여름, 병원에서도, 방에서도, 할머니는 늘 누워계셨고, 나는 그 곁에 눕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들이 할머니와 함께했지만, 할머니 곁에 누웠던 사람은 나 뿐이였던 것 같다. 엄마도 앉아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고, 다른 손주들도, 나만큼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 나와 창준이 가까이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셨다. 다른 손주들과 우리 남매가 할머니 마음에 어떻게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남매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오랜시간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창준이는 사춘기 남학생이기도하고, 애교라곤 없는 무덤한 성격이여서 안기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할머니 곁에 누워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이하게도 아무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할머니의 사촌분들에 관한, 가족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사실 나와는 먼 어른들 처럼 느껴져 누가누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별히 건강하라, 잘 지내라, 와 같은 조언따위의 말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 . 과일을 먹으며 우리는 그냥 그렇게 누워서 놀았다. 그 여름, 나는 4주 동안 제주도에서 일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할머니의 곁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뭐해요? 로 시작해, 우리는 역시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온다느니, 청주는 뜨겁다느니. . 아이들이 나를 좋아한다, 할머니는 누워있지. . 점심은 아직 안 먹었다, 오늘은 엄마가 왔다갔다. . 등등.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해는 내가 미국으로 처음왔던 해이다. 내가 속상할까 걱정되었던 엄마는, 사실을 몇 주 후에 알려주셨다. 처음 소식을 접한 날, 겨울의 어느 날이였다. . 당시 엄마가 어떠한 문장으로 소식을 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이였지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예상된 일이였으니. . 특별히 슬프지도 않았다, 가슴이 아프다거나하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나와 이 공간에 함께 계시다는 느낌을 짙게 받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어느 일요일,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의자에 두 다리를 안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할머니의 기억이 나면서, 눈물과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두어시간을 나는 의자에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생각날 이유도 없었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는데, 그렇게 나는 속을 개우듯 울었다.
엄마, 엄마는 어땠을까. . 지난 해 여름 엄마를 만나, 엄마는 그 해 너무나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셨다. 딸을 미국에 보내고, 엄마마저 곁을 떠났으니. . 속이 속이 아니였으리라. . 엄마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함께 장을 보는 것,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것,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며 먹어주는 것, 미사를 드리는 것, 엄마와 공원을 걷는 것, 함께 쇼핑을 하는 것, 나의 여름은 대부분 이러한 일들로 가득하다. 특별한 일이 없을 시에는 엄마와 장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거리를 걷는 시간들이 많다. 와중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한 나와의 모든 시간이 사라지고, 엄마마저 돌아가셨으니. . 나로써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증조할머니, 엄마의 할머니는 90이 넘어서 돌아가셨다.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으며 매우 마르고 작으신 분이였다. 담배를 태우셨고, 이빨이 많이 없으셨으며, 항상 머리를 쪽지로 묶으셨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셨으며, 걷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셨다. 앉아계실 적에는 늘 한 무릎을 땅에두고 한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쉬게하셨다. 피부는 그을리신 듯 구릿빛이셨고, 얄팍하고 늘어진 주름들이 많으셨다. 눈은 작고 쳐지셨으며, 머리는 길고 가늘고 하야셨다. 담배를 좋아하셨고 공원을 좋아하셨다. 가끔 웃으셨으며, 말을 매우 씩씩하게 하셨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셨다는 것이, 당시 어린 나로써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단하신 분이다. 언젠가 엄마가 증조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있다. 할머니가 늙으시어 몸에 기운 한 줌 없이 누워 계시던 중, 화장실에 가야한다며 몇 번을 가셔도 일을 보지 못하시더란다. 괴로우셨는지 부축을 받아가시며 화장실을 계속 드나드셨지만, 변을 밀어낼만큼의 힘이 없는 할머니는 일을 보실 수 없었다. 힘 없는 할머니는 괴로움을 안고 누워계실 수 밖에 없었더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엄마는 장갑을 끼고 할머니의 항문에서 변을 꺼내셨단다. 그 작은 몸에서 얼마나 많은 변이 나오던지, 엄마는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 동안 할머니는 얼마나 답답하고 지치셨을까. 엄마의 손길이, 얼마나 큰 체증을 내려주셨을까. 계산 할 수 없고, 결코 비교 할 수 없는 감정, 느낌들이였을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본, 첫 사람의 죽음이였다. 엄마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매우 편안히 이야기해주셨다, 엄마는 늘 죽음에 대해서 편안히 이야기하신다. 할머니는 누워계셨고, 조용히, 아픔이 없으신 듯 편안히 돌아가셨다고,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가장 평안한 방법으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 하셨다.
죽은사람의 길을 알지는 못하지만, 죽음을 맞이한 산 사람의 길은, 체험하였고, 보았다. 증조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 이외에도 할아버지들의 죽음들이 있었다. 죽음에 대해 특별히 두려움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한다. 기사 중 절망 앞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알면 삶이 5천배는 즐거워진다'라는 말이 기둥이되었다는 대목이있다. 아, 이 얼마나 멋진 기둥인가. 살면서 절망이란 많다, 죽으면 끝일거야라는 생각도들고, 끝이면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나를 죽이지 못 한 괴로움들을 뒤 돌아보며, 어떻게 내가 죽지 않았나라는 경이로움과 더불어, 사람이 죽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든가? 죽어라, 힘들다고 징징대려는 순간, 그럼하지마라는 생각은, 투덜거림을 조용히한다. 죽을, 하지 않을 마음도 없으면서, 모순적인 투덜거림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일을 어서 마치고, 뿌듯함을 만끽하는데에 시간을 사용하면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의식의 가까운 곳에 죽음을 두는 것은 분명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살아계신 할머니에게, 잘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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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따끈따끈한 햇빛을 스미며 누워있었더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근래 계속 하는 이야기지만 기분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 교통법 딱지, 자동차 사고, 기름값 (차를 갖다 버려야. .), 적자통장, 게으른 나의 모습, 기다려야하는 대학통지, 정리해야 하는 책들, 뭔 소리 하는지 알 수 없는 생물교수. . 이 정도가 근래 생활의 번거로움 인 듯 하다. 왠지 쓰고보니 순위도 딱 저 정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차를 버려야한다는 결과가나오는구나. . 아무튼, 딱지를 받은 날에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 알고있었고, 기분이 더러웠지만, 무언가 감정의 집착이 사라져버린 요즘. . 이 또한 6개월 후면 쉽게 잊을, 아무런 쓸모없는 에너지, 감정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사실 생활의 번거로움을 찾아보자니 저러한 리스트가 작성되지만, 저들에 대해 나의 에너지의 5%도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근래 나의 기분이 좋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된다. 나의 기분은 왜 좋은가? 얼마전 주위 친구들, 사람관계를 돌아보며, 그것에 블로그를 쓰기도 하였다. (http://watericious.tistory.com/101) 확실히 주위 지인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더불어 사순시기 동안 시간을 들여 읽고있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들에 대한 공감 또한 마음을 비우는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 나의 21년 삶을 돌아보면, 나의 전반적 분위기는 중립, 혹은 어둡에 가깝다. 중립보다 어둠에 가깝다고 해도 되리라. 복잡한 지능싸움따위의 영화를 즐겼고, 나 자신을 더럽게 여겼으며, 가볍기보다는 무거운 주제들의 글을 읽고 썼고, 쉬운 일들은 하소롭게 대하였다. 나의 즐거움은 나에게 매우 생소하다. 나의 변화는 분명하다. 무언가 편안한 일이 하고싶어졌고, 나의 생활에 대해 수긍하고있다. 세상의 불합리를 합리로써 이해한지는 오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최근에 일이고,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작아지기도 하였다. 안락은 나약함이라 믿었던 기준또한 변하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마음의 무게가 변함에 따라 매우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분명히 어느정도 변하였다. 궁금한 것은 왜, 나는 왜 변하였을까?
사람. . 사람이란, 사람이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하느냐가 보다 관심두어야 할 이야기이지 않을까. 개인마다 필요한 것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활의 근본에,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오늘 '선택'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내용이언정 30의 싱글이, 말이 통하지만 공부를하고있는 경쟁력이 없는 남자와, 가정과 사회생활이 안정되어있지만 특별히 재미가 없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글이였다. 글의 댓글 중에는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경쟁력 무시 못 해', '둘 다 아니야', '나이에 압박받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등등 다양하지만 흔한 답변들이 있었다. 보기에, 이것은 매우 흔한 질문이며, 매우 흔한 답변들이다. 이러한 질문은 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600년 후에도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 또한, 시대를 반영하겠지만 멀리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생물의 육체적인 공통분모도 있지만,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바닥은 외로움과 사랑일 것이다. 모두들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사실, 외로움. .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사랑 뿐. .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 순간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감정도, 시간이 지난 후 착각이라 느끼고, 사랑이 아니라 느꼈던 믿음도, 돌아서서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외로움, 누구나 알고있고, 필요하고, 정확히 정의 할 수 없는,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 애매하고도 근본적인 감정들.
외로움에 대하여 - 우리는 외로운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는 사람인가? 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울 수 있는 것이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때로 배가 고프기도하고, 고프지 않기도 한 것과 같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같은 논리로, 인간은 누구나 외롭지 않다. 얼마 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처럼, 혼자인 사람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고? 어차피 혼자사는 세상. . 이 또한 외로움과 배고픔과 같다. 우리는 혼자이기도하고, 혼자이지 않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지 않다. 우리가 배가 고프지만 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배고픔 이상의 배부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만큼 우리는 궁극적으로 혼자이지 않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으며, 가족이 없는 이더라도, 친구가있고, 친구가 없더라도 지인이 있고, 지인이 없더라도 인류가 있다. 이렇게 우리는 분명 속해있는 존재이고 이러한 단체성은 우리에게 속함 belonging을 제공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지 얼마 되지않아 한 생각 중, '인류와 동질감을 느낀 후 살만하다'라는 생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의 감정을 뚜렷히 전달 할 곳이 없었다. 나의 이유없는 감정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가까이 없었으며, 그렇게 영화, 글, 음악들 속으로 빠지는 것이 보다 편안했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의 가까운 지인 중에는 없었지만, 음악, 책, 영화 속에는 나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특정한 인물들이 아닐지언정, 나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다니며 배운 것은, 그러한 감각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음악의 속도, 글자들의 배열, 영화 속 색감의 사용, 그 철학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는, 이상한 일이지만 모르겠다. 그러한 매개체들을,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한데에는, 의식 중 나 자신을 고립하려는 나의 일부가 아니였나 싶다. 무튼 그렇게 나는 '인류와 나'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끼고 삶이 어느정도 괜찮다라고 느꼈던 기억이있다.
사물도, 자연도, 시간과 세상의 방식들에 마모되고 변화된다. 이처럼, 진화 처럼 나의 변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들 처럼, 나를 만진 에너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아끼는 사람들, 사회, 종교, 자연, 예술. . 이 정도로 추려질 것 같다.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는, 어느정도 나 자신을 이 것들에게 expose 노출하였고, 그들은 나를, 나의 사상들을 만지고 변화시켰다. 나의 기분이 좋은 것은 나에게 기이하고 새로운 일이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또한 기이하다. 마치 늘 그랬던 것 처럼, 늘 입던 옷처럼, 편안하다기보다, 아무런 어색함이 없어 인지하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요즘 근심이 없을 뿐 더러, 불편함이 없다. 번거로움도 마땅히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할 일들은 그저 하고 지나가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일들. 딱지를 너무 많에 떼어 면허 기록이 더러우면 어떠한가. 어느 대학을 가면 어떠한가. 어느 곳에 살면 어떠한가. 우주가 움직이고 있고, 그 안에 내가 있고, 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듯, 나도 나의 자리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에 안심일 뿐.
글을 쓰다보니 해탈한 듯한 글이 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덕인이 되지 못한다. 해탈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평시에도 상당히 조심스럽다. 사실상 사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 전부 그 자체이셨지만,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고 필요치도 않으셨다고하셨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인것 같다. 딱히 이것이 사람보다 우등하여서라기보다, 그저 사람의 자리가 아닌 것이다. 우주에 앞뒤가 어디있고, 위아래가 어디있겠는가. 내가 앉은 자리가 나의 자리이고, 그대의 자리는 그대 것이니라. 나의 것 이외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그냥 그런 것.
나의 부족함,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고, 나는 나를 수용 할 뿐. 이래서 근래 마음이 편안하니 즐거운가보다, 아멘 so b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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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있어줘
감독 에릭 쿠 (2005 / 싱가폴)
출연 테레사 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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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영화는 처음 인 듯, 적어도 기억나는 것은. 짧고 조용하고 좋다, 매우. 소리가 많지 않다. 세 이야기의 옴니버스 구성이지만, 결국 모두 연관되어있는 인물들. 세 가지 사랑이야기이고, 사람이야기이다. 특별히 아름답지 않고, 평균적으로 아름다움의 정석 또한 아니다. 늙은 노부부, 여중생의 동성애, 멋진 여자를 몰래 좋아하는 육덕진 경비. 개인적으로 경비의 은둔적인 사랑은 보고싶지 않았다. 인물의 모습도, 그녀를 숨어 바라보는 모습도 싫었다. 노부부와 여중생의 사랑 중 노부부의 사랑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가게를 지키시는 할아버지. 아들의 일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할머니를 알게되고, 그녀의 삶의 이야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잃었던 감각들이 살아난다. 할아버지는 그녀를 위해 음식을 해주고, 그녀의 책을 읽는다. 이것은 에로스의 사랑이 아닌 사람과 사람간의 진정한 인간적 사랑이다. 할아버지의 주름은 깊으며,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깊었으리라. 그 만큼 그녀를 잃음도 아팠을테지만 울기는 커녕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표정도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나무토막처럼 보내던 할아버지, 그녀의 책을 읽고, 아들의 부탁으로 그녀를 찾아간 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녀의 공간에서 눈물을 쏟으신다. .
 
할머니를 병간하는 할아버지, 영화의 전반적 색감은 이렇게 뉴트럴 neutral 하고, 소리가 없으며, 무미건조하다. 또한 화면 가득 인물들의 얼굴이 크게 잡히며, 그들의 표정외의 배경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매우 마음에 든다.  


볼 수, 들을 수 없는 그녀 - 하지만 언어를 배울 수 있었고, 책을 출판하기 위해 작업중이시다. 본인만의 방법으로 교감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그녀. 자신에게는 부족 할 것이 없다고, 보다 안타까운 이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화 전달은 목소리로, 수용은 손바닥에 적거나 손바닥 수화로



동성애 여중생 커플, 두 학생은 너무 예쁘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긴 친구, 그리고 남겨진, 버림받은 친구. 외면당하는 그녀는 결국 자살을 결심, 그리고 실천, 하지만. .



음식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은 할아버지. 그녀가 차를 준비하는 중, 눈물 흘리기 시작하는 할아버지. . 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눈물만 줄줄 흘리신다. .



할아버지를 안고 위로하시는 그녀. . 사람의 사랑. . 사랑 사랑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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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이지 않은 것의 환상적임 & 행복은 나누어야 사실 - 둘의 싱크

 

간만에 잠을 못 자서 그러지 잡념이 많았다 - 늦은 아침 잠들고, 이른 오후 쯤 깨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이 하루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다섯시를 향하고 있고, 하루가 어느정도 끝 자락을 향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것이 잠을 자지 못해서 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건 깨져버린 균형 - 일정은 좋지 않다. 딱히 좋지 않은 기분을 안고 ,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다. 
오랜만에 찾은 스타벅스 , 새로운 직원이 생겼다. 행동이 느리고 어눌하신 분이 , 아이엠샘의 샘을 기억나게 했다 - 그 또한 비슷한 성향의 소유자였고, 또한 카페에서 일을해서 일 것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것의 환상적임과 행복은 나누어야 사실이라는 - 두 현상들의 싱크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환상적인 것도 보편적이지 못하면 즐거움이 감소한다. 아인슈타인이 선구자가 외롭다는 말 또한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고독함을 괜히 멋있게 보이게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이해 할 수 없지만 특유의 고유성과 특별함이 있는 것들. 행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 행복의 양에 상관없이, 혼자라는 것은 행복의 감소로 향한다.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고독이라는 아픔일 것이다.
외로움을 몰랐던 시절들을 기억해본다. 학창시절 많지 않았던 친구들 - 아니, 보편적이지 않았던 인간관계. 특정한 그룹에 속하기 보다는 개개인적으로 관계를 성립하곤 했다. 클릭이나 그룹에 상관없이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만났고 , 그것은 때로 - 자주 어색함을 초래했다. 같은 그룹에서도 나와 궁합이 잘 맞아 밤새 통화를 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그 친구와 함께하려 나간 모임 자리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들도 허다하였다. 여기 저기 이 그룹 저 그룹들 속한 듯 속하지 않은 듯한 나의 우정관계들은 나의 소속감을 있는지 없는 듯하게 만들었다. 친구들은 '다 같이'모이는 경우 나를 부를지 말지 어정쩡한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러한 중고시절 속에서도 나는 외로움을 몰랐다. 딱히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 본 기억이 없고 - 외롭다거나 고독하다거나 힘들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늦은 고등학교 시절, 어렵다 혹은 슬프다, 미안하다라는 느낌을 가장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가장 잠재적이였던 시간들이 아니였나싶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 동안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부터 외로움은 '당연함'이 되어버렸고, 모든 사람은 외롭다는 전재를 바탕에 깔은 듯한 인식이 생겨버렸다. 미국으로의 유학이 그 시작이였을까. 많은 것의 , 혹은 모든 것의 알 수 없는 시발점들 ,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려러니 싶기도 하다.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해 , 오지 않는 잠이 나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 불면이라. .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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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감독 숀 펜 (2007 / 미국)
출연 에밀 허쉬,빈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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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
영화의 전개에는 서두가 없으나 주인고잉 바라는 점은 하나이고 분명하다. 주인공은 명문 대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비를 대주겠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떠난다. 차르 타고 떠난다, 일단 서쪽으로. 모든 돈을 기부, 물질적인 것들을 떠나고 싶은 욕망. 사회의 규율에 대해, 직업이란 현대사회의 창조물이라는, 그 따위의 것은 필요 없다는 주인공. '영혼의 혁명' spiritual revolution을 향하여, 걷고, 일을하고, 사람을 만나고, 혼자임을 바라고, 야생에서의 생활을 바란다. 야생 열매를 먹고, 작고 큰 동물들을 먹는다. 물을 마시고 얼음을 녹여 마시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한다.  돈을 불태운다. 책을 읽으며 일기를 쓴다. 아기가 있는 짐승을 쏘지 못한다.
부모에 대한 반항감, 사회에 대한 저항. 젊은이의 열정이라기에, 그의 것은 너무나 뜨겁다. 열정과 이성의 중심따위는 없다. 그에게 이 자유에 대한 욕망은 열정이자 이성이고, 모든 것이다. 가족도, 인연도, 여자도, 어떠한 것도 그는 마다하고 '단순한 아름다움' simple beauty를 향하여 계속 걷는다. 그를 만나는 이들은 그에게 가족이 있느냐며, 가족이 되자며, 사랑을 하자며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혼자의 길을 떠나는 주인공.


사과에게 대화를 하며 씹어먹는 모습. 나도 사과가 먹고싶다.



두려움이라던 물에서 카약을 질주하며, 멕시코까지 내려간다. 국경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도 부수고, 국경도, 사회적 인식도, 가족의 틀, 친구의 우정, 돈의 허용범위, 법, 모든 것을 버리고 부순다. 그것들을 깨고 자신만의 이야기 story 를 쓰러 그는 움직인다. 아파도 다쳐도 괴로워도 슬퍼도, 자연에 대한 기쁨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 하다. 멕시코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향한다 - 알라스카. 그야말로 횡량함을 찾아 떠나 움직이는 주인공. 아무것도 누구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내적 혁명을 향한다.
알라스카에서 '매직 버스'를 발견하고, 그곳에서의 생활. 커다란 동물을 잡아 먹으로 쏘지만, 그것은 구더기로 엉망이되고 먹을 수 없게된다. 인생의 최대의 실수라며, 인간에게 혀용되지 않은 야생의 범위에, 괴로움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이 깨트린 수 많은 범위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불가능이라는 제한. 하지만 그러한 벽에 부딫히면서도 그는 기뻤으리라 - 자연의, 야생의 단조로움에, 극단적임에, 그는 기뻤으리라.
"calling each name by its right name - by its right name" 제 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우리는 돈을 행복이라하고, 직업을 필수라하고, 사람을 사랑이라고 한다. 가정을 안정이라하고, 종교를 평화라하고, 권력을 힘이라한다. 착각이다. 모든 것은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간과하여 보는 것에 우리는 익숙치 않다. 그것의 영향에 집중하는 경향이 훨씬 크고, 그 영향은 작은 일부일 경우가 허다하다. 극 중, 모든 것을 떠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위하여 Alexander 라는 이름을 짓는다. 죽음 앞에서 그는 본명인 Christopher 로 자신을 칭한다. 그렇게 그는 떠났지만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when you forgive, you love." 용서는 사랑이라한다. 용서는 사랑 - 괴로워도, 미워도, 싫어도 수용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리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쉽고, 더러운 것을 받아드리기는 어렵다. 어려운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리라 -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떠한 것으로 더러움을 어려움을 괴로움을 부정을 세상에서 외롭지 않게 하겠는가.
그는 삶의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하였고, 죽음의 순간에서 남긴 문구는 'happiness is not real unless shared' 나누지 않은 행복은 사실이 아니다. 혼자임을, 횡량함을 갈망하여 알라스카까지 갔지만, 그 또한 loneliness 외로움에 대하여 글을 썼다. 외로움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 뛰는 심장과 같은 것이리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정이거나 인식하지 못한 아둔함이지 않을까.
"not to be strong, but to feel strong" 자신감이라는 말을, 어감 때문인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뜻을 보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신을 믿는 마음. 자신감이 때로 싫은 것은, 그것과 자만감의 경계가 모호하고, 둘을 넘나드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되, 자신으로 가득차면, 타인과 옳은 기준들이 들어올 틈이 없음으로, 자신을 믿되 겸손이라는 마음으로 늘 자신을 다시 비워야한다. 강할 순 없다, 강할 수록 상대적으로 강한 이가 있으며, 우리는 영원을 향해 늘 움직인다. 하지만 강하고 싶지 또한 않다, 그저 자신을 믿는 마음이 강할 수 있으면  - 하는 바람이다. 그 만큼 나를 믿고, 사랑하고, 수용하면 강함도, 약함도, 용기도, 굉장함도, 이러한 특정 형용사 따위는 모두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면 족하다, 나에 대한 믿음.
틀을 벗어난 그의 모습에서,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간단함을 아낄 줄 아는 모습에서 - 나 안의 그러한 것들 또한 자극을 받는다. 자유, 자유, 자유, 자유 도전 창조. 미니멀한 삶에 대한 동경을, 담는다.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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