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2015)

Whiplash 
8.4
감독
데미언 차젤
출연
마일스 텔러, J.K. 시몬스, 폴 라이저, 멜리사 비노이스트, 오스틴 스토웰
정보
드라마 | 미국 | 106 분 | 201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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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관계, 예술과의 관계, 현실성과의 거리 등 모든 것을 적당히 적절히 표현한 예술. 더불어 시청각적 환상은 행복의 공식.


아버지와의 어색한 관계, 흔히보는 아버지의 이루지 못 한 꿈을 쫓는 혹은 아버지의 명성을 따르지 못하는 따위의 진부함은 없다. 되려 가족관계는 예술을 이해치 못하는 오히려 흔할 법한 그림. 그렇다고 아버지의 대신을 찾지도 않는 주인공과 그것을 그럴싸하게 체워주지도, 노력 조차 없는 교수. 이러한 괜함없는 관계들의 동선은 존재하면서도 하지 않는듯 흐름을 도울 뿐. 이러한 발란스를 어찌 완벽이라 할 수 없는지.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예체능의 세계. 그 미지의 세상에서 한할만 학교라는 뉴욕이라는 배경. 연습이라는 범위 없는 수행에 집중한 영화의 포인트는 매우 훌륭타. 더불어 그것을 극으로 밀어넣는 교수의 캐릭터는 미소짓게되는 선택.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캐릭터들의 선택과, 그것을 허용하는 예술이라는 세계. 주제를 헛되이 낭비치 않는 스토리라인, 그 정점을 마지막에 위치한 플롯은 그저 감탄.

이 모든 기초에 적절한 재미를 두고도 수준을 두어 층 올리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 눈빛, 손가락의 움직임 만으로도 볼 만한 거리를 만든다. 영화 중 어느 10초를 떼어두어도 볼 거리 들을거리가 가득, 환상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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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8월 8일 오후 8시. doors open 7시. 나의 도착시간 4:30시. 입구가 보인다, 삼사십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기다린다, 두시간 반. 들어가서 더 기다린다 한 시간. 

나의 뒤에 노숙자들이 줄을 서있더니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누군가가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줄을 선다, smart. 핫도그를 파는 스탠드에서 스피커로 Sigur ros 의 음악이 흐른다. 





7시 입장. Paramount theatre, 제법 좋다. 카메라에 담기지는 않지만 제법 멋진 실내. 




무대 옆의 스피커들. 음향이 제법 좋았다, 만족. 이따금 낮은 bass 소리는 많이 울렸지만 전반적으로 음향에 신경쓰지 않고 공연을 봄.


무대에서 넷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공연을 기다리며 Montreal 에서 얼마 전에 이사 온 Microsoft 의 젊은이와 두 의대생과 이야기를 나눈다. 음악, 공연, sigur ros, ambiance music, artists, writing, poetry, spoken word, bars, Seattle, capitol hill, food 등등 한 시간은 금새 지난다.

친해진 덕분에 나를 앞에 세워주었다. 뒤에 모르는 이였다면 두팔 높이 올려 폭풍 사진을 찍었을텐데 미안하여 사진이 몇 장 없고 수평 따위도 없다.



공연시작 - 노래하는 Jonsi 


활로 기타 연주






기타 통에 목소리 넣기 


bass George 








drum Orri 


건반의 Kjartan 는 "tired of touring" 이라는 이유로 투어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는 2명의 연주자들이 투어 중. 





꿈만 같은,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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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보다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며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사용함으로 유명한 .. Harman Kardon 을 구입. 값은 얼추 180$ 으로 굉장한 고가의 제품은 아님으로 큰 기대는 없었다. 

디자인은 일단 예쁘다 투명하니 어디에 두어도 특별히 어색하거나 둔탁하지 않은 디자인. 스피커들이라면 검정이나 가끔 실버 ..인데 투명한 디자인은 확실히 깔끔, 선도 은빛으로 탁한 느낌이 없다. 투명한 디자인을 위해 안에 선도 신경을 많이 썼어야 했을텐데 베리 깔끔. 소리에 끼치는 영향이 어떤지가 의문.

소리는 우퍼의 성능이 좋음. 미들하이 스피커 자체의 성능 중 좋은 점이라면 소리의 분리가 좋다. 얇은 소리가 특히 선명한 느낌. 피아노 건반소리나 고음의 목소리 듣기 좋음. 그래서 그런지 피아노, 맑은 목소리, 일렉 댄스 곡들이 특히나 좋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롹보다는 힙합이 잘 표현되는 느낌 ..도 받았음. 

몇 일 몇 개월 몇 년 들어봐야 알겠지만 첫 날의 느낌은 이러이러 ~ 가격대비 만족 별 4.3 / 5. 디자인 전혀 상관 없으시다면 음질상 비추는 아니지만 이 가격선에서 훨씬 좋은 음질을 찾으실수 있을 것이리라요다람쥐!

스피커 쇼핑동안 추천받은 브랜드들 tannoy, creative, logitech, GOgroove, Bose, bonoboss .. 마지막 logitech 도 신중히 고려 ..제법 괜찮은 듯 및 추천 세번 받음, 친구는 tannoy 극찬 .. creative 도 추천 두번 받음, bonoboss 는 국내제품이여서 배송어려움 예상으로 포기 .. bose 도 추천 세 번 받음, 친구는 본인은 bose 3 piece 사용 중, 이지만 5 piece 매우 추천. 아, 한 분은 본인의 yamaha receiver 를 나에게 파시려 ..하하. 알아보면 중고제품도 상당히 많더라는. 구입 전 들어보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youtube 에 제품 리뷰들도 상당히 많이 올라와 있다. 전자제품 구입 전 youtube review 검색해보기 좋아한다.


마룻바닥이어서 카펫이 소리를 먹지 않아 매우 다행 ..이라 느끼며, 방에 가구가 많이 없어 소리가 퍼지어 참 좋다 ..라고 느낀다. 어쩌다보니 7시간 동안 음악만 듣고있다 .. 위치 옮겨서 듣고 장르 바꿔서 듣고 목소리 분위기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 자정이 훌 넘었네 그래.


사실 이것과 매우 고민 .... creative T3

Creative GigaWorks T3 2.1 Multimedia Speaker System

http://www.amazon.com/Creative-GigaWorks-Multimedia-Speaker-System/dp/B001S10DDO/ref=sr_1_1?ie=UTF8&qid=1335340852&sr=8-1

Creative GigaWorks T3 2.1 Multimedia Speaker System

성능면에서 가격대비 상당히 좋은 듯 .. youtube review 들로 들은 느낌도 좋았고 으흑 ....... 여전히 갖고 싶! 다! 하하 




택배 도착 ~~~~~~~~~ 가방도 안 내려놓고 박스에서 꺼내어 일단 배치 (날이 밝음을 알 수 있 .. 오후 여섯시 경)


선반을 책상 옆으로 이동 .. 우퍼 책상 밑으로 이동 .. 가구 배치 끙끙 


밤이 무르익었 .. 촛불도 켜고 음악 삼매경 ~~~~ 빗 소리도 투룩투룩 




7시간의 이것저것 실험 후 nell 의 losing control 무한 반복  ... 으아으 amazing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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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83 의 공연, 표를 늦게 구입한지라 값이 제법 있었다, $67. 공연장 venue 는 Neumos. 큰 venue는 아니지만 소공연장으로 제법 공연이 많은 곳. 이 전에도 한 번 간 적이 있었는데 나쁘지 않았지만 어메이징하지도 않았던 공연. 
M83 의 새 앨범 발매 기념으로 투어 중이다 - 4월에 Seattle 에 다시 온다고 하는데 다시 갈 것 같다 하하. 시애틀 - 공연이 제법 있어 좋다. 물론 음악 자체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신나고 재미있고 완성도 있는 일렉의 느낌. 하지만 라이브 생 음악과 녹음의 차이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하다. 춤추고 뛰고 신났다 야호! 아 어메이징. 쏘 익사이팅! 

이번 음반의 타이틀 곡 Midnight City 윗 층에서 다른 관객이 찍은 영상. 무대 앞 쪽에서 신나 뛰는 내가 보인다 킄 웃기다. 신났어요 예히 !



공연의 시작은 이 녀석 담당


무아지경 


서있기 



신났오용



예아 ~~ 위러뷰 ~~ 


땡큐 씨애를 ~ 땡큐 ~ 



공연 끝 빠이 



M83 tour bus 투어버스 



맥주 마셨다 신난다 모르는 외국인들과 기념 촬영 









다른 사람들이 찍은 공연의 모습  



신났오용 



무아지경 



2층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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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힘들어. 요즘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두 주 전에 아팠던 후로 지난 주부터 건강이 좋지 않고 이제는 생활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된다. 학교 업무는 물론이고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잠과 식사에 사용하다보니 능률이 전혀 없는 생활이다. 물론 물리적 생존이 목적이라면 효율적인 생활이겠구나, 그야말로 생존 mode.
고등학교 시절 부터 자취를 했지만 사실상 자취가 아니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가족이 가까이 있거나, immediate family 가 아니더라도 친지분들이 가까이서 상당히 챙겨주셨기 때문에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이제서야 혼자, 그야말로 혼자 지내려니, 이것이 자취이구나 싶다. 살림이라는 것이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요한다. 정리며 식사 준비 위생 등 신경 쓸 것이 종일이다. 더구나 생활에 있어 무시 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보류 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생활에 있어 '낮은 밖 밤은 집'이 가장 효율적이더라. 업무는 밖에서, 휴식은 집에서 - 밖에서는 밖 옷 집에서는 집옷, 업무는 책상 식사는 식탁 잠은 침대. 각자의 위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체력적으로 피로하니 집에서 나가기도 싫거니와 나가 앉아있자면 금새 집 생각이 나 바깥에 앉아 있기가 어렵다. 그렇게 요즘은 집으로 쉽게 달려온다.
더불어 기운이 부족하니 집,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 이렇게 지칠 수록 정신력에 의지해야하는데 둘이 함께 지쳐버렸다, 아.

자취의 사전적 의미 - 이외에도 의미가 많지만 relevant 한 것들만 일단 보자면:
자취 [自炊] [명사]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
자취[自取] [명사] 잘하든 못하든 자기 스스로 만들어 그렇게 됨.

두 의미 모두 흥미롭다.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한다는 .. 생활에 있어 식사의 중요성이 반영되었다. 두번째 의미는, '잘하든 못하든'이라는 단락이 불필요한 느낌이면서도 적합하다. '자립'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지 싶다.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이 '잘잘못'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나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스스로 챙기는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그것을 '잘' 할 능력도 없구나 싶다. 생활적 요소들과 학업적 요소를 병행한다는 것이, 대부분 유학생들의 생활일텐데 나에게 큰 어려움을 준다는 것에 부끄럽기도하고, 내 지금까지 얼마나 편안히만 지냈는가 이제서야 느낀다. 특별함 없는 생활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나를 지치게 한다니 - 자신에게 실망이다. 잠과 아쉬움이 많은 근래이다, 하. 누가 그러더라 '자는게 남는거다' 얼마 전 나 또한 비슷한 말을했더라 "삶이 힘들고 지칠때 자라'
이 또한 지나리 -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스스로 만들어 그렇게 .. 되었으면, 앞으로 나의 자취가 익숙해지고 편안해졌으면,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1 11 23 1909 Cafe Solstice
지난 밤 자정 쯔음 두통이 시작되었다. 급격히 정도가 심해지더니 속이 울렁거렸고 수 차례 구토에 이르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참을 수가 없어 진통제를 먹었지만 구토로 약을 다시 먹어야 했다. 심한두통과 구토, 경험 해 본 증상이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을 것을 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걱정드릴테지만 엄마아빠가 보고싶어 전화기를 든다. 받지 않으신다 .. 아프다는 문자를 남기니 잠든 후 인 몇 시간 후에 전화가 울린다. 두 분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 몇가지 조언을 해주셨고 알겠다며 잘거라며 서둘러 끊었다. 그렇게 다시 취침. 오전 수업 시간에 맞추어 눈을 떴지만 다시 눈을 감고 뜨니 오후 두어시 .. 조금 더 누워있자니 세시 쯔음, 하. 두통은 떠났다.
씻고 국을 끓여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 한 밤 중의 병은 어디에 전화 할 곳도 몇 되지 않더라. 자취라는 생활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느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웠다. 근래 집에 대한 생각이 뜸하다 싶었더니, 몸이 나의 기억을 자극시킨다. 집을 기억하고, 근본족인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어려움이었나보다. 가족에 대한 의지를 기억하고, 건강에 대한 중요함을 기억하고, 기본적 생활 요소들에 다시끔 관심을 두자는 신호이지 싶다. 아프지 말아야지, 아프면 안된다. 공부요 행복이요 건강이 기본인 것을 - 건강해야지.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해야지.
고통의 연장 속에서 들던 생각은 -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로 나뉘더라. 아픈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다른 모든 분야 또한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 배우고 배우지 않음, 행복하고 그렇지 않음, 가난과 부유함, 편안함과 불편함, 진심과 아님, 관심과 무관심 - 그렇게 각자의 세상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으로, 나뉘는게 아닌가 싶다. 내가 보는 것들과 내가 볼 수 없는 것들,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 .. 그러한 모두의 공존, 이 세상인가보다.
음악을 들으여 카페에 왔다. 나의 선곡이 아닌 음악들을 듣고있자니 기분이 나아진다. 맛있는 커피 또한 기분을 돕는다. 공존이 나를 살리는구나 - 감사하게 건강하게 지내야지, 아멘.



http://alldic.daum.net/dic/search_result_total.do?eq=&LAYOUT_URL_PREFIX=&nil_profile=vsearch&nil_src=dic&type=all&q=%C0%DA%C3%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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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화요일 1036시 매미우는 햇빛 뜨거운 아침


어제 음악을 들었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당시에 음악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버스로 학교를 다니면서 워크맨 카세트 플레이어로 서태지를 들었던 기억이 가장 깊게 남는다. 버스에서 다른 사람들의 헤드폰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들을들 듣으면서 저것은 무슨노래일까 싶었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동안은 음악을 특별히 듣지 않았다. 친구들은 동방신기를 좋아했는데 나는 해외 팝 정도 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다닐 시절에 음악을 가장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당시 테크노를 좋아하였고 일렉트로닉 시부야케 등 여러 장르를 발견하였던 때라 가리지 않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음악 찾는 즐거움이 시간가는 줄 몰랐고 늘 음악을 꽂고 있었다. 대학교에 와서는 음악을 특별히 듣지 않는다. 고등학교때 즐겨 들었던 음악 중 편안한 류의 소리 위주로 이어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음악을 들은 것이 참으로 오래 전 이야기 같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음악이 듣고싶더라. 지산이 흥하고 있어서 인가보다. 가요 50선 같은 것도 훑어보고 몇가지 인디음악들도 들으며, 스키조를 발견 하였다. 이정현 1,2 집과 델리스파이스는 언제나 아무리 들어도 매력적이다. 오랜만에 듣지않던 음악을 들으니 참으로 신선하고 좋다.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은 언젠가 꼭 가보고싶다. 락을 좀 더 열심히 들어보고 싶은데 고등학교 당시의 열정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음악을 듣다가 그 동안 음악에 대해 생각 할 틈이 없었나 싶더라. 혹은 새로움에 대한 반감같은 것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왜 음악을 접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좋은 음악을 발견하여 상쾌하구나!

1439시
긍정 밝고 싶은데 시간이 필요한지 쉽지않다 휘유 ~ 오랫동안 차분함을 동경했고 지금도 그러한 마음이 있다. 동경과 별개로 밝고 싶은데에, 기운을 노력을 내자 화이팅:)


8/3 수요일 1237시 요가 다녀 온 더운 여름의 오후
이런 저런 글을 읽고 있다 - 열정적으로 한가지에 몰입하여 크게 상처받은 이들과 '라이트'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본 이들의 대립아닌 대립의 현상을 보고있다. 안타깝다. 같은 틀 안에 있지만서도 한 측이 우월시되고, 상황이 바뀌자 상대 측이 일어나 비웃는 - 어느 쪽이 잘했다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열정을 라이트보다 응원한다. 열정을 지나 집착을 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한 순간 광기가 아니였을 것이다. 모두의 시작은 열정이였고 의지였고 점점 나도 모르는 시간 동안 깊어져 버렸을 것이다. 보다 사랑하는 쪽이 지는 쪽이라고 - 사랑한 만큼 아픈거라고, 하지만 쉽게 아끼고 쉽게 버리는 그러한 마음 편안함이 과연 긍정적인 것일까. 한 가지에 메여 세상을 볼 수 없음은 어리석음이지만 한 가지를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아끼는 것은 결코 후회 할 일은 아니리라.
나의 기준이였던 그가 더이상 그 자리에 설 수 없었을 때에 - 아팠지만 그 또한 지나갔고, 설명 할 수 없이 허망했지만 이제는 괜찮다. 깨진 그릇은 붙여도 자욱이 남고 물도 샌다고 한다 - 그 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처음부터 하나씩 내가 노력할게"라는 말에 다시 희망이 일어난다.


8/5 금요일 1440시 등산 다녀 온 더운 여름의 오후
할리스에 앉아있다 - 나의 피씨방 할리스. 금요일인데 의외로 사람이 없어 이것저것 인터넷을 뒤적이며 휴식 중. 책은 들고 왔지만 할 마음은 전혀 없었음. 이번 방학동안은 그냥 쉬어야겠다고 다짐. 옛 친구들의 일상을 보고있자니 동떨어진 듯한 기분. 얼마 전 미용실에서도 아저씨가 왜 여기사람 안 같죠? 라며 자꾸 어디서 왔냐고 묻더라. 청주에서 태어나 오늘까지 살았는데 외지사람 같다는 것이다. 휘유 - 사실이 나의 마음도 그러하다. 창 밖을 보고있자면 나의 동네가 분명한데 사람들은 무언가 나와는 다른 - '사람들'이라는 뭉치로 보이고 나는 속 할 수 없는 기분. 외로움 타령이라기보다 없는 듯한 소속감, 누구도 나를 제외하지 않았지만 내 자신이 나를 끌어냈음을 문득 기억하게된다. 냉소의 결과는 여기인가보다. 결과적으로 아쉬우면서도 과정에 있어서 나는 왜 늘 밖이고 싶은 것일까. 딱히 궁금치는 않은 질문. 지금에까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싶지는 않다 - 아.
그나저나 오늘 아침 오랜만에 등산을 다녀왔다. 문을 나서 몇 걸음 걷는 순간 '나오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역시나 운동이라는 것이 상쾌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것. 우암산은 어렵지 않고 익숙하여 너무나 편안하다. 산을 참 오랜만에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정상에서 쉬고 내려오는데까지 한시간 반도 걸리지 않더라. 내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날이 뜨거워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 뜨거움 따듯함은 좋지만 피부가 상할까 걷기가 싫은 것 뿐. 여름이니 마땅히 뜨겁고 덥다. 등산다녀온 옷들을 빨아 옥상에 널었는데 바싹 말라있을 생각을 하니 기쁘고 상쾌하구나 야호!


8/6 토요일 2158시 조금은 졸린 밤
오늘은 - 오전에는 우암산을 올랐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정상에 가까왔지만 도다르지 못하고 내려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외숙모할머니께서 서리태 콩을 삶아다 주셨다며 콩 국수를 해주셨다. 혼자 쇼핑을하고 돌아와, 오후에는 창준이와 성당에 미사를 드리고 맥도날드를 먹고싶어하는 창준을 위해 배달서비스를 했다. 일본 드라마를 몇 편 보고 집에서 창준이와 휴식한 하루였다. 서울을 올라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하루이기도하다. 나의 성격에 대하여 아직도 불편함을 느끼고 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 불편하다. 아직도 어느 정도가 맞는 것인지 기준을 모르겠다. 딱히 생각치 않고 싶지만 괜찮음의 선을 모르겠으니 .... 혹시나 남에게 폐나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나의 성격이 참 변하였구나 싶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점들은 여전히 .. 괜찮으리라 생각이 들면서도 미안키도하고 내 자신이 불편하다.
내일은 아빠가 꾸르실료 교육을 마치시는 날이다. 많은 것이 순조롭게 무사히 진행되고 있어 감사한 여름이다. 집에서 오래 쉬었고 마음이 편하였고 나 자신에게 솔직하려 무엇보다 노력했으며 - 아쉬움도 많이 남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한만큼 뿌듯하기도한 여름이다. 이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면 - 싶기는 처음이다.

시간이 흐른다 - 싫을 정도로 인지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시애틀로 돌아갈 날이 다가 올 수록 거부하고싶다. 정중히 - 싫습니다 - 라고 거절하고싶지만 내가 끊은 비행기표, 내가 선택한 생활이기에 나는 수긍하며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분명함 와 중 달리고 싶고 떠나고 싶은 마음 .... 토닥이며 가라앉힐 나의 자그만 마음. 너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되 - 라며 사그리는 마음.
'내년 여름은 꼭 떠나야지'라며 여행을 다짐한다. 사실 아직 가족 휴가가 남아있고 올 겨울은 동부를 갈 것이기에 여행에 대한 미련은 아닌 것 같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가까운 듯 싶다. 매 해 반복되는 여름방학과 휴가 같은 것이 아닌 - 오랜만에 나의 생활에 쌩뚱맞음이 그립다. 한동안 익숙한 것들에 집착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로 그러했다. 편입도 다른 곳으로 가고싶지 않았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가 오랜만에 그립나보다. 이사를 하는 것이 큰 변화일테니 어쩌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서의 일상은 사실 상상 할 수가 없다 - 겪지 않은 공간에서의 생활일테니 새로움의 시작이다.
이러한 새로움을 바란다면 돌아가고싶어 맞을텐데 이 여름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나 자신이 양방향으로 동시에 달리고 있음을 느낀다. 늘 모순의 연속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하고싶지만 하고싶지않아 - 사이에서 해야하라고 생각하면 하고싶어라고 느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성이 감성을 이끌 수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인데 - 근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술해 놓으니 더 이상하구나. 결과적으로 딱히 의견이 없는 것이 맞겠다. 그래 '요즘 별 생각 없습니다'라고 마무리하자. 흐르는 시간에 맡겨서 그냥 흘러버리자. 의도도 없고 갈망도 없는 - 그저 흘르는 - 내가 가장 바라던 생활이지 않은가. 근래 공부도 놓아버렸다. 집에서 쉬는 일이 너무나 좋고 편하여 쉬고있다. 그야말로 '류'한 생활이구나 -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있구나. 감사합니다 :)

사실 -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 아니 조금 많아 아니 있어.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어 하지만 이야기 할 기회를 만들지 않은 것은 두려워서였을까.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제, 지금의 상황에서 그냥 솔직하게 얘기할게 그냥 다 얘기 해볼게.
무엇보다 '미안하다'라는 생각을 참 많이했어. 식상한 생각이고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랬거,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무엇보다 내가 떠나려 했을때 네가 너무나 쉽게 단념하는 모습에 - 내가 잘못한 것이 많았구나 싶었어. 그렇게 쉽게 나를 보낼만큼, 단 한 번 한마디로도 잡으려 하지 않는 모습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주장만 세웠는지, 너와 소통을 일방적으로했는지 그제서야 알았고 뒤돌아 생각하도 그 순간이 가장 절실히 말해주고있어.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지난 선택들은 돌릴 수 없으니 계속 미안 할 수 밖에 없더라.
제법의 시간동안 괘나 자주 생각이 나더라. 이상하리만큼 생각이 나던 때들도 있었고, 덜 떠오르던 시간들도 있었어. 무튼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아 - 생각들. 문득문득 왕왕 떠올라, 지난 모습들이지만 좋았던 편했던 모습들. 그렇지만서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란 어려웠어. 왜일까 .. 내가 변했다고 느끼기도 했어. 이전의 나의 모습에 비해서 내 자신이 싫었고 부끄러웠어. 갈수록 이전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 얼마나 어리고 당돌했는지 후회도 많이했고 점점 부끄러워졌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떠올려도, 이전에 비해 세상적인 모습, 감정을 무시하는 나의 태도들을 보면서 지금의 모습에도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엇어. 돌아가고싶기도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고, 나은 모습이고 싶은데 시간이 필요했어. 어쩌면 보다 나음을 지향하는 모든 순간들도 나 자신의 모습이고 이 또한 함꼐 공유 할 만큼 우리가 편안했으면 좋을텐데 - 떠나 온 지금 그 만큼 네가 편하지만은 않더라.
궁극적으로 지난 시간들 동안 하고싶었던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였어. '다시'라는 것 참 많이 생각했어. 다시, 이번은 더 나을까 - 혹은 데자뷰, 같은 상황의 반복일까. 상당히 무척 궁금하고 생각도 수십백번 했을거야. 하지만 자신이 없어. 나는 상황의 절반일 뿐, 그래서 무섭기도 해.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겠지. 언젠가는 편안히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지. 네 마음은 왜인지 편할거라 생각되는데 -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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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대화가 필요할까 - 물론 소통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소리라는 매체로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해 때로 불편한 마음이 든다. 소리 없는 공간을 왜 어색함이라 부르는지, 소일에 대한 나의 의견을 왜 굳이 알아야하는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를 내가 조절 할 수 없다는 것이 때로 힘들다. 듣고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도 때로 하게된다. 한가지 주제가 싫어 대화를 움직이려 내가 방향을 틀기도하고, 상대의 의견이 싫지만서도 이어지는 대화가 싫어 동의하기도한다. 이렇게 논리없는 대화들이 굳이 이루워져야하는가 - 오히려 불편함을 쌓는데에 나는 왜 그것의 부분이 되어야 하는지, 싫다. 물론 이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그저 수용해야하는 세상의 이치 따위의 현상일 뿐 - 다만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나에게 가까운 이들이 나의 적은 말수에 대한 의견들을 표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 이었다. 말의 부재가 부정적인 기운으로 해석이 되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의 의도는 이가 아니였음을, 몰라 주는가 싶어 아쉽기도하다.

Planetwalker
카테고리 생활/요리/건강 > 건강 > 다이어트
지은이 Francis, John (RandomHouse,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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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가 생활 요리 건강 다이어트라니 ........... 민망 할 정도로 어이가 없구나. 실망이다 티스토리 휴.

여하튼 3년 전 위의 John Francis 의 Planet Walker 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자동차와 같은 기계적 이동수단과 '말'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매개체를 완전히 닫았다. 프랜시스는 글, 그림, 몸짓, 음악 등 말을 대신하는 매체들만을 이용하여 소통하였다. 물론 나는 그의 모습을 완전히 따르고싶지는 않다. 나에게 대화는 편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만큼 편안하거나, 글만큼의 매력은 결코 느끼지 못하지만, 분명 대화는 편안하다. 또한 대화는 사회의 구성으로써 할 수 있다면 해야하는 '관습'임에 분명하다. 내가 말이라는 매개체를 완전히 닫아버린다면, 나는 '실어증'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에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말이 싫다. 말 수가 적은 이들은 세상에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또한 세상에 많다. 둘의 궁합은 참으로 어려움을 근래 느낀다. 사실 주위에 말수가 적은 이보다 많은 이가 많다. 많다는 기준은 지극히 나의 것임으로,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여하튼, 그렇게 그들은 많은 말로 나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미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해의 요소가 되었다니 마음이 불편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수긍하려 많은 선택을 한다. 세상에 수긍하려 법을 준수하고, 학교라는 기관에게 학습을 의존한다. 하지만 세상에 수긍하려 말 수를 늘릴 수는 없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말 수가 적은 것은 수용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이라 생각된다. 한 동안, 오랜시간 동안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대립되는 기준들에게 찔려 아프기도 오래 아팠다. 하지만 그들의 방향성을 무시하니, 대립이라기보다 제 갈 길을 가는 각자의 이론들이 되면서 많은 것이 괜찮았다. 그렇게 기준들을 굽히고 논리의 날을 세우지 않으면 - 모두를 수긍하면 - 많은 것이 괜찮다. 바라지 않는다, 그저 받아드릴 뿐. 나의 의견을 내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내고싶지 않다. 굳이 나의 기준을, 나의 방향을 나타내고싶지 않다. 굳이 대립하고싶지 않다. 난 그저 편하고 싶을 뿐인데, 나에게 필요이상의 말을 요구하는 것이 나는,
말이 듣고싶지 않아 귀에 음악을 꽂는 시간이 많다. 사람의 목소리도 말도 아름답지 않기 쉽다. 듣고싶지 않고, 소리를 내고싶지도 않다. 얼굴의 근육들 - 표정, 눈매, 입술근육의 이완, 몸짓, 손짓, 움직임, 일상의 선택, 등 소통 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은데 - 우리는 왜 말에 집중하는가. 나의 눈을 읽으라, 과한 부탁인가. 아쉽다, 수긍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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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곡을 처음 들었다 ........ G Dragon 에 대해서는 서태지에 관한 비교가 많았기에 소문으로 왕왕 들었지만 정작 들어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High high 의 비디오를 보며 움직임과 감각이 TOP 과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동선이 보다 자유롭고 독창적이다. 그것은 커다란 차이가 아닌 미세한 다름으로 종잇장 차이..... 정도 인 것 같다. 물론 둘 모두 상당히 매력적인 모습이고 High high의 비디오 또한 괜찮은 연출이였다. 하지만 둘의 움직임에는 분명 무언가 다르다.
TOP 의 turn it up 또한 보았다. 굳이 둘을 비교할 마음은 없지만...... 그렇게 되었군. 전반적인 뮤지션들과 G dragon 의 차이점을 짚고 싶은 것. 음악 자체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컨셉, 가사, 박자 - 에 분명한 차원의 차이가 있다. 물론 추구하는 분위기가 다름이 분명하지만 TOP 의 영상과 음악에는 시장의 음악들보다 뛰어난 특별함이 부족하다. 반면 GD의 곡은 성격이 있다. 분명 보편적인 '소년'이라는 주제로 어려운 시절 외로움 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에 진솔함이 있고 공감대가 있다. 단순하여 편안하지만 개성있어 끌리는 ..... 움직임 또한 무언가 전혀 얽히거나 어려움 어색함 없는 편안함이 있다. 저러한 능숙함이 그를 서태지와 비교하게되는 - 그러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특별히 영상 자체는 완벽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컨셉은 상당히 괜찮은 것 같다. 사과라는 대상으로 주제를 깔끔히 표현했고 이미지의 표현 또한 독창의 노력이 보인다. 오히려 TOP 의 영상 컨셉이 깔끔하였지만 독창성은 없는 듯 싶다.
 
아이돌...... 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지 싶은데 , 사실상 괜찮은 곡들도 있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경험을 자주 하였다. 전반적 컨셉, 완성도가 높은 곡들이나 뮤지션들이 분명 있다. '아이돌'이라는 이름에 그러한 노력들이 무뎌지지는 않았으면 싶다. 앞으로 GD 도 왕왕 들을 듯 싶다.

오늘 이곡에도 반했음.


어쿠스틱한 이 곡도 좋다웅 - 뮤직비디오 너...............무예쁨 !!!!! 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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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 근래 듣고있는 10cm의 유난히 가사가 좋은 good night. 밤, 잠. .
현재 4/21 0243시, 이유있는 불면으로 밤을 샐 듯 싶다. 쏟아지는 기사들에 허무할 뿐이고, 느릿하던 카페도 놀란 사람들로 붐비어 서버 다운. . 그야말로 한도초과이다. 머릿 속에 우주를 넣어때 꺼낸 듯 한 두어시간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밤은 까맣고 조용하기만 하더라. 고개를  들어 세상을 똑바로 보라던, 잡 설들에 휘청이지 않도록 정신을 가다듬는다. 급 속도로 쏟아지는 글들이며 기사들, 수 만명이 소설을 쓰고 있다. 읽을 필요도 없을 뿐 더러, 부추겨서는 않되는 글들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는 인터넷의 공간. . 한 걸음 물러서서 시간이 가라앉힌 진실만을 읽으리. . 
솔직히 나는 비교적 냉소적으로, 덤덤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그의 나이 40이고,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함께 생활한다는 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당연한 일이고, 충격이라기엔 너무나 기쁠 일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니. . 정도 모르고 토해내는 루머들, 역겹다. 앞뒤도 맞지 않는 기사들에, 혼란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그 와중, 정치적 소식을 덮으려는 양치기소년 언론의 수작 플레이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간 국민들이 얼마나 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단 의심해야하는 언론의 보도들, 연예스캔들에 바로 정치기사로 눈이 간다는 사람들 - 다행인지 안타까워야하는지, 감정이 복합적이다. 물론 실속있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도 물론 많다. 어디나 옳음과 옳지 않음은 공존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한 단면만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지금 관심을 안고 있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언론을 이용하고 농락하는 더러운 기자들의 펜이다. 속이 상한다.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이더라도, 이러한 농락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추측인지, 거짓인지, 오해인지 알 수 없지만,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기자들은 기자의 자격이 없을 뿐 더러 인격의 저질이다.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어떠한 목적을 취하려는 이들의 속이, 싫다.
나의 벽에 붙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 그를 연예인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연예인 - 그를 어떠한 인물이나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의 음악과 공연, 사상들을 나에게 기운을 주는 에너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멜로디, 가사, 철학, 삶의 방식들 - 나에게 허용된 범위 내의 그의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하고, 무엇보다 큰 위로를 받았고 늘 그러하다. 나에게 소중한 덩어리, 그의 음악을 듣던 시간, 글을 읽던 시간, 위로 받았던 기억들, 감사하는 마음, 우리가 함께 모여 그라는 것을 공유 할 수 있도록 시발점이 되어준, 한 시대의 사상을 그려준, 나에게 동경을 알려준, 그 기운의 에너지의 덩어리가 부디 어디에서든 편안한 마음이였으면 좋겠다. 그 뿐이다, 그가 편안 할 수 있었으면. 그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듯, 나 또한 어떠한 에너지의 일부가되어 위로이고 싶다.
혼란의 폭풍이 지나고, 시간이 사실만을 정화하여 주었으면 바래본다, 느린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며.


10cm good night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고요하고도 거친 밤공기, 바람소리, 달빛에
너의 평화롭진 않았을 것 같은 어지럽고 탁한 긴긴 하루, 너의 새벽, 빈 창가

나쁜 기억에 아파하지 않았으면, 숱한 고민에 밤새우지 않았으면
Mmm good night

또 나쁜 꿈에 뒤척이지 않았으면, 빗물소리에 약한 생각 않았으면
팔베개, 입맞춤, 따뜻한 한 이불, 나긋한 숨소리, 이젠 함께 아니지만
눈물과 외로움, 슬픔과 괴로움, 하얗게 지운 듯 깊은 잠 예쁜 꿈속에
Mmm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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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의 첫 날이여서 신났다. 하지만 보다 기이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이 폭풍왔다. 일단 아침 - 문자가 왔다. 즐거운 첫 날 보내라고. 아이 감사해라. 카카오톡도 왔다 - 어디냐구, 카페테리아에 혼자 있다구. 첫 날 부터 나를 찾다니, 구여운 녀석. 수업에 간다, 친구와 앉아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났다, 다른 친구가 잘 지냈냐고 묻는다. 다른 친구는 라이드 해주면 밥사주겠단다. 계획에 없던 밥을 먹고 배부르다. 다음 수업에 가니 친구가 LA에 다녀왔다며 목도리를 사왔다. LA에서 목도리를 사는 녀석을 이해 할 수 없고, 녀석의 취향도 이해 할 수 없지만 왠지 이상하게 고맙다. 운동 갔다 집에가니 고모가 밥을 주신다. 밥을 먹고 있자니 밥 사주겠다는 전화가 온다. 이미 먹었다고 하며 다음 기회로 패스. 숙제하고 놀다가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어제 함께 영화를 본 친구가, 영화 ost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어제도 밥, 영화를 얻어보았다. 그건 space needle 입장료는 내가 냈으니 얼추 비슷한 셈이지만. .아니 왜들이러시나. . 나에게 친구가 이렇게나 많다니 ㅡㅡ 이상할 정도다. 친구가 아닌 지인이라고만 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의 생활은 찐따인 줄 알았는데. . 글을 쓰는 와중 필리핀에서 전화가 왔다. . 왜들이래 정말 - 날 너무들 사랑하신다 허허
오늘 아침, 와있는 문자 5통. 요즘 기이한 것이 확실하다 - Random으로 틀어논 음악에 Switchfoot 의 You가 나오고 있다. 제주도 캠프적 하버드 졸업생이였던 친구가 생각난다. 음악마다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참으로 기이하지만 멋진 일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떠오르지만, 매 번 그 음악에 그 친구가 생각나고, 그 당시 나의 모습과 그 곳의 풍경이 떠오른다는 것, 그 만큼의 추억이 있다는 것 - 감사해야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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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중순의 햇살 가득했던 오후


Oh sun of spring, where art though - the clouds are in attempt of my murder.
아아아 어제는 해가 떴건만 오늘의 구름은 나의 죽음을 노리고있다. 3월의 말 - 산 속의 역동적 연둣빛 봄의 생기를 일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회색 구름과 선선한 카페의 공기는 봄보다 겨울의 것과 흡사하다. 태양계의 에너지, 기운의 원천인 태양은 왜 연약한 빛으로 나를 비추는가. 녀석의 뜨거운 폭발과 열정은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입안의 모래밭은 다행히도 사라졌다. 보다 의식적이고 나쁘지 않은 주말을 보내고있다. 다만 온기가 많이 그리울 따름 -
어젯 밤 왜인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정석과 같은 감정을 느꼈고 나를 '웃게'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약국을 보며 허무함을 느꼈고, 스타벅스 키크신 바리스타 그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 남의 피자를 빼앗아 먹는다 - 웃기는 사람이다. 또한 어제 성당 미사가 끝난 후 양말 그는 Adagio 를 건반으로 연주하는 환상을 선사했고,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 아 - 참으로 괜찮은 주말이 아닐 수 없다. 데니스 카일 크리스 -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을 좋다 - 늘 그랬다. 시끄러운 것은 마구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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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취향으로 가득한 카페를 차리는 꿈은 - 많은 이들의 꿈이다. 나 또한 같은 꿈을 꾼다. 이름도 지었다  L'delicione 크 - 어제 L'apartment 를 보고, 방금 지은 것이다... 바뀔 확률은 99%정도로 적당히 잡자.


책 - 과학, 환경, 철학 위주, 소설 사양, 대여가능, 장르불문 기부환영
음식 - 미정 (가장 중요)
차 - 커피 사양
음악 - 멜로 일렉트로닉, 소프트 락, 하드코어 헤비메탈 롹 월요일, 서태지 꺄
면적 - 30평 이내, 공간의 활용을 보여주마, 붙어 붙어 모여 모여
인테리어 - 미정
직원 - 외모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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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정현철) / 가수
출생 1972년 02월 22일
신체 키173cm, 체중55kg
팬카페 서태지
상세보기

http://hiphopplaya.com/bbs/bbs/viewbody.html?code=bbs_3&category=43&page=1&sort=&number=790249&s_block=&keyfield=subject&key=%EC%84%9C%ED%83%9C%EC%A7%80
이 하 글은 저의 것이 아니며, 글 중 색이 다른 글들은, 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제가 변경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원본은 위 링크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서태지의 본명은 정현철입니다.

1972년 2월 21일 서울에서 1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나이로 벌써 40세네요..) 머 어린시절은 어땠는지 떠도는 소문에는 많은 일화가 있지만, 제가 그의 어린시절을 못봤기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구요 ㅋㅋ

14살때인 그러니까 중학생때겠죠? 1986년 학교 동아리쯤 되는 하늘벽이라는 밴드의 베이시스로 처음 음악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87년에 하늘벽을 나와 활화산이라는 밴드에서 활동을 했죠.

그렇게 어린나이에 인디밴드 활동을하다가, 서울 북공업고등학교 (당시 공고 출신이라면 공부 지지리도 못했었던거죠) 1학년 때인 1989년 인디밴드 활동을 하가 알게된 이중산씨의 소개로 당시 최고의 Rock그룹인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시나위라하면 들국화, 부활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밴드였었죠)

이와동시에 서태지는 당시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게 되는데요, 이유는 음악에 좀더 몰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90년 밴드맴버들간의 음악적 견해차이로 시나위가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홀로된 서태지는 여러가지 음악적 실험을 하게되는데요, 당시 심심풀이로 미디음악(컴퓨터음악)을 배우던 도중 1집 발표곡인 난알아요, 환상속에 그대등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 후에 만든 음악을 가지고 국내 가요계에 문을 두들기려고 같이할 맴버를 찾던도중, 당시 최고의 춤꾼이었던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1992년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게됩니다. 그때 서태지의 나이 20살, 양현석 22살, 이주노 23살 때였죠.


[ 서태지 신화의 시작 ]

서태지와 아이들 1집 (Seotaiji & Boys I ) - 1992년 음반판매량 170만장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의 앨범을 발매하고 데뷔를 하는데 당시 MBC의 특종 TV연예라는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게 됩니다.

이 특종 TV연예란 프로그램은 당시 무명의 신인 가수들이 무대에 나와 자신들의 음악들 들려주고, 패널들의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이 무대에서 난 알아요를 부르게 됩니다. 사실 이때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소방차를 연상시키듯이 세명의 젊은이가 찟어진 청바지와 원색적인 옷, 아무렇게나 눌러쓴 모자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나와, 격렬한 춤과 알아들을 수 없는 랩에 익숙하지 않은 리듬의 노래를 불렀죠.

당시 심사위원들은 난 알아요를 듣고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랩 스타일의 댄스뮤직인데요, 일단 리듬이 되게 상당히 좋네요. 그런 반면에 멜로디 라인이 약한것 같네요.아무래도 랩을 하다보니까 멜로디 부분은 많이 다른 곡보다 훨씬 좀 신경 안쓴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작곡가 하광훈-

"랩댄스 장르곡인데 거기에 메탈 리듬이 들어가있네요. 새롭고 다 좋은데, 나쁜말은 안하겠어요. 평은 시청자 여러분들이 하는거니까 그 분들께 맡기겠어요." - 가수 전영록 -

하지만, 이 노래는,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이라는 그룹은 이 방송으로 인해 대한민국 음악 역사상 가장 센세이션(Sensation)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었습니다.

앨범이 발표될 당시인 1992년의 대중음악은 발라드 일색의 판도에 발라드 리듬에 비트를 빠르게 한것 같은 단순한 댄스 음악(요즘 같은 댄스음악의 기준이 아닌 그냥 조금 빠른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음악) 이 주류였습니다.

당시 가요계의 주류를 이루며 활동했던 가수들을 보면 댄스가수로는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 등이, 발라드 가수로는 신승훈, 이상우, 변진섭,이선희, 심신, 이덕진, 등이었습니다. (참고로 이들의 노래를 한번쯤 들어보시면 당시의 음악이 어땠는지 아실 수 있을것 같네요, 그럼 난 알아요와 어떻게 다른지도 아실 수 있을꺼에요)


사실 참 좋은 가수들이었고, 인기도 많았었지만, 이들의 노래는 말 그대로 유행가였고, 좋은 노래였지 대중들을 열광하게 하는 노래와 모습은 아니었었습니다.

당시의 가요라함은, 따라부르는. 그리고 TV에서만 보고 즐기는 그런 수동적인 모습이었는데요, 지금처럼 10대들의 열광도, 능동적인 참여도 볼 수 없었죠. (물론 당시나 그 이전에도 조용필씨나, 부활같은 가수들은 원조 오빠부대를 몰고는 다녔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국한된 모습이었죠)

그러다보니 10대와 20대가 가진 열정이나, 그들의 욕구를 분출할 기회가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이야 튀어야 산다라는 말이 정석으로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튀면 죽는다 그저 중간만 가라는 말이 정설이었던 시대였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10대와 20대들은 그들의 욕구와, 열정을 분출할 곳을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대한 일부분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바로 몇달 전인 1992년 2월에 일어났는데요. 바로 그 유명한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사건입니다.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은 당시 미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써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신화 같은 그룹이었다고 할까요?) 미소년 같은 외모와 춤, 그리고 신나는 노래로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인기를 달리고 있던 그룹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1992년 2월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열었었습니다.

당시 이 공연을 보기위해 20000여명의 여학생들이 공연장을 찾았는데, 열광을 넘어선 광란의 현장이었습니다. 가요계 역사상 초유의 광란이 벌어진거죠. 이때문에 공연 시작 20여분만에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습니다. 이 와중에 200여명이 넘어지고 그로인해 100여명이 부상, 그리고 1명의 여고생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동안 풀곳이 없어서 쌓여왔던 10대와 20대의 욕구가 한번에 폭발한거죠.

그만큼 당시의 젊은이들은 알게모르게 그들만의 문화에 목말라 있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연일 각종 뉴스와 신문에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대한 걱정과 질책에 이어, 외국문화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탄식과, 자책이 어어졌고, 고작 외국가수 하나가 와서 일으킨 소동에 대한, 어른들의 부끄러움이 깊어질 즈음...

한 TV프로그램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게 된것입니다.

정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었습니다. 어른들과, 전문가들은, 그저 이상한 아이들과 이상한 음악으로만 흘겨 넘기고 말았는데, 말 그대로 그 방송 이후 레코드점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있어요 라는 질문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그 흐름은 곡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음악, 그리고 처음 접해보는 패션, 자유스러움.. 그 모든것은 10대와 20대를 열광시키기 충분했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거리는 이른바 서태지 패션을 한 사람들로 넘쳐났고, 길거리를 갈때마다 난 알아요가 흘러나왔었죠. '서태지 신드롬' 이라는 말까지 등장을 했을정도니까요.

이때부터 10대는 더이상 사회의 왕따가 아닌 주역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열광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이상 튀면 죽는다가 아닌 튀어야 산다로 인식의 전환이 되었고,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으로 인한 어른들의 부끄러움을 일거에 날려버린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서태지란 이름에 관용스러워진 어른들 덕에, 서태지 때문에 라는 말로 10대들의 이른바 튀는 행동들이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10대들을 '신세대'라는 말로 부르게 됩니다.

이당시 인기는 정말 상상을 할 수 없었죠... 10대부터 60대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알고 '난 알아요'를 알았으니까요. 지금 10대들이 아이돌 그룹을 보며 하는 모든 것들이 이때 처음 생겼습니다. 팬클럽, 오빠부대 (물론 그 전에도 조용필씨나 다른 가수들도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죠)

여튼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대한민국 문화의 흐름을, 가요계의 판도를 180도 바꿔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가요계나 사회에서 가요의 역사를 말할때 "서태지 전이냐 후냐"라는 구분법을 쓰는데 그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 1집의 난 알아요와 환상속의 그대는 각 방송사의 가요 순위프로 모두 5주연속 1위를 기록했었고 , 1집의 모든 수록곡이 TOP10 안에 진입했었죠.

그리고, TV저널 올해의스타상 수상 ,서울가요대상 최고인기상 수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골든디스크상 수상 , MBC 최고인기가요상 등 그해 가요계 상을 모두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앨범은 한국 가요계 역사상 데뷔앨범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7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극히 외적인 모습들 이외에도 서태지를 서태지답게, 또 그냥 한번 불다 스러져갈 서태지를 지금처럼 만든 이유와, 다른 모든 가수들과 비료 자체를 거부하는 (서태지 팬들이 HOT, 신화, 동방신기나 슈퍼쥬니어 같은 그룹과 비교 자체를 하는걸 기분나빠하는 이유)

절대적인 존재로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그의 행보와 또, 가장 중요한 음악성이죠.

먼저 1집당시 그의 행보를 잠깐 볼까요?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지금이야 가수가 노래를 발표하면 뮤직비디오가 당연히 따라오고 각종 매체에서도 뮤직비디오를 많이 활용하지만, 당시의 뮤직비디오는 막 그대로 그냥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였습니다. 어떠한 연출도, 효과도 없이 말 그대로 그냥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죠.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뮤직비디오에 연출과, 효과라는 옷을 입혀 부수적인 모습의 뮤직비디오가 아닌 또하나의 표현 도구로 삼았습니다. 말 그대로 뮤직비디오의 대중화였죠.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의 가수들이 뮤직비디오에 좀 더 정성을 두게 되었습니다.


가수의 권리찾기 싸움
당시의 가수들 기획사의 꼭두각시나 다름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수 본인의 동의없이 매니저나 기획사 사장들의 독단에 의해 모든일이 정해지곤 했죠.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본인들이 직접 참여해서 만든 뮤직비디오 이외에 매니저와 기획사가 본인들의 동의없이 편집한 뮤직비디오를 멋대로 시중에 발매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저작권 침해로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소했습니다.

당시로써는 정말 해서는 안될 불문율이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가수가 기획사를 고소한다는 일은 말이죠. 가수는 음악의 생산자이지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이러한 그의 신념은 지금가지도 끝까지 고수하는 그의 신념입니다.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당시나 지금이나 가수는 기획사에 고용된 고용인이나 마찬가진데요. 당시 서태지는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도입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시스템이 가수의 권리를 좀 더 보장하기 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한 가요계의 변동으로 인해, 서태지와 같은 그룹들을 만들어 파는 기획사가 난립하게되었고 덕분에 서태지처럼 뜰 수 있다는 그들의 조건 때문에 오히려, 기획사의 노예같은 그룹들이 지금까지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위에서 말한 그 모든 것들로 인해 서태지는 유명해진다는것을 떠나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부각되었는데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류의 아이돌을 만들어 낼 수 있어도 서태지 같은 뮤지션은 만들어낼 수 없다는 이유와 일맥 상통합니다.


서태지를 서태지로 만든 이유

대만민국 가요계 역사상 매번 음악이 발표될때 마다 가장먼저 감상보다는 분석에 들어가게 하는음악, 한번의 10명이 넘는 평론가가 평론을 발표하는 음악. 장르분석터, 각 악기의 연주과 연주형태, 멜로디의 구성, 녹음상태, 하다못해 음절 하나하나까지 분석을 하게 만드는 그의 음악 바로 음악성이죠.

먼저 서태지는 진정한 싱어송 라이터(Sing-Song Writer)이자 뮤지션(Musician)입니다. 요즘이야 워낙 자주 쓰는 말이 됐지만 진정한 의미의 싱어송 라이터 및 뮤지션은 현 가요계에 많지 않습니다. 한 앨범중 멜로디 라인 하나 작곡하고, 또는 앨범 하나에 그냥 곡수 채워넣기로 자신이 만들었다고(사실 어느정도 만들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죠) 광고하는 일부 가수들과는 분명한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서태지의 전 앨범은 서태지가 혼자 직접 작사/작곡/편곡/프로듀싱 을 모두 했습니다.

(초기 서태지의 앨범을 보면 작사 작곡에 정현철이라고들 써있어서 서태지가 한게 아니라는 말들이 있었는데요 정현철은 서태지의 본명입니다.)

데뷔앨범인 1집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입니다.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꾼 앨범, 한국에 진정한 댄스음악을 등장시킨 앨범 등등등......

고교 중퇴, ROCK 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청년이 20살에 처음으로 습작처럼 발매한 이 앨범속에는 METAL, ROCK, TECHNO, DANCE , SYNTH-POP, HIP-HOP, R&B, MIDI MUSIC 등 한 가수가 하나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각기 다른 장르가 모두 서태지의 손에 흡수 재창조 된 최초의 음반이었죠.

단순히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음악이었기에, 또 획기적이었기에 서태지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게 아니라, 곡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그의 음악성과, 특별함이 있었기에 서태지의 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집 발표후 한창 주가들 올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느날 돌연히 모든 방송 및 언론에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서태지 그 신화의 재확인]


서태지와 아이들 2집 (Seotaiji & Boys II) -1993년 --음반판매량 210만장


정말이지 대한민국 음악 역사상 초유의 폭풍을 몰고온 데뷔앨범을 뒤로하고 어느날 돌연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모든 방송 및 언론매체에서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지금이야 한 앨범의 활동을 끝내고 다음 앨범이 나올때까지 방송을 쉬는게 당연한 일인것처럼 되었지만, 당시에 가수가 활동을 접는다는건 정말 상상도 할 수없던 일이었습니다.

10년차가 됐건 5년차가 됐건 아무리 쉬고싶어도, 방송사가 부르면 바로 나가야되는게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이제겨우 데뷔한지 8개월도 못되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느순간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인기가 거의 최절정을 달릴때 말이죠. 한 앨범으로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상태라면 다른 앨범을 위해 과감히 활동을 접고 새 앨범 제작에만 몰두해서 완성도 높은 음악을 팬들에게 들려주자는 위도였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동안 방송사에 찍히기가 두려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93년 6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2집을 발표하고, 컴백을 하게됩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소식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는데요, 각 매체 및 언론, 그리고 9시 뉴스에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소식이 주를 이루었었습니다.

당시 서태지의 등장이후, 가요계는 노이즈, 잼 등 이른바 서태지류 랩댄스 그룹이 속속 등장을 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1집 때와 같은 랩댄스를 들고 나왔을 것이라는 예상하고 TV앞에 앉았었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인연은 특별히 이어지고 있지만. 자신들이 데뷔했던 MBC를 통해 그 모습을 처음 선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놨죠.

형형색색의 의상과, 상표달린 모자를 상상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깨버리고, 헐렁헐렁한 바지와 전반적으로 DARK한 의상, 장신구, 레게파마.... 국내 대중에게 처음으로 HIP-HOP이라는 장르를 선보이게 된거죠(물론 HIP-HOP이 국내에 아예 없었다는건 아니죠 언더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듣거나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씩 존재는 했었습니다.)

그리고 '난 알아요' 이후 유사 댄스가요에 귀가 익숙해진 대중에게 들린 또다른 충격 '하여가'. 랩댄스를 대중에게 알린지 1년만에 다시한번 서태지는 힙합을 대중에게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언론과 서태지와의 싸움은 시작되었죠.

그 전까지 방송사와 언론사의 부름(?)에 당연히 달려와야 할 가수가 '감히' 그들을 무시한채 잠적해 버린 괘씸죄라고 할까요?

지금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힙합패션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이유로 KBS에서 출연금지조처를 당하고, 중세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국민일보 사설 를 비롯하여,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매체가 서태지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서태지는 그들의 음악이 힙합 이기 때문에 그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당연한 자유라는 이유로 그 모든 사냥을 무시했습니다. 언론사의 서태지 죽이기가 극에 달하는 것과 반대로, 오히려 대중의 호응과 열광은 1집때보다 더 그 열을 올렸었습니다.

거리에는 래게파마를 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힙합패션은 대한민국 유행 트랜드가 되었죠(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속 의류사는 200%가 넘는 매출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하여가는 거리마다 들리게 됐고, 그들의 앨범은 발매 2주만에 100만장을 넘었습니다. 그와함께 2집 하여가에 대한 평론가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호평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언론사들은 서서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죠. 이 덕분에 이 이후의 가수들이 그들의 표현에 대해서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앨범은 국내 최초로 더블밀리언셀러(200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으며,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차트 1위를 휩쓸었고, 아시아뮤직패스티발 한국대표 참가,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SBS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기획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인기가수상 수상, MBC 10대가수가요제 대상, KBS 가요대상 대상 등 음악적으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당시 일본에서 음반을 내고 정식으로 진출을 준비하는 협상을 시작했는데요, 편곡문제와 일본방송,콘서트의상문제..가장 크게는 일본어로 녹음하길 요구하는 소니사와 한국노래는 한국어로 불러야 한다며 한국어를 고집하는 서태지사이의 의견차이로 일본진출을 포기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1집때와 같이, 가수의 권리찾기 일환으로 당시 유행했던 불법사진집과 사진의 무단도용 (책받침 사진이라던지 ㅋㅋ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수로써는 최초로 초상권, 저작권등에 대한 확실한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즉 가수의 동의 없이 찍은 사진의 유통 및 상업적 활용을 막았으며, 각 언론사 및 상업적 이용에 관한 모든 사진들은 가수 측에서 직접 제공하는 이른바 이미지메이킹 시대를 열었습니다.

서태지의 2집은 1집때의 돌풍을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서태지를 다른 가수들과는 다른 '존재'로써 자리매김하게 했고, 서태지의 팬들을 '특별한' 팬덤으로 만들게 되엇는데요, 이 앨범에서 IDOL에서 MUSICIAN 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혔습니다.

물론 그 모든 이유는 바로 그의 음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음악, 음악의 퀄리티화 그 창의성 그리고 완성도..... 개인적으로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 앨범이 댄스음악을 하는 서태지의 모든것을 보여준 일생 일대의 역작이라고 말하는데요. 그건 바로 앨범에 담긴 음악의 퀠리티화 그 창의성 그리고 완성도 때문이었습니다.

서태지의 2집은 자신이 만들었던 랩댄스 음악의 주류를 다시한번 파괴하고 다시 새로운 음악적 트랜드를 유행시킨 앨범입니다. 서태지를 최고의 가수로 인정시킨 음반이자, 위에서도 말했지만, 서태지가 댄스가수로써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것을 보여준 음반이죠.

METAL을 베이스에 깔고 국악과의 하모니를 이루어낸 HIP-HOP, TRIP-HOP 풍의 TECHNO RAVE, GROOVE POP, DANCE BALLADE, JAZZ...

1집때와는 전혀다른 음악, 전혀다른 모습.. 이때부터 서태지=도전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등식은 신세대들에게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잡았습니다.

"신세대를 대변하는 서태지, 서태지는 늘 새롭고, 도전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서태지를 대변하는 신세대 또한 새로워야하고 도전을 즐겨야 한다." 는 관념이 생긴거였죠.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시 1집때와 마찬가지로 잠적을 합니다.(머 이제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서태지....... 뮤지션에서 문화대통령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Seotaiji & Boys III ) -1994년 음반판매량 120만장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고 2년...

대중음악계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수동적인 문화의 수혜자였던 10대와 20대들이 대중문화의 전면으로 나서게되고, 그로인해 대중음악의 부흥기라는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서태지의 등장 후 그와 같은 형태의 싸구려 댄스그룹들은 서태지의 2집 발표 후, 단순한 음악 형태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벗지못하고, 음악성의 문제를 들어내며 사라져갔죠.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단순한 댄스와 발라드에서, 그가 도입한 힙합, 댄스, 그리고 단순한 발라드가 아닌 좀 더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발라드와 K-POP 등 각종 다양한 장르에서 신승훈, 김건모, 듀스 같은 진정 실력있는 가수들이 그 능력에 맞게 대중들의 환호속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서태지는 잠적을 마치고 3집을 발표했습니다.

사실, 3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 가장 음악성이 높았으나 판매량은 가장 적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이 3집 부터 서태지는 더이상 가수, 음악인 서태지가 아닌 대한민국 인물사상 가장 많은 논란과, 언쟁을 야기시키는 사회의 서태지로 바뀌게됩니다.

이 앨범을 통해 서태지는 그 동안 자신을 가두어 놓고있는 댄스 뮤지션 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본인 음악의 뿌리인 ROCK으로의 회귀를 갈구한 음반이었습니다.그 일례로 이 앨범에는 댄스곡이 단 한곡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열광의 서태지에서 안티 서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었죠 그 전까지의 서태지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음악과 장르를 절묘한 형태로 결합 재 창조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인으로 모든이들 존경하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ROCK으로의 귀향을 결심한 그의 음악은 더이상 새로운 댄스곡의 창출이 아닌 완성도 높고 새로운 ROCK음악의 생산이었죠.

다시말해 ROCK으로 돌아간 서태지에게 더이상 그 이전의 획기적인 댄스음악을 볼 수 없었다는 이유와, 서태지가 만들어낸 IDOL 댄스그룹들의 난립이 서태지의 그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에 이미 댄스음악에 귀를 채워버린 대중에게 새로운 댄스음악이 아닌 ROCK은 오히려 '서태지는 더이상 새롭지 않다.' '다른이들의 댄스음악이 더 듣기 좋다.'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기 시작했고, 이 빈틈이 너무나도 거대해진 서태지에게 반기를 든 이들로 하여금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3집 철저해부라는 명목아래 대중음악인에게는 거의 전무후무한 정말 해부같은 분석들을 각 언론사에 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대중음악 역사상 서태지처럼 각 일간지 및 잡지등에 노래 한소절한소절까지 분석하고 비평한 가수는 유일하리라 생각됩니다.) 이미 더이상 서태지의 음악은 순수하게 그냥 듣는 차원에서 떠나 분석과 비평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거죠.

이로인해 이른바 사탄설이 퍼지기 시작했는데요, 서태지노래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있다는 괴소문이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서태지의 노래테이프를 분해한 후에 롤을 반대로 바꿔 끼운 후 카세트에서 '교실이데아'를 틀어보면 '피가모잘라' 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소문이었습니다.(저도 고등학교때 해봤던 기억이 나네요 ㅋㅋ) 이때문에 서태지는 사탄이다 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방송 3사의 9시 뉴스에 이 내용이 보도되었고,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었습니다.

이는 결국 MBC 뉴스데스크에서 교실이데아를 직접 돌려틀어 사실무근임을 밝혀낼 정도로까지 확대됐으며, 서태지의 부인에도 일부 음악가와 종교에서는 이 노래를 사탄 찬양노래로 지목하기까지 했으며, 서태지는 악마다라는 악마논쟁까지 벌어졌었습니다.

결국 이는 연말 연예계 10대뉴스로 선정까지 됐었습니다.

물론 조금 지난 후 오해는 풀렸는데요, 이는 서태지 팬들의 공로였습니다. 사실 서태지 팬들하면 극성맞기로 유명하잖아요, 근데 그 중 장점은 그 계층이 너무 다양하고, 또 논리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팬들은 노래의 각 음절 한 단위까지 분해한 후 분석을 했으며, 이를통해 '피가모잘라'라는 단어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밝혀 냈고, 거기에 더불어 심리학자들로부터 암시(즉 인간이 듣기 어려운 형태의 음악이나 언어의 경우 누군가 이건 이거다 라고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냥 그 단어로 들린다는)성 루머라는결과까지 받아내 논란을 종식시켰죠.


이 사건과 더불어 서태지의 노래는 또다른 측면에서 사회의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건 바로 메세지였습니다.

그동안 대중가요는 사랑이야기가 전부였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3집 수록곡의 가사와 내용들을 보면 발해를 꿈꾸며는 통일을, 교실이데아는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교육 현실을, 제킬박사와 하이드는 마약남용을 이야기 하는등 수록곡 전체가 사회를 향한 메세지를 담았습니다. 이후 10대들은 통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교실이데아는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로인해 사회적으로 교육현실에 대한 집중조명이 다뤄지게 됐었죠.

이로인해 '서태지 담론' 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94년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써는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음악 자체는 이미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그 외적인 것들이 이슈가 되었던 어찌보면 최악의 한해였죠.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점은 이미 음악적으로 그냥 듣고 즐기는 순수한 평가가 서태지에게서 사라졌다 해도 분명 이 앨범은 동시대의 어떤 가수들의 앨범보다 실험적이었으며, 창작가로써 서태지의 모습과 고뇌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음반이었다는 것이죠.

3집은 전작들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요, 그건 댄스가수에서 Rock 뮤지션으로의 전향을 꿈꾸는 서태지의 음악에서 익숙치 않음을 느낀 대중의 거부감과, 서태지 스스로의 방황(?)과 고민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사실 이전 앨범이나 그 시대의 다른 국내뮤지션의 음반과 비교해 본다면, 가히 걸작이라 불릴 수 있죠.
Alternative Rock을 기본으로 Hard Core Trash Metal 그리고 뮤지컬 풍의 발라드(?)까지..


서태지 개인적으로는 분명 이전 앨범에 비해 가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나 음악을 표현하는 틀에 있어서 좀 더 발전된 음악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걸 표현하는 사운드 역시 최고를 위해,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로 미국 및 캐나다, 일본에서 앨범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는 사람들로부터 그의 음악성에 조금씩 딴지를 받기 시작한 기점이 된 음반 이라는게 참 아이러니 한 음반이죠..........
정말 많은 이야기속에 3집활동을 마친 서태지는 더이상 순수한 음악가가 아닌 나올때마다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다니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문화 전반에 걸쳐 논란이 되고, 그 영향력을 끼치는 본인이 원하지 않은 '문화 대통령' 이 되어져버린채 활동을 중단합니다.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서태지와 아이들 4집 (Seotaiji & Boys IV) -1995년 음반판매량 200만장

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컴백 이전 팽배했던 서태지에 대한 여론은 3집에 대한 실망감(?)과 그당시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서태지는 이제 한물 갔다' 는 시선이 많아졌었죠(물론 저역시도)
이미 3집의 실패(?)와 수많은 오해와 편견등으로 몸살을 앓던 그때의 컴백은 그동안의 등장과는 다른 사뭇 조용한 것이었죠.

당시 가요계는 이미 댄스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대였습니다.

개중에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실력있는 그룹들도 있었지만, 비슷비슷한 노래들을 불러대는 비슷비슷한 컨셉의 그룹들이 너도나도 댄스음악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서태지의 컴백쇼가 있던날, 다시한번 사람들은 역시 서태지라는 말을 할 수 있었죠

남들이 장장과 반짝이 의상을 입고 춤추며 노래했을때, 서태지는 형형색색의 개성있는 옷을 입고 랩댄스를 했으며, 남들이 형형색색의 옷을입고 랩댄스를 할때, 서태지는 힙합룩을 입고 힙합을 했으며, 남들이 힙합을 할때, 서태지는 펑키 스타일의 옷을 입고, 얼터너티브를 했습니다.

그리고 95년.. 남들이 그동한 서태지가 해왔던 것들을 할때, 서태지는 스노우보드룩을 입고

갱스터랩이라는 장르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4집 컴백홈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0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3번째 더블밀리언셀러가 됐었습니다. (첫번째, 서태지 하여가 두번째 김건모 잘못된 만남, 세번째 서태지 컴백홈)

전과같은 빛을 보지 못할꺼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서태지의 컴백홈은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독차지했으며, 거리는 스노우보드룩 천지가 됐었습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의상 협찬사인 STOM은 덕분에 매출이 200% 넘게 상승했었죠.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 안무는 중, 고등학교 축제때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됐었습니다.(당시에 저도 그옷 입고 했었다눈...)
거기에 더불어 가출한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컴백홈을 듣고 실제로 가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면서, 그야말로 '서태지가 하면 된다.' 라는 인식과 함께 3집에 이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서태지에게 진정한 '문화대통령'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됐었습니다.

그리고, 이당시 황동중이던 서태지에게 가장 큰 두가지 사건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대표곡인 컴백홈의 표절논란과, 공연윤리 위원회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대표곡이었던 컴백홈에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미국 정통 힙합 장르중 하나인 Gangsta Rap(갱스터랩)이었는데요, 랩을 씹는듯이 딱딱 끊어서 하는게 특징인 장르였습니다. 미국의 Cypress Hill(싸이프레스 힐) 이라는 그룹이 이 장르의 대표주자 였는데, 누군가 이 그룹의 음악과 컴백홈이 유사하다며 표절의혹을 제기하고, 그게 또 사회 전반으로 퍼져 언론에서 화제가 됐었죠. 그리곤, 표절이라는 문제가 다시 사회의 전반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일 언론과 사회에서는 표절이네 서태지측과 팬들은 장르의 스타일일뿐 표절이 아니다의 논쟁이 계속되었는데요, (얼마전에 표절 40곡인가에 또 올라왔었죠..) 여기에 서태지측과, 광분한 서태지의 팬들이 서태지의 앨범을 직접 미국의 Cypress Hill(싸이프레스 힐)에게 보냈는데요.... 얼마 후 공식적으로 원곡자인 Cypress Hill(싸이프레스 힐)로부터 "표절이 아니다. 이건 Gangsta Rap(갱스터랩) 고유의 스타일이다." 라는 답변을 받아냈었습니다. (하여간 서태지 팬들도 할일 디럽게 없습니다 ^^)

두번째 사건은 저 유명한 공연윤리위원회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건 한국 가요계에 커다란 업적이자 공로중 하나인데요(물론 이 이전에도 많은 가수들이 싸웠었지만 말입니다. 결국 해낸게 서태지다보니...)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당시만해도 대한민국에서 발표되는 모든 음반은 번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이하 '공윤'이라고 줄여부르겠습니다)라는 곳에서 부적절한 가사가 있는지 먼저 심사를 한 후, 통과해야만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었던 어이없는 사전심의제도라는 법이었죠. 그런데 앨범이 발표되기 전 이 공윤에서 서태지의 4집 앨범중 시대유감, 컴백홈, 필승의 가사가 문제가 됐었습니다. 시대유간은 당시 사회에 한창 팽배해있던 기성세대들의 부패와,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비판한 내용이었고, 컴백홈은 가출청소년들의 문제를, 필승은 실연의 아픔을 노래했는데요, 가사가 부적절 하다며 교체 및 삭제를 요구했었죠.

그러나 서태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며 시대유감의 경우 아예 가사 전체를 빼버리고 연주곡만 앨범에 실었으며, 나머지 곡들은 바꾸지 않은채 그냥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자 공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앨범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이에 시대유감의 가사가 공윤때문에 빠진 일과, 공윤의 고발사건을 알게된 팬들은 국회에 탄원서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이게 됐었죠. 이 서명운동과 탄원서를 계기로 사상 초유로 한 가수의 노래가사 때문에 국회 진상규명위원회가 열렸고, 한 대중음악 스타의 일이 국회로까지 가는 사상 유례없는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6년 6월 7일 서태지는 은퇴를 했지만, 그 팬들의 끈질긴 싸움끝에 드디어 공윤은 사전심의제도를 철폐했습니다.

가수가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두 세력인 방송과 공윤 이 두 거대 공룡과의 싸움에서 서태지와 그의 팬들은 결국 승리를 이루어냈었습니다. 그리고 그덕에 그 이후의 가수들은 사전심의라는 제약없이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가사표현을 할 수 있게되었죠.

서태지=새로움 이라는 공식을 세워버린 후 매 앨범마다 당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장르들을 도입하고, 또 재 창조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서태지에서, 서태지는 새로워야 한다는 이상한 등식을 대중은 서태지에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작들을 통해 20여가지의 장르를 모두 섭렵하고 당시 대한민국에 퍼지지 않은 그 장르들을 대중에게 알렸던 그에게 더이상 새로워야만 한다는 대중들의 무언의 압박은 은퇴시 말했던 창작의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떠나기로 결심을 했죠. 그 결심과, 그동안 서태지 자신이 추구했던 모습에 대해 정리한 마침표 같은 앨범을 마지막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무런 예고없이 하루전인 30일 언론에 다음날인 31일 은퇴 기자회견을 알렸습니다.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서태지는 미국으로, 양현석과 이주노는 각자의 길로....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소식은 정말 전 사회적인 충격이었으며, 각 방송사의 9시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었죠. 거기에 일부 팬들은 자살소동까지 벌이기도 했었습니다.

20살이었던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 그룹으로 시작해서, 말 그대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스타가 되어버린 서태지.
본인도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성원과 기대속에, 단지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기획사도 없이 홀로 방송국과, 사회와 싸워가며 보냈던 4년... 정말 20대의 젊은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국민적 관심을 뒤로하고 그렇게 일단!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서태지와 그의 팬들이 함께했던 공윤과의 싸움이 끝나고 가사없이 발표됐던 시대유감은 '희망을 찾아나섰지만 칼든 사람에게 토막난 채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물고기....그러나 날아오르는 꿈을 잃지 않는다'는 메세지를 담은 '토막난 물고기도 하늘 나는 꿈을 꾼다' 라는 주제로 가사를 채운채로 발매되었습니다.


[왕의 귀환 - 내가 하고싶은 대로]

서태지 솔로 1집 (Seotaiji Solo I) -1998년 ------음반판매량 130만장

2년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가버렸던 서태지가 1998년 아무런 모습도 나타내지 않고 몇줄의 이메일과, 한장의 마스터 시디를 한국으로 보내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서태지의 앨범발매에 부친 팩스 인터뷰 전문중에서

이번 앨범의 모든 곡들에겐 제목이 없다. Take One, Two... 이라는 것은 연작의 의미는
아니다. 그저 무의미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그 이유를 약간 설명하면 지금까지 여러 곡들을 만들면서 제목과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끔 제목이라는 것은 작품을 설명하기엔 어렵거나 또는 좀 왜곡 되어 보이는 느낌을 발견했다. 미술작품이나 음악을 최초로 접하게 될 때 그 제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느끼는 느낌이 진짜 느낌같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앨범에는 좀 색다른 시도를 해본 것이다. 이번 음반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의 음반이다. 음반을 내기까지의 많은 고민도 있었고, 음악을 만들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반을 내게된 동기나 과정 역시 예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었다. 여러 면에서 내겐 새로운 도전 같은 것이었다. 거두 절미하고 지금 나는 정성을 다해 하나의 음반을 완성했고, 이제 나의 팬들과 음악을 통해 다시 만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이후 가요계는 말 그대로 아이돌 그룹의 천국이요, 댄스음악의 시장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러한 서태지의 솔로앨범은 당시 그를 둘러싼 은퇴 번복에 대한 논란과 러닝타임 문제(총 28분)에 대한 논란들은 서태지의 이 앨범에 대한 이성적인 음악적 평가를 할 기회를 막아버렸고, 그것은 국내에 없었던 그에게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리에 반박할 기회마저 주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었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에 대한 비판의 핵심중 하나는 그가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악들을 남들보다 일찍 수입하는 일종의 '장르 수입상'으로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는 것인데요, 그의 솔로 앨범에 대해 온당한 음악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은 어느샌가 마치 비판자들에게 일종의 '정설'처럼 굳어지게 됐습니다.

이 앨범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댄스그룹에 얶매여 있던 서태지 Alternatice Rock이 아닌 진짜 정통 Alternatice Rock을 하고있는 서태지의 모습에서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그 정설을 다시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서태지는 데뷔부터 솔로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20여개가 넘는 장르들을 음악에 담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극 소수들만이 영위하는 그런 장르들, 하지만 편식적인 음악의 수혜자들만이 모여있는 귀가 닫힌 우리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음악적 문화가 열려있고 사랑받는 외국에서는 사랑받고 널리 알려져있는 장르들을 아무런 기초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들을 자신의것으로 만들었고 또, 우리 대중들에 맞게 재해석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사실 서태지 스스로도 그 주변인물들도 아무도 서태지가 창안한 장르라고 말한적은 없었죠. 대중들이, 언론이 단지 자신들이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었기에 멋대로 포장하고 추켜세웠다가, 서태지로 인해 발라드와 트로트일색이던 음악문화에서 힙합,Rock 등 좀더 다양한 음악들의 수혜를 받자 딴지를 걸기 시작한거죠 1년전에는 새롭다고 칭찬 일색이었다가, 1년이 지난 후 그 음악에 대해 익숙해지자, 배꼈다는 딴지를 걸기 시작한거죠.

이로인해 생긴 정설때문에 4집 이후의 음반들이 그 음악적 가치에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즉 대중과 언론들 스스로 무지해서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든 화살을 서태지에게 돌려버린거죠.

서태지에 대해 위처럼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악들을 남들보다 일찍 수입하는 일종의 '장르 수입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먼저 이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게 따지면 모짜르트는 헨델의 장르를 수입한 수입상이었고, 베토벤은 모짜르트의 장르를 수입한 수입상,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르를 수입한 수입상인게 되겠냐구요.. 대 작곡가들 모두가 수입상이었네요 ㅋㅋ
많은 논란속에 은퇴이후 2년만에 발표한 이 앨범은 은 Musician에서 Artist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이제 대중의 눈만을 위해 만드는 음악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하고싶은 음악을 하겠다는 서태지의 의중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란 의미와 함께...


[날 싫어하는 사람까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서태지 솔로 2집 (Seotaiji Solo II) -2000년 --------음반판매량 130만장

21세기의 시작인 2000년 8월 조용하던 가요계에 파란이 일어났었습니다.은퇴 후 4년 7개월 만에 서태지가 솔로 2집을 들고 모습을 들어낸거였죠.

당시 서태지가 입국하던 김포공항은 만여명의 팬들과 수백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됐었죠. 방송 3사의 9시 메인뉴스는 서태지 컴백이었고, 각 메스컴은 앞다퉈 서태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 7개월 이라는 시간이 무색할정도의 환영과, 관심속에 사회는 서태지와 더불어 그 긴시간동안 기다려온 서태지의 팬들에 대해 집중 조명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귀국후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서태지는 어떤 언론접촉도 없이 컴백무대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때문에 언론에게 또다시 찍히는(?)일이 벌어졌죠.당연히 귀국하자마자, 각 언론사와의 인터뷰와 방송 출연들등을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꼭꼭숨어서 사진찍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었습니다. 덕분에 신비주의 전략이다 머다 참 말들이 많았었죠.

서태지가 팬들 그리고 언론과 처음 만난것은 그의 컴백공연때였습니다.
서태지가 나타나자 언론과 퍈들은 그의 변신에 또한번 놀랐었죠. 귀국할때는 검정색 단발이었던 머리는 어느새 빨간 래게머리로 바뀌어 있었고, 서태지의 뒤에는 이제 그의 아이들이 아닌 밴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태지는 당시 홍대의 인드클럽에서나 행해지던 슬램, 해드뱅을 한국 대중 공연장에서 시도를 했으며, 그의 음악은 댄스가요와 발라드 일색이던 당시와는 정 반대인 아주 강력한 강력한 핌프록(Pimp Rock)이었습니다. 솔로 1집에서 정통적인 Alternatice Rock을 담았었기에 당연히 Alternatice Rock일꺼라고 생각했던 대중과 여론에게 완벽하게 한벙 먹였었죠.. 사실 우리나라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이 장르를 이미 하고있는 그룹들이 심심치않게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Korn과 Limp bizkit이 이 장르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죠 (물론 Rock 매니아들에게서 말입니다.)
이 공연은 서태지 컴백특집이라는 제목으로 MBC에소 독점 방송되었는데요, 한국방송사상 한 가수의 컴백을 개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방송하고, 그 공연실황을 방송한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서태지는 그의 음악인생중 아니 그의 한평생중 가장 많은 욕과 비판을 받았습니다.

첫번째가, 10대들의 무분별한 서태지 욕하기였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가요계는 HOT,젝스키스,조성모,GOD가 각각 세력을 구축하며,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때입니다. 서태지가 활동했던 당시 유치원생이었으며, 서태지가 은퇴할때야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그들이.....
당시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마련해놓은 팬문화가 어느덧 변질이 되어버려 각 가수들간의 경쟁구도를 넘어 내 가수가 아니면 적 이라는 일종의 전쟁터로 변질되어버렸던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모든 시선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아닌 잘 모르는 서태지라는 인물에게 편중이 되자, 그 10대들은 서태지를 '적'으로 판단하고, 온라인상으로 무차별적인 욕을해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파생된것이 지금의 '안티'문화였죠.

스스로 팬덤이라는 문화를 만들고 그에 반하는 안티라는 문화를 만든 서태지 ㅡ.ㅡ;
각 인터넷은 서태지라는 이름의 기사만 나오면, 그아래 서태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10대들의 무수한 악플이 쏟아졌고, 그 기류에 편승해 대한민국 인터넷 역사상 처음으로 아티 서태지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졌었습니다.

이후 이 감정은 한 합동 공연장에서 극에 달했는데요....

위에서 언급한 그룹들과 서태지가 함께한 공연장에서 한 그룹의 팬들이 서태지가 공연장에 나오자 쌍욕을 해대기 시작했고 그 장면이 한 방송사의 카메라에 잡히면서 꽤 논쟁꺼리가 됐었습니다. (그때 그아이 지금 대학생이 됐을텐데.. 아직도 그때 그가수 좋아하는지가 궁금하군요....... ㅋ)
이러한 흐름에대해 서태지는 한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신경쓸 생각이 없다. 내 음악이 좋은사람은 듣는거고, 싫어하는 사람까지 좋아해달라고 할 필요성을 못느낀다.'

두번째는 바로 언더밴드들의 서태지 공격이었습니다.
당시 서태지가 들고나온 음악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핌프록(Pimp Rock)이었습니다.
이 장르는 사실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이미 유행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인디밴드들이 홍대클럽등지에서 하던 장르였었죠.
이때당시 인디밴드들은 사실 불만이 가득할때였는데요, 가요계는 온통 10대 (당시에는 빠순이라고 불렀었죠)로 가득찼고, 가요계는 기획사에서 마치 상품처럼 만든 아이돌 그룹이 립싱크를 해가며 인기를 독식하고 있었으니까요.이러한 때에 서태지가 자신들이 어두컴컴한 공연장에서 몇년전부터 해오던 장르의 음악을들고 사회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게 되었던거죠. 그런 서태지를 인디밴드들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상업적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당시 몇몇 인디밴드들이 반 서태지 단체를 만들어 공연을하고 언론 인터뷰를 하며, 때로는 서태지를 본따만든 인형을 불태우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인터뷰에서 밝힌 반 서태지의 이유는 오로지 "서태지가 기성의 상업적인 가요계를 대표하는 사람이며, 그 가요계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태지라는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서태지로 대표되는 기존의 가요계에대해 공격하는 것이다." 라는것이었죠. ㅡ.ㅡ.........................

사실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이득을 본건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한창이던 서태지 논쟁에 끼어듬으로해서, 그들은 언론에 그들의 이름을 알렸고, 그들의 공연을 알렸죠. 일부 극소수 매니아들만 알았던 그들의 이름을 사회에 홍보하게된거였습니다.

더군다나 정작 공격했어야할 아이돌 그룹과, 그들의 기획사에 대해서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가 서태지를 방패막이로 삼아 목소리를 내기시작한 비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당시 절대적인 문화권력이었던 10대들과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 거기에 대중가요계의 또하나의 거대 권력인 기획사들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들역시 살아남지 못했을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차마 그러진 못하고 서태지를 공격대상으로 한거였죠.

서태지는 자신에게오는 비판에 대해 관대했었으니까요. 인디밴드들이 하는 장르를 들고나온 서태지가.. 인디문화를 알리겠다는 서태지가 자신을 공격할리 없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비판중 서태지의 음악에 대한 음악적 완성도에대한 비판은 없었다는 사실이 그 생각들을 뒷바침 해줬죠. 적어도 자신들의 음악과 비교했을때 완성도의 차이는 극명했으니까요.
이러한 인디밴드들의 공격에 대해 서태지이 반응은 "어디서 머가 짖나?' 였습니다.


세번째는 기존의 연예권력과 방송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서태지는 몰려드는 출연요청을 거부하고 음악방송만을 고집했으며, 그것 또한 가려서 출연을 했습니다. 때문에 방송사들로부터 언론탄압(?)을 받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예로 당시 SBS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인 '생방송 한밤의 TV연예'의 편파보도 였습니다. 일컬어 "한밤사건"이라고 말하는데요, (솔직히 자세한 내용은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방송직후 광분한 서태지의 팬들은 또다시 한밤폐지 서명운동 및 스폰서인 광고회사들에게까지 탄원서를 제출해서 광고철회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몇몇 광고회사들이 '한밤의TV연예'에 대한 광고를 중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서태지는 각 방송사의 가요프로그램 출연에 대해 확실한 시스템을 도입했는데요 바로 사전녹화방식 이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가요프로그램의 경우 댄스가수 위주의 무대이다보니, 립싱크용 장비밖에 갖추고있지 못했습니다. 다시말해 방송현장에서 듣는 음악은 그냥 CD를 크게 틀어놓은것과 같으며, Tv로 방송되는 음악은 미리 준비해간 CD를 틀고 그 위에 현장의 함성을 씌워서 내보내는 형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밴드와 직접 라이브로 연주해야 되는 ROCK 그것도 사운드를 중시하는 Hard Core Rock을 연주하는 서태지에게 방송사의 공연환경을 최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시한 방법이 사전녹화방식인데요. 어짜피 TV화면에는 생방송이던 녹화방송이던 상관없고, 방송국에 찾아오는 극소수의 팬들역시 음악을 즐기러오는 이들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위해서 오는 관객이기 때문에, 서태지 자신의 방송분량은 자신의 사비로 직접 설치한 최고의 장비와 무대에서 공연을 한 영상을 따로 방송에 내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각기다른 개성의 가수들이 같은 무대장치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 공연문화에 대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는데요. 이 방법을 이용해 서태지는 각 방송출연시, 트라이포드홀, 메사, 워커힐호텔야외수영장, 철장을 친 무대연출등 다양한 무대와, 더욱더 좋은 라이브 사운드를 방송에서 보여주었었습니다.

이런 바람직한 공연문화가 정착되는가 싶었지만,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조성모씨측에서 사전녹화방식은 서태지에 대한 특혜라며 방송출연을 거부하는 사태를 일으키게됩니다. 이때문에 또 한창 말들이 많았는데요, 사실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성모씨 본인이었죠. 방송 보이콧도 특혜논쟁도 조성모씨 본인이 아닌 그의 기획사인 GM 에서 제기한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논쟁으로인해 아무것도 얻은것 없이 물러나게 되었구요, 당시 조성모씨의 팬층이던 20대(즉 서태지세대)들이 조성모씨로부터 등을 돌리는 상황을 만들어냈었습니다. 이후 당대 최고이던 그의 인기는 점점 하락세를 거듭하게됐었죠....


4번째로는 표절의혹이었습니다.

서태지의 6집 울트라맨이야는 아주 강력한 강력한 핌프록(Pimp Rock)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Korn과 Limp bizkit이 이 장르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죠 (물론 Rock 매니아들에게서 말입니다.) 덕분에 이 앨범은 발표되자마자 무지한 언론과 대중들에 의해서 표절시비에 휘말렸었습니다.

마치 클레식을 모르는 제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조금 지나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는 "어 비슷하네.. 그게 그건거 같은데 이거 쇼팽이라는 녀석 슈베르트꺼 표절했구만" 이라고 생각하는것과 같죠.
각설하고 사실 이 해프닝은 이 무식함의 소치인 대중들과 여론의 행위에 광분한 서태지의 팬들이 예전 컴백홈때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인 정중하게 Korn과 Limp bizkit에게 서태지의 음반을 보내 한국에서 이걸 당신들 노래 표절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어본 결과 그들로부터, 이런 무식한 한국인들 이라는 답을 듣고 수그러들었죠.. (사실 무식한 한국인들이라는 말은 안했습니다 ㅋㅋ)

한 인물이 그렇게까지 많은 사건을 몰고다닐 수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것과, 한 인물을 그렇게까지 공격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한해였죠.
하지만, 이에 비해 서태지는 이 앨범으로 인해 또 많을걸 남겼습니다.

그 첫째는 문화대통령이라는 이름답게 공연문화와 팬문화의 변화였죠.
당시 춤으로 대변되는 댄스음악의 클럽문화가 헤드뱅잉,슬램등 핌프록등 대중들에게 춤만이 전부가 아닌 그야말로 함께 놀고 즐기는 문화를 알려주었고, 이로인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홍대, 신촌등지의 Rock클럽을 찾게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또한 의자에 앉아 풍선을 흔들며, 음악을 즐기는게 아니라 박자에 맞춰 얼마나 더 큰 소리로 가수의 이름을 부르는가, 얼마나 더 화려하게 풍선을 흔드느냐가 주 목적이던 당시 공연문화에서도 풍선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함께 즐기는스탠딩, 헤드뱅잉문화가 도입되었습니다.

태지팬들은 특히..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요, 컴백당시 공연에서 위에서와 같이 노란손수건을 흔들며 이름을 외쳤던 팬들이 그 이후의 공연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격렬하게 슬램과 헤드뱅잉을 하는등 공연의 진정한 목적인 "함께논다'라는 본질적인 의미 참여자로써 변화했습니다. 또한, 처음 접하는 핌프록(Pimp Rock)이란 장르에 대해서도 단순히 서태지가 하는 음악이니까 그냥 듣는다가 아니라, 팬들 스스로 그 음악에 대해 더 잘 알기위해 인디밴드들의 공연장 찾아다니고, 해외 밴드들의 음악을 찾아듣는등 그야말로 대중음악의 진정한 주체자로써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이후 팬들 스스로가 Rock공연을 주최하고 인디밴드들을 초청해서 그들끼리 즐기는 그야말로 팬들이 여는 패스티벌같은 공연들을 개최하기 시작했죠.

또한, 서태지의 팬이 서태지를 비판하는 이른바 진정한 팬덤문화도 생겨났습니다.

이앨범 활동당시 태지일보라는 인터텟 신문은 주로 서태지와 서태지의 팬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들과, 인디밴드들의 소개, Pimp Rock의 소개등 어찌보면 안티 서태지 사이트같은 느낌을 받게했는데요, 이 사이트는 서태지의 한 남자팬이 만든 사이트였었죠.

서태지는 100%가 아니라 99%다. 라는 모토였던것 같은데(기억이....) 하여간, 무작정 좋아하는게 아니라 애정어린 비판을 할줄 아는 진정한 팬덤문화가 싹을틔우기 시작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언더음악의 대중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레이니썬, 크로우, 디아블로, 45RPM 코어매거진.등 그동안 홍대등지의 클럽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음악을 하던 실력파언더뮤지션들이 서태지와 함께 공연을 하고, 또 핌프록(Pimp Rock)에 관심이 많아진 서태지의 팬들이 음악의 폭이 넓어지게됨에 따라 찾아가서 듣게되고 이는 곧 조금씩 대중에게 그들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마지막으로 매니아의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매니아 란?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그 변화만큼 한가지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한가지를 좋아하고,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매니아적 모습. 그리고 그 모습에 박수를 쳐줄줄 아는 문화를 서태지는 그의 음악과 말에서 나타냈습니다. ("난 100명의 팬보다 1명의 매니아를 원한다")

그의 타이틀곡인 울트라맨이야도 바로 이 매니아의 모습에 대해 표현한 노래인데요, 이때문에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이 매니아란 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고, 각 언론에서도 이를 집중 조명하는등 다시한번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영향력을 보여주었죠.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서태지의 팬들을 '태지매니아' 라고 부르게 됐었습니다.

가장 말도많고 탈도많았던 2000년 그 많은 일들속에 서태지가 진정 음악으로 보여주고자 했던건 전체적으로 듣기 쉬운 곡만 찾고 또 쉽사리 식상해하는 대중들에게 음악에 취해서 음악을 듣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또 이로인해 서태지 스스로도, 앞으로의 대한민국 문화계에서도 매니아라는 문화아이콘은 정착시키고자한 서태지의 바램이 아닐까하네요.

그리고 서태지는 다시 잠적하였고

2004년 Live Wire와 2009년 MOAI를 발표합니다.

(펌글 : mhot9000님의 글)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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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 (2010 / 일본)
출연 마츠 다카코,오카다 마사키
상세보기


감독 Tetsuya Nakashima
원작 소설 작가 Kanae Minato

간만에 아오이 유우가 나오지 않는 일본영화를 보았다. 시작은 딸기 우유마시면서 발랄했는데, 피 범벅으로 튀는, 장르는 무려 드라마/스릴러. 내가 조금 더 예술에 미쳐, 감정이 무뎠더라면 환상이라고 훌륭한 점수를 주었을 영화, 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더라면 좋아라했을 듯 하다. 나이가 들었는지, 비릿내나는 영화에 인상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만점을 줄만큼 '환상적'인 부분은 없지만, 피를 아름답게 사용하였고, 소재를 능숙히 다루었고, 관점이 뚜렸하고, 멈춤없는 전개의, 매우 감각있는 영화이다.

목숨
왕따 / 집단성
자살 / 살인
병 / 병에 대한 인식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진정한 지옥
가족 / 부모 / 애정

목숨 -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윤도현씨가, 죽음에 관한 음악을 쓰고있다고 이야기하며, 딱히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치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얘기인 듯,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어색한 자세였달까. 죽음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한다는 자체가 사실 이상했지만, 사회적 시선은 그런가보다. 우리나라 라디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 아무튼 죽음, 목숨의 끝, 삶의 끝을 이야기한다. 영화 대사 중
"목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혹은 "선생님, 목숨은 가벼운 것이에요." 따위의 대사가 있다. 목숨, 과연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물론 답은 없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목숨의 무게 또한 가늠 할 수 없다. 가족을 잃음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진정한 지옥'이 되기도하고, 미디어가 가장 시끄럽게 다루는 주제 또한 '살인' '자살' 따위의 죽음이지만, 학살 따위를 꿈꾸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인물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는, 목숨에 대한, 상반되는, 쉬운 태도 또한 그려진다.

왕따 / 집단성 - 반의 아이들은 한 개체로 그려진다. 그들은 함께 웃고, 기겁하고, 움직이고, 같은 타겟을 공격한다. 그들은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는, 개인의 의견을 만들지 못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손을 들어, 하겠다고 자발적 행위를 보이면, 나머지는 따른다. 그런 그들에게, 기준이란 수시로 바뀐다, 왕따의 대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 처럼. 집단에게 책임을 부여 할 수는 없다. 집단이 행한 행위는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느낀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방법이, 사회에서는 먹힌다.
왕따는 반 전체를 대상하고, 사회는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만든다. 개별적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은 훨씬 많은 비용이 필요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을 개인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청소년의 가장 작은 단위가 '반'이 아닐까 싶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그 단위를 책임지어야하고, 그것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반은 집단이지만, 그 안에 반장이 있고 왕따가 있다. 주체 없는 아이들을 뭉퉁그려 바라보는 시선이,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살 / 살인 - 죽는다는 것, 죽음의 이유에 따라 죽음의 영향은 매우 달라진다. 누구는 병에의해 죽지만 누구는 타인의 자존심, 애정결핍, 따위의 이유로 죽는다. 암으로 죽은이를 보내는 마음은, 타인의 자존심이 죽인 이를 보내는 마음과 다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후자는 보다 수긍이 어렵고, 복수를 부른다.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청소년은 드믈거란 무서운 상상을 해본다. 갈대같은 기준없는 마음에, 바람이 불면, '죽어버릴래'따위의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갈대같은 만큼, '안 죽을래'가 그 뒤를 쉽게 따르기도 한다. '자살은 나약한 자들의 도피'라는 인식이 있다. '자살은 사회로 인한 타살'이라는 인식 또한 있다. 물론 답은 없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는 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있다. 집단이건, 개인의 자존심이건, 받지 못한 사랑이건, 책임을 부여 할 수 있다. 그 책임에 대한 죄책감을 우리는, 누군가는 느껴야 하는가? 글쎄. .

병 / 병에 대한 인식 - AIDS 감염자의 피를 마시더라도, 감염될 확률은 없음에 가깝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하지만 반 학생들은 피 한방울, 키스, 살결이 스치는 것 조차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기겁하고, 소리 꽥 지르고, 시끄럽다. 감염자의 난처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예의보다 본인의 감염되지 않은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못하는 것에 대해 겁이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의 전문의가 될 수는 없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보편적인 인식을 만들어 그 관점으로 그 대상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병' 은 무섭고, 더럽고, '병자'는 가까이 가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병자가 내뱉은 공기만 나눠 마셔도 옮을 것 같고 손길만 스쳐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 아닌데도 말이다. '바보'짓이 분명하다. 그 따위의 취급을 받는 병자는, 신체적 병에 심리적 병의 합병증을 앓게되고, 고립이 오히려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된다. 
사회는 관심이 없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단체를 바라 볼 뿐이다. '장애인' '감염자'따위가 그러하다. 뭉퉁그려 기피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고 황당한 현실이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그런 관점을 기대하는 것이, 실망을 부르는,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 이 또한 시스템의 오류이다. 정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것이 국가라는 단위의 집단을 지도하고 인솔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이로 또 다른 집단을 형성하고, 그 두루뭉술한 집단을 다루는 제도들을 디자인한다.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청소년은 기준이 없음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였을때, 그것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옳지 않은 행위에 괜찮다는 인식을 부여하는, 황당한 제도가 아닐까.

진정한 지옥 - 목숨이 가벼운 이에게, 죽음은 오히려 선물일 수 있다. 복수를 원한다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다면,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다 - 훨씬 고통스러울 것다. 가장 아릅다운 복수의 예로써 올드보이가 있겠다. 그 치욕을 안고 살아야한다니, '죽는게 낫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야 본인의 선택. 복수의 대상을 살려두되, 그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 할 것 - 딸의 인생, 엄마의 목숨, 유일한 추억 따위가 있겠다.
굳이 누군가의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이 지옥'이 되는 일은 스스로도 부를 수 있다. 공부에 목을 달고, 학비가 없어 하고싶지 않은 일만을 하는, 삶 따위가 그러 할 것이다. 누구나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하고싶지 않은 일'만'하는 삶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하고싶은 일'을' 주되게하고, 하고싶지 않은 일'도' 취미삼아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를 - 적어도 나 자신은 이러한 기준으로 행복을 찾아가며 살고있다.

가족 / 부모 / 애정 - 사실 몇 일 전 이 것에 관하여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침 영화의 내용과 싱크가 가능하여 여기에 남겨본다. 영화에서도 다루워지듯이, 청소년은 기준이 없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 '부모가' 청소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성적인 것이 현 시대의 현실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자라나는 정신 - 청소년 - 에게 기준을 심어주어야한다. 지나친 클리셰이지만, 그들에게 공부를 바래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바래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정의, 삶의 방식의 기준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청소년이 의사, 박사, 인문학도, 사회 기여자가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왜 자식을 그 딴 것으로 키우고 싶어하는가. 환경은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면, 그 '사람'은 자신의 꿈을 찾을 것이다. 환경이 공장인가? 왜 직원을 만들려 하는가, 왜 본인이 나은 생명체로 사업을 벌이고 돈을 벌려하는가, '사람'으로 키우면 된다.
물론 나는 부모가 아니고, 이상적인 20대임으로, 비 현실적인 소리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뭐 모르고 지꺼리네'라는 소리를 들을테지만, 우리는 모두 이상을 향해 가고있지 않은가. 현실이 더럽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상적인 20대라도 이상적이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만의 논리이다.


영화의 소재로는 위의 것들 이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인상에 남은 것들을 위주로 적었다.
본 영화는, 사회의 중요한 주제를 소재로 다루었다. 사회 시스템의 보편성, 그것이 나은 부작용들 - 왕따, 병 기피, 자살, 살인, 미디어, 따위가 있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시각적 효과이다. 카메라는 앞, 뒤, 사이드, 뿐 아니라 위에서 전지적인 듯 한 시점 또한 그린다. 현 시대의 보편적인 매체, 티비와 핸드폰 또한 유용히 사용되었다. 적절하고 직결되는 음악의 사용 또한 내용을 부각시킨다. 영화를 본 후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ost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bgm이라기에는 비중이 있는 듯한 음악은, 가사를 듣게하고, 영화에 또 다른 입체성을 준다.
또한, 피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피의 성질을 매우 훌륭히 활용하였다. 특히나 벽에 칠해진 피, 손에 범벅이된 피, 땅에 떨어진 피의 구도가 매우 잘 계획되었다. 시각 디렉터, 따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각적 배치와 물체간의 대비가 매우 감각적이다. 피의 새빨간 색감이 하얀 벽, 학생의 뽀얀 피부와 대비하는, 장면들이 훌륭히 구사된다. 
영화의 끝자락으로 다가가, 폭발 장면의, 쌩뚱맞은 cg효과 또한 재미있다. 시계라는 아이템을 사용하여,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의 심리를 표현한다. 유리와 파편들이 느리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관객의 집중을 사고, 혼란과 역동적인 심리를 묘사한다.
궁금의 여지가 남는 점은, '과연 그녀는 폭탄을 정말로 전달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폭탄을 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소년은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폭탄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소년은 안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점을 바꾸기에는, 그 거짓말 한 마디, 가상된 사실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작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피 비릿내 잔뜩 나는, 시뻘건 책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사르트레의 '구토'도 읽으며 악몽을 꾸어, 마저 읽지 못한 나인데 말이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누르는 날이 올까 -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충분히 감정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러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 - 나의 감각들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읽을 용기가 아닌, 굳은살이 생기겠지 -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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