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oco Machiko lives and works in Japan. Her charming flora and fauna paintings amaze, with their fauvistic use of color and primitive linework. Gorgeous.
읽는 중이다. chronologically 흘러가는 전개임으로 어린시절부터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잡스의 모습을 읽고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이작슨의 서술형식. 아이작슨의 글은 그의 Einstein 아인슈타인의 전기 후로 두번 째다. 그의 서술에는 변함이 없다. 잡스는 아이작슨에게 직접 본인의 전기를 쓸 것을 부탁했다고한다. 전기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니어서 배경없는 의견이나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작슨의 글은 깔끔하다, 이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깔끔하다. 그래서 좋다. 군더더기라거나 부풀림, 과한 드라마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사건과 사실 fact 로 재미를 만들어낸다. 전기를 쓰는데에 상당히 적합하다.
두 번 째로 느끼는 점은 잡스에 대해서이다. 애플의 제품은 ipod nano 와 ipod touch 이따금 mac 을 사용 한 것. 애플에 메달리지 않는다, 전혀. 반감은 없다, 만 잡스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는 암환자였고 natural remedies 자연 치유법을 시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정도가 배경의 전부였다. 잡스의 어린시절,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애플을 시작하는 시점까지 읽었다. 여기까지 잡스의 삶, 과 그의 삶에 포함되었던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있자면 그는 '미친 히피' 정도로 정리가 된다. 그는 이상하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대부분 'that is shit' 그것은 오물이라고 대답하며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 혹시 제시된 아이디어가 마음에든다면 'that is shit' 이라고 대답하고 일주일 후에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본인의 생각인양 아이디어를 다시 이야기한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은 바보거나 천재였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창작들을 사랑하거나 당신은 재능없는 필요없는 존재인양 여겼다고한다. 그는 불가능을 믿었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불가능을 강요했고 그것이 불가능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로. 그래서 그는 이상했고 비정상적인 요구를 비정상적인 시간안에 완성되기를 요구했고,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혁신들을 나았다. 미쳐야만이 가능한, 미쳤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 참으로 일반의 틀을 벗어나야만이 가능한 일들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읽은 잡스는 '미친 히피'이다, 천천히 읽고있다. 아이작슨의 서술형이 깨끗하고 재미져서 보다 재미있는 책이다. 전개가 기대된다.
세상이 둥그니까 나를 흥분시킨다는 .. 뭐 이리 좋은 노래가 있는가. 비틀즈는 역시나 미친 천재, 천재적으로 미친거야.
One of the best examples of John Lennon, Paul McCartney, and George Harrison's harmonizing, Because.
The song begins with electric harpsichord played by George Martin and then joined by Lennon's guitar doubling the harpsichord and played through a Leslie speaker. Vocals and bass guitar enter in what Alan Pollack calls the "mini-bridge."
The song was one of the few Beatles songs to include an analog synthesizer arrangement (although analog keyboards such as the Mellotron had been used often by The Beatles, few songs featured the use of a traditional analog synthesizer with voltage-controlled oscillators). The Beatles at the time of Abbey Road were among the first contemporary rock bands to experiment with the Moog synthesizer (the first, or at least the first to chart on the top 40, had been The Monkees).
According to Lennon, "Because" was inspired by Ludwig van Beethoven's "Moonlight Sonata". "Yoko was playing Beethoven's 'Moonlight Sonata' on the piano ... I said, 'Can you play those chords backwards?', and wrote 'Because' around them. The lyrics speak for themselves ... No imagery, no obscure references."
The main recording session for "Because" was on 1 August 1969, with vocal overdubs on 4 August, and a Moog synthesizer overdub by George Harrison on 5 August. As a result, this was the last song on the album to be committed to tape, although there were still overdubs for other incomplete songs.
A vocals-only version of the song can be found on Anthology 3 and Love and is an example of three part harmony from Lennon, McCartney, and Harrison, although the latter is slowed down and includes quiet nature sound effects. Both versions include the 'Ahh' at the beginning. This song appears in the movie "American Beauty" where it is dramatically placed right after the last words of the film.
빌 클린턴, 늙었다. 말 참 잘 한다, 히야 .. 잘 한다 하면서 보고있는데 본인이 직접 쓴 연설이란다, 대박. 마치 이 캠페인을 위해 태어난 듯, 능숙함과 편안함. 미국 정치라는 공간에 인생을 담은 사람이니만큼 익숙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놀랍다. 참으로 내가 원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이란 저런 것이구나, 저것이 정석의 모습이구나 싶은 모습. 감탄에 감탄이다, 어메이징. 이러한 현란하지 않은 간단함, 공감의 주제들을 적절히 다룬, 자신이 지식과 능력을 한껏 활용한 연설. 이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다 싶다. 보면서 '투표하고싶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것, 이것이 힘이다. 박수.
미술 그림 인물화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Ikenaga Yasunari 의 작품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눈에 반했다. 주로 여자들을 그리는 현대작가이지 싶은데 눈빛이 슬프기도하고 평안한 것이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 인상을 준다. 색감도 편안하고 문양들도 하나하나 매력적이고 감각적이다. 아름다워 so beautiful.
야스나리 Yasunari 라는 이름은 설국의 작가 Kawabata Yasunari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상기시킨다. 오묘하게도 두 작가 모두 부드러우면서 아픈, 감각적이면서 세련된, 고흑하면서 완벽한, 따듯함과는 상당히 멀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 얼추 비슷한 방향의 느낌을 준다. 피에 닮은 어떠한 것이 흐르는가.
찾을 자료가 있어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를 들어가니 참으로 재미지구나 웃기다. 이전 블로그 http://blog.naver.com/englicious 이전 블로그를 고등학교 때 부터 얼추 3년 사용하였는데 게시글 수가 68이다. 비밀번호를 잃어 비공개 글이 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하다. 현재 이 블로그를 사용한지 1.5년 정도인데 총 글 수가 384이다. 비공개 글은 없다. 물론 당시에도 병행 블로그가 다른 곳에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두 메인 블로그를 비교하여 이리 큰 차이가 나다니 .. 갈 수록 글의 숫자가 늘고있다, 그 만큼 글의 질도 늘었으면 좋겠구나 ! 확실한 것은 내용적으로 즐거움과 편안함이 늘었다, 나의 삶에 즐거움과 편안함이 늘었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의롭고 좋구나 :) good for me ! 장하다.
와중 내가 좋아하던 글귀를 올린 포스팅이 있으니, 지금 읽어도 좋으다 좋구나. 근래 드는 생각이 나에게 장점이있고 단점이 있는 중, 나는 매일 나의 단점, 그것도 특정 단점 한 가지에 목 메여 절절 절망하며 지냈다. 하루도 빠짐 없이 그 한가지 단점에 대해 생각했고 다른 장점들 단점들은 스쳐가는 모습인양 비교 할 만한 비중도 두지 않았다. 그 작은 점에 두 눈과 마음이 모두 가리어저 다른 생각들도 일들도 할 수 없이 낭비한 시간은, 이제 시간의 단위를 넘어 긴 세월들이 되었다. 이제서야 나에게 그 한 가지 외에도 많은 성격 및 경향과 조각들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제서야. 그렇게 나는 하나의 단점이 아닌 장단점의 조합이라는 것을 .. 불과 몇 일 전에 알게되었다. 참으로 당연한 것인데 알 수 없는 것들. 중력처럼 당연하지만 중력처럼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나이가 들었다, 철이 들었다, 하지만 배우고 느낄 것은 고갈되지 않음을. 겸손해야함을 다시 느낀다.
엄마 보고싶다.
하늘이 내게 ‘고난’과 ‘시련’을 내리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고난을 그저 고난으로 여겨 평생 원망만 하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낼 것이나, 지혜로운 자는 역경을 발판 삼아 그 속에서 참으로 빛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본디 사람은 육체의 고통을 빌어 정신을 단련시켜 가는 이성의 존재다. 육신의 배고픔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불행한 것은 세상 물욕에 빠져 혼 줄을 놓고 타락으로 일관하여 살아가는 정신의 궁핍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재물을 곳간에 쌓아 놓고 위세를 부려 본들, 물 위에 떠 다니는 한 가닥 지푸라기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감에 진정한 고난을 모르고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의 배부른 축생(畜生)의 삶에 불과하지만, 고난(苦難)의 이치를 잘 극복하고 헤아리면 전혀 놀라운 뜻밖의 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모름지기 육신이 안락한 사람은 정신이 초라하고, 정신이 풍요롭고 고도한 사람은 그런 자질구질 한 물질의 경지를 이미 넘어 선 상태다. 만고를 통틀어 부(富)를 등에 지고 큰 인물 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일찍이 가난을 벗 삼아 만인의 추앙을 받는 성인(聖人)이나 현자(賢者)된 자들은 수두룩 하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스스로 만사를 불공평하게 만들고 살 뿐이다. 그 모든 인생의 원천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랑 위대한 “의 힘”이다.
참된 아름다움 true beauty 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캠패인 활동차원에 Michelle Obama 와 Jill Biden 이 미국을 투어하며 Seattle 도 방문했었다. (당시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내용 첨부. http://blog.naver.com/englicious/120117356969 ) 당시에도 그녀는 위의 DNC Speech 에서 사용된 본인의 아버지와 버락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미셸은 저 이야기를 수 백 수 천번은 했으리라. 그녀의 언변이 보다 능숙하고 치우치게는 습관적이어 보이기까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진심, 진심임을 알 수 있다. 2년 전 20m 앞에서 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도 화면으로 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진심은 늘 있다. 성공의 잣대는 돈이 아닌 기준과 가치라는, 너무나 자주 듣는 식상한 주제이지만 진심은 진부함을 넘어 감동을 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한다, 대중을 움직인다. 놀라워.
Michelle is gorgeous 참 예쁘다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에 남긴 luncheon review, 역시나 기록을 남김은 좋다 좋으다 ! 당시 iPod touch 로 찍은 사진들 하하 2 년 전의 기계 기술.
한국은 당이 참 여럿이지만 미국은 Democrate, Republican, 비교적 간단, 일까? 허허허.
Obamas 와 Bidens, 즉 오바마 내외와 바이든 내외가 캠패인을 돌고있다.
본 행사의 공식명칭은 Murray Victory Luncheon with First Lady Michelle Obama
Murray 성공, 영부인 Michelle Obama와의 오찬, 으로 해석, 흠.
장소는 Hyatt Regancy Bellevue, WA
Washington State, 워싱턴 주는 미국에서 여성 정치가들이 가장 여럿 임.
Governor 주지사 Christine Gregoire
Congress Suzan DelBene
Senator 상원의원 Ptty Murray
오늘의 모든 스피커들은 여자였다.
연설 순서대로 나열 하자면
Suzane DelBene
Ellen Malcom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elle Obama
Ellen Malcom 은 Emily's List 라는 여성 민주당원들을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검색해보니 IBM 공동 설립자 중 한 명 이며 상속인이다. 1998년 Vanity Fair의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여자 100 리스트에 올랐다. 후덜덜.
일단 사진을 좀 찍었다.
들어가기 위해선 Register를 해야한다. Register는 1000시에 시작이였다. 나의 도착시간 0910. 200명 가량 줄을 서 있었다. 나도 Register를 하기 위해 줄을 선다. 1000시 전인 0940시 부터 Register가 시작되고,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Register는 신분증으로 이름과 본인의 신분을 확인하면 위의 파란 티켓을 준다. 그것을 받고 Security Check 를 받는다.
Metal detector 를 통과해야하고, 핸드폰, 카메라 등 전자제품은 작동이 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함으로 켜고 손에 들고 있어야한다. 액체는 마실 수 있는 것임을 확인 해야 함으로, 경비원 앞에서 한 모금 마셔야 한다.
보안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선다.
경비 사람.
보안 통과하니 대략 1030시. 오찬은 1100시 시작. 행사가 진행 될 Ball Room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린다.
기다리는 중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다.
아직 붐비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소히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다.
구부정히 앉아계신 할아버지.
Volunteer들이 좌석배치도를 가지고 다니며 좌석위치를 확인해 준다. 테이블 번호로 자리를 확인 해주어 Ball Room에 들어가면 바로 테이블을 찾을 수 있다.
1000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Volunteer는 대략 30명 가량 이였던듯, 충분했다.
조금씩 붐비기 시작.
파노라마 샷.
1100시, Ball Room 이 열였다.
Hyatt Regency Ball Room. 테이블 당 10명, 대략 100 테이블이 넘는 듯.
메뉴는 크랜배리 닭 가슴살과 감자, 그리고 사과 사이다 식초 드레싱 샐러드. 후식의 이름은 모르겠음. 초콜릿과 치즈케익의 종류였음. 난 후식 2개 먹음.
오찬에 참여한 가장 예쁜 여자.
막상 연설들이 시작되고서는 듣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 않음. 미셸만 2장 찍고 연설 녹음 함.
대통령, 영부인, 부통령도 마찬가지겠지만, 보안에 상당히 많은 심여를 기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영부인이 방에 들어온 후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연설대 앞에는 여럿의 투명 30cm x 50cm 정도의 판자들이 세워져 있음. 테러를 대비하여 보호대를 세운다고 한다. 스피커도 일부러 저렇게 적나라히 연설자를 가리는 각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 허허 흠.
연설자들의 순서를 다시 적어보겠다
Suzan DelBene
Ellen Malcolm
Governor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helle Obama
각 연설은 대략 10-13분.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었다, 25분을 조금 넘긴 듯.
기억에 남는 점들만 적어보겠다.
Christine Gregoire
호소력있는 연설가, 내용전달이 명확. 단지 추가설명이 부실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명료. 'Patty Murray의 Republican 상대, Dino Rossi은 안된다' 로 사람들의 호응을 삼. 각 후보의 정치적 역사를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는 나로써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 함. Rossi의 낙태반대와, 피임반대에 대한 입장을 부정적으로 표현. 상대후보를 깍아내리는 식의 연설내용은 사실 비호감. 하지만 열정이 확실히 전해지고, 강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음.
Patty Murray
Gregoire와는 다른 부드러운 강인함. 본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며 사람들의 호응을 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7의 형제자매를 기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7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내고, 대학을 졸업시킨 부모님의 이야기를 함. 본인의 엄마신분을 중요시 내세움. 유치원 선생님으로 시작해, 학부모회의 구성원이였던 삶을 이야기하고, 정치에 뛰어든, '운동화 신은 엄마'의 이미지를 사용.
아이들과, 여성과, Veteran (참전 군인)들을 위해 일 할 것을 강조.
Jill Biden
비교적 짧았던 연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 현 정부의 업적에 대하여,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 본인의 Community College에서 교수로써의 보람에 관하여, Community College의 중요성에 관하여 설명. Murray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무난한 연설. 역동적이지도, 감동적이도 않은, 수긍 할 만한, 원만한 내용, 전달의 연설.
한 가지 느낀점은 Jill Biden 은 굉장히 예쁘다, 외모적으로.
Michelle Obama
이 여자가 왜 Barack Obama의 여자인지 알 수 있음. 연설대에 서자 사람들이 박수를 매우 많이 침. Michelle이 매우 고마워 함, 웃으며 편안하게 받아드림. 관중을 칭찬하며, 농담으로 시작. 본인은 선거 캠패인에 아직 생소하다며, 얼마 전 있었던 '작은' 캠패인 이외에는 경험이 없다고 농담 (대선 캠패인). 본인이 선거 캠패인에 임하는 자세를 설명, 본인이 지금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두 딸을 위해서라고 설명. 하는 모든 일의 이유는 두 딸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한다고.
(이하부터, 나의 개인적 편의를 위하여 1인칭도 사용하겠음, 내 마음대로 블로깅, 허허흠.)
세상을 보는 방법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이다. 파병된 아빠를 둔 아이의 눈에서,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아이들을 우리는 위해야 한다.
본인의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함. 아버지는 Multiple Sclerosis로 몸이 불편하여도, 매일 아침 City Water Plan에 일하러 나가셨음. 나와 나의 오빠 (동생인가. .Brother)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주기 위하여 아빠는 매일 일 함.
Barack의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 그와 그의 여동생을 위하여, 동이 트기전에 아침 버스를 타기위해 출근하심. 승진의 기회들이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빗나가도, 불평하지 않고 그녀는 매일 최선을 다하여 일 함.
그리고 현 정부의 실행들을 나열 함.
여성 평등 임금, 국민 보험, 중소기업 세금 감소, 중산층 세금감소 등등.
Veterans에 대해 설명, Womens rights에 대해 설명. 줄기세포 지지에 관해서도 이야기 함.
보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얘기 함. Barack의 엄마가 삶의 마지막 날들을 보험회사와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하며, 보험회사들의 만행을 저지하는 규율들 설명. 국민 보험은 국가의 돈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
Barack 의 슬로건 'Change'에 관해 이야기 함. 변화는 쉽지 않다는 것. 많은 이들은 Barack의 임기가 시작 된 날 '변화'를 기대했지만, 변화는 그리 빠르지 않음. 함께 움직여야, 에너지를 모아, 이번 선거 또한 힘을 모아야 변화의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함.
American Dream에 대해서도 이야기 함. Michelle은 지칠때 기억하는 것은 본인의 아버지임을 이야기 함.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 근육이 굳어가, 단추를 채우기 어려워 하면서도 출근하는 모습을 기억. 그리고 선거날을 되세김. 그리고 취임식날을 되세김.
마무리는 Patty와 같은 지도자가 우리는 필요하다를 강조. 아는 사람 10명에게 연락하고, 그들에게도 10명에게 연락하라고 전달하라. 모르는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라. 앉아있는 사람에게 전달하라, 우리는 이번 선거를 앉아 있을 수 없다 (방관 할 수 없다.) 대선의 에너지를 기억하고, 그 "Movement"를 다시 일으키면,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Yes we can!
Yes we must!
Yes we will!
을 외치며 환호를 받으며 끝.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기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세한 '이미지'와 쉬운 단어들을 사용. 연설 중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었음. 간단한 메세지, 구체적인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연설. 중간 중간 농담을 던져 관중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 또한 큰 몫. 하아, 저 여자.
기억나는대로, 최대한 순서를 살려 쓰려니 정리가 너무 되지 않았군.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참석한 자리. 작은 기대가 있었다면 '계기'를 찾고 싶었음.
음. 감회라면, 두가지. 나 자신이 사회의 조각임,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매우 간단함임을 인식.
Jill Biden, Michelle Obama, Patty Murray, 아이들의 엄마이고, 부모들의 자식이고, 남편들의 아내인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살아 가고있음. 아름다움은은 타고난 환상이 아닌, 솔직한 호소, 그리고 인류에 대한 동질감이라 느낌.
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경상도 친구도 없고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경상도 사투리가 무엇인가,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 하는 느낌은 처음 받았다. 경상도 방언 자체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김제동씨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방언, 그것은 참으로 참으로 매력 철철 아름다운 재미진 것이더라 !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나눈다는 것, 참 용기다. 나는 이따금 하물며 엄마아빠에게 동생에게 친구들에게도 어려워 부끄러워 슬퍼 속상해서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나눈다. 그의 나눔이 전부가 아닌 일부일지라도, 자신의 진심된 일부를 나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용기라 생각된다.
누군가를 웃게하려면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가 나를 좋아해야한다는 말, 옳다. 이 날 나는 참으로 많이 웃었다 참으로 많이. 주체적임을 강조했던 그의 한 시간, 참으로 진심된 참으로 상대에게 긍정을 바라는 이의 조언에 감동을 받았다. 대중, 어쩌면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텐데, 같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위하는 마음. 그저 사람이기에 혹은 그저 그냥 나 아닌 다른 누군가, 무언가에게 good 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신기하기도하고 고맙고 멋지게 느껴진다. 나에게 웃음과 즐거움, 감동과 행복을 보여준,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김제동씨, 너무 좋아 김제동씨!
올 해 시애틀은 특별히 여름이 길다. 9월의 문턱을 넘었는데도 하루하루 파란하늘과 금빛 햇살이 가득하다. 비는 너무나 좋지만 흐린 하늘은 버거운 나에게 행복을 주는 하늘이다. 법륜스님과 김제동씨의 강연에 담긴 내용 중 '주체적' 이라는 주제가 인상에 깊게 남아 하루에 몇 십번씩 생각이난다. 하루하루 주체적으로 나는 나의 주인임을 기억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만큼 하는 것. 이따금 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나의 모습들, 때로는 너무나 견디기 어렵고 불편한 나 자신이지만, 하루의 시간 중 주체적인 비율을 많게하도록 노력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이렇게 쌓이는 날들이 쌓이는 글만큼 많고 나를 만든다. 슬픈 일이 많았지만 돌아보면 '배움이었다' 라며 웃을거다. 이렇게 행복하고 가볍게 살 수 있는 것을, 그 동안 어리석었지만 무관히 앞으로 행복하기.
행복하다. 하루하루 운동 공부 감사함 햇살로 가득한 날들이 이어지고있다. 언니는 9일동안 유럽여행을 떠나셨지만 이 번에 빈 집은 지난 번 처럼 공허하고 어렵지 않다. 역시나 경험은 배움을 주었고 괜찮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괜찮다, 좋다 행복하다 즐겁다.
어젯 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얼추 이주일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 통화동안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엄마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운 우리 엄마, 보고싶은 우리 엄마, 사랑하는, 언제나 나를 위하는 엄마. 엄마아빠가 나의 귀국날을 매우 기다리신다. 봄 쯤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하니 굉장히 기뻐하시며 기대를 많이 하신다. 나와 동생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끼신다는 두 분, 참으로 감사한 엄마아빠. 매일 보며 지낼 수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애뜻한, 아쉬움만큼 그리움이 큰 유학생활이다.
super proud of me :) 언제나 솔직한 것이 가장 옳은 것
불면에 신경완화제를 종종 먹곤 했었는데 습관이 되는 듯 싶어 멀리하는 중. 그제는 잠이 오지 않아 6시에서야 잠에들었지만 약을 먹지 않았다, 뿌듯하다 proud of myself. 근래 참 많이드는 생각이다. '나아지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감사하고 뿌듯하다. 긍정을 향하고있는 지금,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positivity brings positivity 긍정이 긍정을 부른다, 사실이다. 주체적임은 의도적이고 축복은 운명이지만 의도가 운명을 만든다. 나으리 heal 나았다 have healed.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부정하고싶지만 언제나 솔직한 것이 가장 옳은 것이기에, 객관적인 진단은 아직이라는 것. 하지만 나아지고있다, 분명히. 무엇보다 긍정에대한 믿음이 있다. 또한 정신적으로 무엇이 옳은지에대해 뚜렷한 기준이 만들어졌다. 옳지 않은 것이 옳지 않음을 몰랐던 시절보다 수 단계 나아진 지금이다. 몸을 성스럽게 생각하고 아끼자, 옳바르게 대하자. treat my body right. 요즘 눈이 따금거리고 기관지, 특히나 목구멍이 부었고 아프다. 턱과 어금니 또한 자리를 잃은 느낌, 나을 시간이 필요하다.
9월이어서인지 시험공부하는 카페인들이 늘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있는다, 종일. 카페 한 구석 여자가 남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긴 문장들을 빠른 속도로 줄줄이 뱉어낸다. 남자가 가방을 등에 맨 체로 눈을 껌뻑이며 듣는다. 서러운 얼굴과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이 마주 앉아있다. 유리 벽 밖은 비가오더니 흐린 하늘에서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곧 가을이, 혹은 이미 가을인가. 네 아기 엄마들이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셋이 흰색 검정색의 줄무니 옷을 입었다. Snickerdoodle 을 찾으러 갔지만 오후여서인지 하나도 남지 않았다. Holiday limited offer 라는 White chocolate Macadamia nut 로 대신한다. 아 달달해 :) 짙은 금발의 남자가 흐린 하늘빛 단추셔츠 안에 흰 라운드 면티를 입고 앉았다. 회색 맥 프로를 두드리다 왼손으로 코를 만진다. 네번째 손가락에 굵직한 반지가 끼워져있다. 파란 바탕에 흰 포카닷 남방을 입은 여자가 일자 앞머리를 내고 긴 뒷 머리를 정수리에 동그랗게 묶었다. 쇼파에 넓게 앉아 David Sadaris 를 읽는다. 책은 민트색이고 입술은 빨갛다. 눈은 파랗고 몸은 무겁다. 지금은 없지만 얼추 두시간 전 쥐색 면 티셔츠에 보트슈즈를 신은 동양청년이 높은 의자에 앉았었다. 브루넷 남자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던 그는 앉은 모습에서도 큰 키와 주 5회 운동의 습관이 보였다. 반해서 한참 쳐다봤는데 어느 사이 사라졌다. 아쉬움이라면 허리가 구부정했으며 손짓이 어색했고 웃지 않았다. 연한 청 자켓에 검정 회색의 줄무니 셔츠를 안에 입은 검정머리 학생이 넓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있다. 종이 몇 장과 3가지 색의 펜을 테이블에 두고 흰색 검정색 Bose 이어폰을 양 귀에 꽂고있다. 종이들을 한참 바라보다 허리를 펴 검정 16 inch 노트북을 뒤적인다. 나다. 하하. 저 커플은 몇 시간을 저러구있다. 나두 할래 연애.
"everybody dies but not everybody lives" 누구나 죽지만 누구나 살지는 않는다
월요일이다, 한 주 중 가장 좋아하는 월요일이다. 토요일 일요일 건너 뛴 운동을 다녀왔다. 기분전화에 운동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한 세트에 20개씩하던 윗몸일으키기인데 처음으로 40개 세트를 했다, 와우 ! 근력이 늘고 있는 것이다 베리 굳 매우 좋다. 운동을 마치고 자전거를 데리고 상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한다. 오늘의 두번 째 샤워를하고 저녁식사를한다. 가방을 챙겨서 카페에 간다. 두 잔 째 커피, decaf 를 주문한다. 2229시, 카페에 60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음료와 업무 혹은 여유를 가지고 앉아있다. 이 중 10 % 는 한국인, 와우 기이하구나.
'더 이상 절대로 안되'라는 생각을 수십번 하였는데도, 발전은하였지만 완전히 버리지 못 한 습관. 숨은 길어지고 마음은 피곤하다. 기도를하자 아픈만큼 절심함으로, 기도를하자. 제발 .. 간절함을 기도하자. 많이 매일 자주 계속 오래 , 죽어라 하자 기도.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죽었다. 참으로 피곤하다, 이제는 지쳐서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도 잡지 않으리라. 모든 힘 기운 에너지를 놓아버리고 내가 아닌 우주의 기운에 맡길테다. 다들 잘 한다고 하는걸텐데, 사는게 그냥 웃기다. 다들 최선을 다 하는걸텐데, 각자 나름의 노력 중일텐데. 나 또한 잘 하고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하고 웃기다. 왜이러고 살지, 후회도하고 되돌아가고싶기도하고,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잘해야지 다짐은 매일 매해 이지만 여전히 후회 중이다. 하지만 괜찮아 ! 괜찮아, 잘 하고있어. 웃자.
실력이 제법 늘었다. 다 모르겠던 문제들인데 이제는 10 ~ 20 % 모르겠다. 여전히 갈 길이 제법되지만 온 길이 훨씬 길다. 나는 열심히 지냈는가, 열심히 지냈다고 자신있게 대답 할 수 없다. 괜찮다고하자,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운동예찬 ! 운동했다. 몸무게가 늘어 충격적인 마음을안고 열심히. 윗몸일으키기가 보다 수월해졌다. 앞으로 더욱이 수월하기를. 기분이 상쾌하고 신이난다. 몸은 무겁지만 곧 가벼워지리라 ! 소화가된다, 몸이 좋아지고있다. 무게를 줄이자 아래로 아래로 줄줄줄이자. 기분 좋아 헤헤. 카페에 앉아있는 2305시. 유난히 귀여운 사람들이 많은 오늘이다, 기분이 좋은건가. 신선한 야채 장 봐서 집에 가서 자야겠다. 기도하구 청소하구 기도하구 자야지, 굳 밤 :) ♥♥♥ 행복해
그제 어제 오늘 속이 좋지 않다 싶더니, 매일 점심으로 먹는 토스트와 치즈가 문제였다. 오늘도 토스트를 구워 먹는데 빵이 상하고있음을 알아차림. 미미한 크기였지만 눈에 보일만큼 상했다면 이미 미생물 번식은 몇 일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조각이었는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하지만 큰 탈은 아니었고 의아하다 싶을 정도였으니 다행.
근래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약을 먹고 잔다. 어제는 왠일인지 약이 잘 듣지 않아 중간에 깨었다. 면역력이 생기는 것일까.
카페 화장실, 라임색 큼직한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긴 금발 생머리 십대 여자 아이가 거울 앞에서 울고있다. 나는 마지막 운 것이 언제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Seattle 로 이사를 와서 많이 울기도했지만 고등학교만큼 편안하게 운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면 이유도 되지 않는 이유들로 물풍선이 터지 듯 엄마 아빠 앞에서 눈물을 쏟고는 했다. 생각하니 또 코가 찡하네. 근래 이렇게 툭하면 코 찡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다. coldplay 의 up in flames 를 들어도 us against the world 를 들어도 들을 때마다 코가 찡하고 마음이 쨩하면서 울 것 같은, 순간들이 울컥울컥 온다. 하루에 이 곡들을 수십 수백번 종일 들으며 매 번 찡하다. 하루 수백번 찡하다, 감수성 폭발의 9월 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눈물을 쏟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편안하게 울 수 없는 곳이 Seattle 이지 싶다.
9월의 목요일 - Thursday of September 단어조합만으로 느낄 수 있는 완벽함.
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으며, 아니 법륜스님을 무대위에서 보자마자 느낀 것은 '진심' 이었다. 미국이라는 이국까지 해마다 이야기를 나누러 오신다는 부지런함, 은 진심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 참으로 진실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심이 전해졌다. 웃는 모습 또한 그저 '진솔함'의 정석으로 느껴졌다. 첫 인상부터 너무나 신기했던 법륜스님의 모습.
어쩌면 진부한, 자기계발 서적에서 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기도하지만 진심어린 의견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닿았다. 강연을 보기 전에 인터뷰들과 기사들을 몇 가지 읽고 기대가 없기도했고 있기도 한, 어쩌면 중립에 가까운 마음으로 찾아간 강연은 좋은 경험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가 움직인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인다는 모습이 무엇보다 큰 감동이었고 배움이었다. 진심으로 원하고 실천하는 모습, 그야말로 무엇보다 굉장함, 이다.
법륜(法輪,1953년4월 11일~ ,울산광역시출생)은대한민국의승려이자 사회 운동가, 구호 운동가, 환경 운동가이다. 현재 구호단체한국JTS의 이사장이다. 법호는 지광(智光)이며, 속세명은 최석호이다.
1953년경상남도울산군 두서면 (현울산광역시울주군)에서 태어나1969년12월분황사에서 불가에 입문했다. 그 후,1988년수행공동체인정토회를 설립해 수행지도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는 만해상 포교상을,2002년에는 구호단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막사이사이상'국제평화와 이해' 부문을, 2007년에는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2010년불교계의4대강 사업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1]정토회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2011년 2월 포스코 청암상 청암봉사상을 동티모르의 알로라 재단과 공동수상 하였다.[2]
저서로는 《실천적 불교 사상》,《금강경 이야기》,《반야심경 이야기》,《붓다, 나를 흔들다》, 즉문즉설 시리즈 《답답하면 물어라》,《스님,마음이 불편해요》,《행복하기 행복전하기》,《행복한 출근길》,《날마다 웃는집》,《기도》,《스님의 주례사》 등이 있다.
조계종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조계종 측에서는 법륜을 본명인 '최석호 법사'로 부른다.[3]
한국JTS(Join Together Society)는정토회의승려법륜(현재 JTS 이사장)이기아,질병,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구호개발비정부 기구이다.
20세기의 마지막에 인류 최후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남북의 대립으로 한쪽에서 수백만의 동포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비극이 아니라 정치적 갈등과 분쟁이 야기하는 인류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국지적인 분쟁과 대립이 양산되고 있는 인류에게 있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법륜스님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정파적인 이해나 이념적인 견해에 우선적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해왔다. 남북한의 긴장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실천은 어느 때는 친북적인 인사로 오해받아 감시를 받고, 또 다른 때는 반북적인 인사로 활동을 제한받기도 하였다. 법륜스님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과 그보다 더 냉정한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일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인 지원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대북 지원과 탈북자 돕기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한 장기전략을 연구하는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 눈물로 읍소하면서 펼쳐온 북한동포돕기운동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서 법륜스님 하면 북한동포돕기가 떠오를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을 발로 뛰어다니며 알리고 눈물로 호소하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법륜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다, 동포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조선족 동포들의 이야기에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직접 압록강변에서 불러도 쳐다보지 못하는 북한어린이의 모습에서 법륜스님은 그 동안의 외면한 마음에 대한 참회와 함께 바로 앞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력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북한돕기에 대한 눈물어린 서원을 세웠다. 96년 12월 잠수함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될 때 각계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북한동포돕기의 불씨는 전국으로 퍼져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함께 대북지원을 호소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북한돕기운동은 국내의 반대 여론뿐아니라 북한정부의 반감을 살지라도 목숨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힘입어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2. 갈등과 대립을 넘어 상생과 조화의 관계로 법륜스님은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보살의 삶을 서원으로 한 정토회를 설립하여 배고픔이 없는 세상, 모든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세상, 배우지 못한 고통이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해왔다. 정토회는 인류에게 불어닥친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의 대안으로서의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무아, 무소유, 무아집의 부처님과 보살의 삶을 모델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문제가 단지 소비와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과 문명,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삶의 전환운동이라는 것, 분쟁과 갈등의 세계 안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단지 한 민족에게 국한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외세의 개입, 그로 인한 지역적 긴장 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이 될 수 있다.
3. 사상가이자 수행자로서의 삶 법륜스님은 인도에서 국제 워크캠프를 열고 태국 국경지역의 미얀마 난민을 구호하는 일, 몽골 한파 지역의 긴급구호, 이디오피아 가뭄 피해 자원활동 등,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는 많은 일을 펼치고 있다. 인류는 디지털세상과 인간복제로까지 나아가는 21세기의 과학문명과 여전히 상존하는 계급, 계층, 문화, 종교, 성의 갈등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얽혀있다. 법륜스님은 인류가 타인의 불행 위에 행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일구는 생명운동과 문명의 전환운동을 펼치고 실천한다. 법륜스님은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실현해가는 평화운동가로서, 인류의 문명전환을 실현해가는 전지구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사상가로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활동가로서, 깨어있는 수행자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간만에 계란을 삶아 샐러드에 넣었는데, 읔 속이 너무 비리다 흐엉 괴로워. 채식 제과류 외에 유제품이 들어간 제과류도 먹기에 유제품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싫었다. 채식을 지향하지만 이따금 육류제품이 먹고싶을 때가 있다. 해물은 불편한 마음 없이 먹는다. 몇 주 전에는 난데없이 닭튀김이 먹고싶어 닭튀김을 직접 구입해서 먹었다. 몇 년만의 닭 .. 먹으면서 정신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이상했다. 내가 닭이 갑자기 왜 먹고싶은지, 닭이라는 것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살아있는 닭의 모습이 머릿 속으로 그려지면서, 이걸 먹고있다고 생각하니 으엑 이상했다. 생각만큼 비리지 않아 놀라웠고 채식을 하다가 고기를 먹고 아픈 경우에 대해서 많이 읽었기에 아프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나쁘지 않은데 ? 라는 생각이 들어 의외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닭을 먹는다'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다.
치즈는 너무 맛있다. 채식을 해야지 마음먹고 치즈또한 콩으로 만든 제품들만 먹었는데 그 다양한 치즈들이 전시 된 마트에서 콩치즈만을 먹는 다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치즈를 먹는다. 그런데 얼추 일이년 정도 우유치즈를 먹지 않다가 먹어서인지 제법 오래 먹고있는데도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있다. 혹은 치즈가 문제가 아닌가. 우유 또한 섭취하지 않은지 몇 년. 빵에 들어있는 유제품은 먹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다. 더불어 몇 번 시리얼을 먹으며 우유를 먹기도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두유가 훨씬 익숙하고 맛있고 좋다. 우유는 비리다 으엑.
완전한 채식을 시도했고, 지금은 채식과 잡식의 중간에서 나만의 식습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거은 이전의 잡식으로 돌아 갈 수는 없다는 것. 이따금 원해서 육류제품들을 먹는 경우가 있는데 몸의 반응도 그러하고 논리적으로도 무언가 조화롭지 않고 이상하다는 반감이 든다. '고기를 먹어야한다'는 개념은 확실히 불합리하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 할 수 있다. 환경을 위해서라도 육식은 줄이는 것이 옳다. 곧이 채식도 아니고 잡식도 아닌 식성이 된 지금, 비논리적 위선적으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괜찮다. '채식을 해야해' 혹은 '채식 안 해' 라는 어떠한 강박관념 없이, 그저 '건강, 행복' 하리라.
The community has become one of the world's most important sites of Christian pilgrimage. Over 100,000 young people from around the world make pilgrimages to Taizé each year for prayer, Bible study, sharing, and communal work. Through the community's ecumenical outlook, they are encouraged to live in the spirit of kindness, simplicity and reconciliation.
Early years
The Taizé Community was founded by Frère Roger in 1940.[1] He pondered what it really meant to live a lif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began a quest for a different expression of the Christian life. A year after this decision Roger reflected, “‘The defeat of France awoke powerful sympathy. If a house could be found there, of the kind I had dreamed of, it would offer a possible way of assisting some of those most discouraged, those deprived of a livelihood; and it could become a place of silence and work.’” Because his Swiss homeland was neutral and thus less affected by the war, he felt as if France would be ideal for his vision. For Roger, France was a “land of poverty, a land of wartime suffering, but a land of inner freedom.” He eventually settled in Taizé, which was a small desolate village just north of Cluny, the birthplace of western monasticism.
In September 1940, Roger purchased a small house that would eventually become the home of the Taizé community. Only miles south of the separation line that divided a war-torn country in half, Roger’s home became a sanctuary to countless war refugees seeking shelter. On November 11, 1942, the Gestapo occupied Roger’s house while he was in Switzerland collecting funds to aid in his refuge ministry. Roger was not able to return to his home in Taizé until the autumn of 1944, when France was liberated.
In 1941, Roger had published a few small brochures outlining several facets of a Christ-centred communal life together. These brochures prompted two young men to apply, soon followed by a third. They all lived in Switzerland in a flat owned by Roger’s family until after the war when they began a new life together in the French countryside. Over the next few years several other men would join the community. On Easter day 1949, seven brothers committed themselves[2] to a life following Christ in simplicity, celibacy and community.[3]
[edit]Growth of the community and current situation
Brother Roger, founder of the Taizé Community, shown at prayer in 2003
In the years that followed, others joined. In 1969 a young Belgian doctor became the first Catholic brother to pledge his life to the community in Taizé. More brothers from Reformed, Anglican and Roman Catholic backgrounds joined the community. Soon the Brothers of Taizé were making trips to take aid to people in both rural and urban areas.[4] They began forming “fraternities” of brothers in other cities that sought to be “signs of the presence of Christ among men, and bearers of joy”. Since 1951, the brothers have lived, for longer or shorter periods, in small fraternities among the poor in India (chiefly Calcutta), Bangladesh, the Philippines, Algeria, Brazil, Kenya, Senegal, and the USA (Hell’s Kitchen in Manhattan, New York City).
At the age of 90, Brother Roger was murdered in 2005 in a knife attack by a mentally ill woman.[5] Brother Roger's funeral was attended by several dignitaries including the president of Germany and numerous religious leaders. The presider at his funeral was a Catholic cardinal, Walter Kasper. The funeral was attended by approximately 10,000 people.[6][7]
At the end of 2010, the community was composed of about one hundred brothers, from Protestant and Catholic traditions[8], who originate from about thirty countries across the world.[9] The community is currently led by Brother Alois, a German-born Catholic, who had been appointed by Brother Roger before his death on August 16, 2005.
In the 1960s young people began to visit the Taizé community. The first international young adults meeting was organized in Taizé in 1966 with 1400 participants from 30 countries.[citation needed]
The village church of Taizé, which had been used for the community's prayers, became too small to accommodate the pilgrims.[citation needed] A new church, the Church of Reconciliation, was built in the early 1960s with the help of volunteers, and expanded several times in the subsequent decades, first with tents, and then with simple wooden annexes.
In 1970, in response to student protests taking place all over Europe and the world, as well as the Second Vatican Council, Brother Roger announced a "Council of Youth",[10] whose main meeting took place in 1974.
At the end of the 1970s, the meetings and surrounding activities began to be referred to[who?] as a "Pilgrimage of Trust on Earth". The community decided to focus on youth.[citation needed]
Young adult meetings word wide: Pilgrimage of Trust on Earth
The Taizé Community attempts to send pilgrims back from youth meetings to their local churches, to their parishes, groups or communities, to undertake, with many others, a “Pilgrimage of Trust on Earth.”[15] Every year around New Year (usually from 28 December to 1 January), a meeting in a large European city attracts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young adults.[citation needed] It is organized by brothers of the Taizé Community, sisters of St. Andrew, and young volunteers from all over Europe, and from the host city.
The participants stay with local families or in very simple group accommodations. In the morning, they take part in a program organized by the parish closest to their accommodation. For their midday meal, all participants travel to a central location, usually the local exposition halls. The meal is followed by a common prayer, and the afternoon is spent in workshops covering faith, art, politics and social topics. In the evening, everyone meets again for the evening meal and an evening prayer.
In his "Unfinished Letter",[16] published after his death, Brother Roger is quoted to have proposed to "widen" the "Pilgrimage of Trust" originating from the Taizé community. As a result, international meetings for young adults have begun to take place, beginning with Kolkata in 2006. The program closely resembles the European meetings, though some aspects, such as the songs, are often adapted to the local culture.
Santiago de Compostela was originally founded by the Suebi in the early 400s, as part of the collapse of the Roman Empire. In 550 the whole settlement together with the rest of Galicia and northern Portugal was incorporated by Leovigild into the Visigothic kingdom of Spain. Raided from 711 to 739 by the Arabs, Santiago de Compostela was finally conquered by the Visigothic king of Asturias in 754, about 60 years before the identification of remains as those of Saint James the Great, and their acceptance as such by the Pope and Charlemagne, during the reign of Alfonso II of Asturias. Certainly, the remains were found in the small and close town of Iria Flavia, but they were moved to Santiago according to political and religious reasons. From then on, this settlement was not just a city, but a holy city, and one of the main centers of Christian pilgrimage. Still, there are some who claim that the remains found here were not those of the apostle James and one of the most famous theories is that these are the remains of Priscillian. They are also thought by many to be someone else altogether.
Santiago de Compostela was captured by the French during the Napoleonic War and its capture broke the spirits of the many Spanish guerillas who were fighting the mighty invading armies of Marshals' Soult, Victor, Massena and Napoleon's brother, the new King of Spain, Joseph Bonaparte (called Pepe Botella by the Spanish resistance). During the war, many attempts were made to recapture it by Spanish partisans, who believed St James would come down on the field and destroy the French if they earned his favour by beating the French out of the holy city, which was St James's city.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Santiago was under the control of the fascists since the very begining and it suffered from a very brutal repression during the inmediate years and the whole Dictatorship. After the Spanish Transition, when the democracy was restored, Santiago de Compostela was declared capital city of Galicia.
With a population of about 100,000 inhabitants, it's one of the most important cities of Galicia and the most touristic of them, receiving thousands of visitors every year, many of them attracted to the the ancient history and the religious tradition. It was declared by the UNESCO World Heritage Site because of its cathedral and old city center.
The University of Santiago de Compostela (USC) is one of the oldest Spanish universities and it has more than 40,000 students, making Santiago one of the centers of the university education in Spain, withSalamanca and Granada.
The climate of Santiago is typical of the Spanish Atlantic coast: wet winters with frequent rains which, in light or heavy bursts, lasts from September to June. The summers are slightly less rainy than the rest of the Cantabrian coast.
Temperatures remain mild throughtout the whole year with a yearly average of 19ºC. They drop down to about 8ºC in January, the coldest month of the year.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은 요즘처럼 발달된 문명화된 시대에 아무런 도움없이 총800km의 여정을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걸어가는 도보여행지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성야고보를 기리던 종교적인 순례길이었던 것이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종교적인 목적이외에도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게 하고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됨으로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새로운 가치 마저 부여해 주는 도보여행지로 우리에게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곳입니다. '왜 그렇게 힘든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물음에서 시작된 도보여행은 한 달여의 시간동안 '까미노(길)'를 걸으며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고 결국 우리의 인생길 또한 이 까미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랍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 그 출발점인 프랑스 생장피데포드(st.Jean Pied de port)에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는 순례자 등록을 하고 나면 비로소 순례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까미노 프란세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약 1,500m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스페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로 향하면서 시작됩니다. 해발 약 15,00m의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이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는 사람은 피레네 산맥 입구에 있는'오리손 산장'에서 1박을 하는 것이 좋답니다.
여행 TIP
오리손 예약 방법 : refuge.orisson@wanadoo.fr (이름, 예상숙박 날짜등을 간단하게 기재한 메일을 보내면 됩니다. 1박 30유로 (저녁, 아침 포함))
오리손에서 피레네 산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작하면 스페인땅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후는 시골과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풍경을 지나쳐 여러 소 도시를 지나 소몰이 축제의 도시로 유명한 팜플로나(Pamplona)를 지나 순례자 형상이 있는 페르돈 고개를 넘어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마을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거쳐 북쪽의 똘레또로 불리는 에스떼야(Estella)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행 TIP
걷는 것에 적응하기 위해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쉬어주는 게 좋고 식수, 음식 등은 미리 준비하고 알베르게(숙소)의 거리를 생각해 매일 걸어야 할 거리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스떼야(Estella)를 벗어날 즈음 무료로 포도주를 제공하는 이라체 수도원이 있습니다.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를 거쳐 포도밭 길을 지나 로그로뇨(Logrono)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걷는 것도 어느새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 '단지 걷고만 있어도 행복하다'라고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후 성당 안에 있는 닭 두마리의 울음을 들으면 순례길에 행운이 함께 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산토 도밍고 데 칼싸다(Santo tomingo de la calzada)를 지나게 됩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풍경과 자그마한 소도시의 풍경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첫 번째 구간의 목적지 부르고스(Burogos)에 도착합니다.
여행 TIP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부르고스에 도착할 쯤이면 한 번씩은 전부 몸져눕게 되는데 절대 무리하지 말고 부르고스에서 여유를 두고 이틀정도 쉬어가세요.
부르고스를 지나면 점점 더 순례에 충실하게 되고 '과연 나는 왜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될 즈음 메세테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메세타는 뜨거운 태양과 바람으로 인해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힘든 구간이랍니다. 우리나라에 산티아고 가는 길이 널려 알려지게 된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올로 코엘료가 머물렀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반추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순례자란 무엇일까? 끝도 없는 길에 대한 의문,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순례는 점점 진지해져만 갑니다. 과연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난 왜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요?
여행 TIP
메세타의 구간이 너무 힘들어 레온까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건너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 만나게 되고 길이 힘든 만큼 메세타가 주는 감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프로미스타를 지나면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지루하고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곳 없는 길이 도로를 따라, 마을 길을 따라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특히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면 피로의 강도는 심해지고 어깨 위에 놓인 짐도 더욱 무겁게만 느껴져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갑니다. 건조하기로 악명 높은 메세타이지만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까스티야 운하로 인해 하루 종일 자욱한 안개 속을 끝도 없이 걸어야 되는 길이기도 하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안개가 자욱해 보이지도 않는 길이 자신을 이끌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인생이란 자욱한 안개 같은 길이어서 늘 불안했던 마음이 메세타를 통해 안개 자욱한 길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채워가는 길인 듯 합니다.
여행 TIP
거쳐가는 도시들 가운데는 스페인의 문화유산을 가진 곳도 있으니 지나치지 말고 둘러보고 갈 것.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서부터 18km까지는 집도, 바(bar)도 카페도 물도 아무 것도 없는 힘든 길입니다. 여름이면 뜨거운 태양을 피할 그늘도 없으며 바람이 불면 엄청난 바람과 싸워야 하고 비가 오면 찰흙처럼 신발에 들러붙는 흙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메세타의 가장 고달픈 길이자 순례에 가장 충실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걷는 날이 쌓일수록 근육통에 피로누적까지 겹치니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말을 걸어오고 자신과의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메세타의 종점에 도착해 힘들게 걸어온 메세타 200km를 돌아봅니다. 좋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고 맑은 날이 있으면 안개가 끼는 날이 있었듯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메세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온(Leon)을 지나면 걸어야 할 길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마음이 더 바빠지는 것 같습니다. 마을을 지날 때면 드문드문 메세타를 힘들게 걸어온 순례자의 초췌한 형상의 조형물을 보게 되는데 피곤에 지친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길은 계속 도로로 이어지며 크고 작은 마을들을 쉼 없이 지나 도시의 언덕을 오르면 고대의 도시 아스트로가(Astroga)를 만나게 됩니다.
여행 TIP
레온을 벗어나 약 8km 지점에 있는 비르겐 델 까미노(Virgen del camino)에서 산 마르띤으로 가는 길과 마사리페길로 나뉘었다가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서 다시 합쳐집니다.
이제부터는 고도는 점점 높아지면서 산악지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떡갈나무 군락을 지나 산 중턱에 몇 가구 살지 않는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는 우리나라 경북 왜관에 있는 성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운 곳으로 형제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바날에서 출발해 약 6km의 산길을 올라가면 거대한 철 십자가가 있는데 바로 까미노 여정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을 염원하는 장소, 폰세바돈입니다. 중세시대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놓고 기원을 한 것에서 유래가 되어 오늘날 순례자들도 고향에서 돌을 가지고 올 뿐 아니라, 사진, 반지, 쪽지 등 의미 있는 물건을 놓고 순례길에서 자신이 내려놓자 하는 삶의 무게와 소원을 비는 특별한 곳입니다. 폰세바돈을 지나 페허가 되어 버린 마을 만하린을 거쳐 해발 1,147m의 산을 넘어 템플기사단의 성벽이 있는 폰페라다(ponferrada)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행 TIP
라바날에 있는 성당은 그레고리 성가로 진행되는 미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성당으로 이곳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공립알베르게는 2틀정도 묵어갈 수 있습니다. (오픈시기 : 4월1일~10월31일)
폰페라다를 지나면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펼쳐지며 스페인에서 보는 마지막 포도밭을 지나 까까벨로스(cacabelos)까지 이어지고 이후부터는 조그만 마을들을 수없이 지나 해발 1,296m의 정상에 있는 오 세브레이로까지 이어집니다. 레온 지방과 루고 지방을 경계하는 비석을 지나면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서게 됩니다.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마을로 성체와 성배의 기적으로 유명한 마을이며 이곳의 전통적인 가옥인 빠요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행 TIP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것이 부담된다면 배낭만 오세브레이로까지 보내주는 택시 서비스 이용 가능.
배낭서비스는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 등 여러 마을에 이용 가능하며 거리에 따라 가격이 다릅니다.
오 세이브레이로를 지나면 기후가 달라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비 내리고 눈 오는 갈리시아 지방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형적인 목가풍의 경치가 쉼 없이 이어지고 어느새 산티아고까지 100km만 남았다는 비석을 보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매일이 너무 힘들고 너무 고달파서 걷는 게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지나온 길들이 그립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젠 체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저녁이면 내일은 정말 더는 못 걷겠다 싶은데 아침이면 또 어느새 걷기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길은 아무래도 어떤 힘을 가진 길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리아를 지나 민미뇨 강 언덕에 있는 포르트마린(Portomarin)에 들어서면 환상적인 경치로 인해 걷기의 피곤함도 잠시 잊게 되고 뽈보(문어)가 유명한 멜리데에서 까미노 중에 만났던 사람들도 마지막 만찬을 즐깁니다.
여행 TIP
트리아까스델라(Triacastela)에서부터 사리아(saria) 까지는 산 실(San xil)을 거쳐 가는 길과 사모스(Samos)를 거쳐가는 길 두 군데로 나뉘게 되는데 둘 다 경치가 아름답지만 사모스가 조금 더 가깝습니다.
마지막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하는 길은 온통 푸른 목초지와 유칼립투스가 차지하고 있는 길을 걸어 산티아고를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기쁨의 언덕, 몬테도고조(monte do Gozo)에 도착합니다. 몬테도고조 언덕에는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으며 대단위 숙박시설이 있어 지금까지 차분했던 순례와는 다른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카데드랄(대성당)에 도착하면 모든 순례는 끝이 납니다. 비록 산티아고를 걷고 난 뒤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떠난 여행에서 만난 건 '나' 였습니다. 길을 걸으며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성취감과 자신감은 남은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여행 TIP
순례자들은 성당의 첫번째‘영광의 문’을 만지고 기도를 하고 성당 내부에 있는 성 야고보 상의 어깨에 손을 얹는 의식을 통해 순례를 마치는 의식을 합니다.
피스테라(Fisterra)는 이베리아의 끝에 있는 곳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순례는 끝나기 때문에 대부분이 버스를 이용하게 됩니다. 산티아고에서 묵시아를 거쳐 피스테라까지 (약 120km) 도보로 약 4~5일 정도는 예상을 해야 된답니다. 사람들은 피스테라에 도착하면 순례길 중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마지막 까미노를 정리하는 의식으로 태우게 되고 대성당에서 느꼈던 감동들과 또 다른 감동을 느끼며 전체적인 순례를 마무리하게 된답니다.
여행 TIP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 버스 : 요금 편도 12.05유로, 약 3시간 소요(혹시 4명 정도 같이 갈 수 있으면 택시를 타는 것이 편합니다.)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걸어온 순례자들에게는 피스테라 순례자 증명서를 따로 발급해 줍니다.
알베르게도 있으나 걸어온 순례자에게만 제공되며 해변가에 있는 식당은 모두 해산물이 맛있습니다.
'노래 너무 좋다' 했는데 제목이 Sad and Lonely .. 무언가 슬프다 하하 그래도 좋은 음악은 좋은 음악. 앨범 제목도 좋다 The Less You Know the Better . 가사도 보컬 목소리도 편안하고 진심되고 좋다. 첼로와 건반 소리가 로로스 느낌 .. 공연 보구싶다 DJ Shadow 도 보구싶구 Lolos 도 보구싶구.
The Book of Mormon Broadway 가 투어 중이다. Seattle 공연 날짜는 예보되었지만 티켓발매는 아직이던지라 꼭 봐야지 마음 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티케팅이 시작되었다. 표 값을 보고 순간 망설였다, 비싸서. 하지만 youtube 에서 몇 영상을 찾아보니, 이건 봐야해 라는 마음이 절로든다. 비디오 몇 만 보아도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연습의 시간과 극의 완성도가 보인다. 바로 예매. 신난다 ! Broadway 공연들 중 실망한 것들도 있었다. 이번 극은 그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가된다.
Southpark 제작자가 만든 극인만큼 상당히 웃기다. 웃기다는 것이 가장 주요 평판이다. Mormon 이라는 종교와 시대를 주제삼은 풍자극. 생각만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하하, 이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극이니 돈이 아깝지 않다. 극 자체도 기대만큼 재미지기를 !
9월의 첫 날. 카페에 커피와 쿠키를두고 앉아있다. 전 룸메이트와 친구들이 개를 데리고 들어온다. 옆 자리 남학생이 곁눈질을한다. 친구가 한국에서 중부로 돌아오는 길에 시애틀을 경유한다고한다. 1152시, 소소하고 느긋한 토요일의 아침이다.
아침이 그러하듯 새 해가 그러하듯 월요일이 그러하듯, 새로운 다짐들, 무엇인가를 새로이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히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분리 될 수 없더라. 하지만 오늘을 어제의 연장선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제는 너무나 불합리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어렵고 힘들었으니 어제는 오늘과 무관히 별개인 존재로 잊고 싶다. 어찌 되었건, 오늘은 오늘이고 오늘은 9월의 첫 날이다. 새 것이고 깨끗하고 완벽한 새로운 달이다.
근래 에버노트로 기록을 남긴다. 일기라기보다 하루의 진행 상황, 나의 하루에 담겨있는 것들 하나하나를 기록한다. 더불어 내일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 또한 남긴다. 분명 어젯 밤 내가 남긴 글인데 다음 날 아침에 발견하면 반갑고 고맙고 즐겁다. 자신에게 주는 매일의 선물.
오후에는 속옷 쇼핑을 가야겠다.
guess what? you're not tired!
마켓에서 antipasto 코너에서 주방장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치즈를 먹어보고 골랐다. 친절하고 배에 인심이 두둑하신 주방장. 재미있었다. 몇 종류 치즈들과 몇 종류의 크래커, 올리브와 antipasto 거리들, 요거트와 바게트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를타고 집에 가는 길에 언덕을 덜컹하지 음식들이 가득하던 종이 봉지가 찢어졌다. 녀석들을 주섬주섬 들고 자전거를 손으로 이끌며 집으로 도착. 집 가까이서 튿어져 다행이다. 이번 달 액땜한 기분. 샤워를하고 부엌을 얼추 정리하고 저녁을 먹는다. 배가 부르니 피곤피곤. instagram 을 보던 중 눈에 띄는 글귀 "guess what? you're not tired!" 상당히 refreshing 한 문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곤하다'라는 생각을 하는지. 하지만 피곤하지 않음을, 기운 낼 수 있음을 기억하자 :) 무튼 이렇게 저렇게 카페에 도착. 매일 오는 카페인지라 매일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이제 눈에 익는다. 그제 본 귀요미가 앞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트레이닝 바지를 입으신 귀요미 .. 깬다. 하지만 나도 오늘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왔음을 하하. 이 동네가 점점 굉장히 편안해지고 있다, 휘유. 트레이닝복이 편하기는 편하구나 하하. Zen tea 한 잔 마시며 마음도 몸도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있다, 행복한 주말.
특별히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를 만났다. 만남은 생각만큼 이상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무엇인가 응어리가 남아 걸림돌이 된다. 오랜 시간을 앉아있지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젠가는 이야기하고 싶은 기회가 있겠지.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지겠지. 이 모든 것이 과정이고 특별히 어렵지 않고 대수롭지 않음을 기억하며, 하루를 오늘의 해프닝을 넘긴다.
얼추 공부 마무리하구 집가서 쉬어야지 하하.
새로운 달, 9 월. 역시나 시작은 행복하고 완벽하다.
it takes time to heal, but won't take forever
몇 일 전의 실수가 천천히 heal 치유 되고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상쾌하고 말끔 할 수는 없지만 이틀 삼일, 일주일 이주일 천천히 언젠가는 완전한 치유가온다. 햇빛이 따듯하고 카페에 여유로운 사람들이 많으며 편안하고 완벽한 일요일의 오후. 오랜만에 Talib Kweli 를 들으며 쿵덕쿵덕 신이 났다. :) smile lots, be happy, love.
연애하구싶다, 귀요미랑.
leave records of everything nice, and nothing else.
창준에게 피곤하다 징징대니, 기운내라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는 없다며, 한국과 미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학원과 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 살고싶은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사랑 귀요미 동생 덕분에 기운이 쑥쑥난다. 오늘은 좀 어떠냐며 먼저 문자가왔다, 상큼이. 겨울방학동안 무엇을 할지 이야기 나눈다. 녀석과 보내고 싶은데, 즐거운 겨울을 만들고싶다. 좋은 것만 기록에 남기고 좋지 않은 기록은 남기지 않을테야, 내가 쓰는 나의 일기 나의 기록, 극의 긍정으로 편협하게 남길테야!
친구들이 떠난 이 도시는, 이 나라는 크게만 텅 비게만 느껴진다. 오늘 혼자 있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있게 되었다. 기분은 좋다. 맛있는 브런치를 사먹구 편안한 마음으로 카페에 앉아있다. 나와 더불어 매일 오는 다른 카페 everyday goer 들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종종 너무 추워서 자주 집에가는데 오늘은 종일 앉아있을 예정이다. 옷도 다섯겹이나 입고왔다 크하하! 아프던 내 자신을 응원하고 추운 나에게 옷을 입혀주고 웃음을 선물하는 내가 나는 웃기다 좋다 하하. 윤영 기운내 괜찮아 괜찮아 잘 지내고있어!
오랜만에 듣는 힙 to the hip, 쿵덕쿵덕 너무 좋다 탈립콸리. 모든 앨범이 모든 곡이 좋다, 이 따위 어메이징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거지 .. 이야 말로 대 to the 박.
카페 옆테이블 녀석 귀엽다. 자리도 얼마 없는 자리에 앉겠다구 들어와 앉더니 facebook 한참 보더니 online dating site 뚫어져라 보고있다 모니터에 흡수될 듯 크크. San Francisco 사는 친구가 Seattle 왔다고 문자가왔다, 내일 간단다 하하. 모든 사람들이 귀여운걸보니 내 기분이 좋구마잉 하하. 브런치가 소화되는지 출출하다 1544시.
요즘 tv show 들을 몇가지 보는데 재미있다. 웃음을 주는데 어떻게 싫겠는가 하하.
do not hold a grudge. always be honest.
잠이 오지 않아 약을 먹는데 효과가 상당히 좋다. 잠을 푸욱 늦은 오전까지 깨지 않고 자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하지만 상쾌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 약에 면역력이 생길까 걱정되는 와중 SNS 에 약을 먹는다고 올리니 면역력과 더불어 기억력손실을 우려하신다. 면역력은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지만 기억력 .. 결코 낭비하고싶지 않은 소홀 할 수 없는 asset 이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뇌. 먹지 말아야겠다 약, 오늘부터 먹지 않겠다 약. 나의 몸을 뇌를 소중히 다루자 아끼자.
labor day 로 닫았던 gym 이 3일만에 문을 열어 운동을 갔다. 역시나 운동만큼 좋은 것이 없다. 물을 마시고 시작한 운동, 왜인지 속이 불편한 것이 모든 것은 나의 업보이다. process of healing 시간이 필요 할 것이다. 몸을 함부로 다룬만큼 불편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건강히 버티어 준 것이 오히려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는 더이상 아플 수 없다, 체력적으로 소진되어 바닥을 기고있는 지금이다. 여기서 이 이상으로 아플 수는 없는 것, 나의 몸을 마음을 건강을 정신을 사랑해주고 위해주어야한다. 고마운 나, 잘 지내는 나,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맙다 표현하듯, 나에게도 고마움을 소중함을 표현하며 실천하자. 건강하자, 이제는 제발.
매일 오는 카페, 하루 중 대여섯시간은 여기 앉아 보낸다. 매일 오는 멤버들이 이제 눈에 익는다. 그 중 한 분은 40 대 중반의 작은 안경을 낀 동양여자. 맥 에어와 음식을 잔뜩 챙겨와서 앉아 종일 스크린을 쳐다보며 음식을 먹으며 전화통화를하며 여기에 산다. 언젠가 나에게 말을 걸어 본인은 약사라고 이야기하였따. 그 후로 매일 만나는 우리는 눈인사를 나눈다. 그녀는 몸집이 작으며 발음이 정확하고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을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지만 그녀를보며, 나는 저렇게 나이들고싶지 않다,는 생각이든다. 그녀는 움직임이 빠르고 분명 혼자 생활 할 것이라는 확신이든다. 혼자 지내는 싱글들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혼자이고 싶지 않다, 결혼할래 애두 낳구. 베이비 윤영 뭐 이런거. 카페 6시간째 앉아있는 중. 옆자리 동양여자분 나보다 이르게 오셨데 아직도 계시다. 컴퓨터로 online dating 사이트 탐방하시더니 신용카드를 꺼내시어 무언가 결제를하시더니 여전히 사이트를 열심히 들여다보신다 .. 마음이 좀 한 숨 길게 휘유, 안타깝다.
성공은 지금이라는 구혜선의 인터뷰를 보았다. 어떠한 목적지가 아닌 하루하루의 상태. 공감한다, 어디를 가는지가 아닌 어떻게 가는지가 중요하다. 여행을 떠나고싶은 9월이다. 졸업이 다가온다, 남은 과정을 보람되게 아름답게 지낼 것이다 :) smile, be happy, love, enjoy every day. 요즘 상당히 규칙적인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매일가는 운동도 즐겁고 윗몸일으키기의 갯수도 늘고있고 갈 길은 멀지만 온 길도 제법이다. 행복하다 매일 종일 every single day all day long. 이 완벽한 9월의 첫 주라는 '시작'에 서서, 행복함을 안고지내는 요즘, 툭 치면 울 것 같으나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무어지 이 어중간함은 .. 무관히 행복하게 웃을 수 있따 :)
조지 오웰의 "1984" 는 1949년 작이고 알도스 헉스리의 Brave New World "멋진 신세계" 는 1931년 작이다. 하지만 나는 1984 를 먼저 읽었다. 둘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헉스리의 멋진 신세계는 1984를 연상케하고, 더불어 1984만큼의 신선한 감동을 주지 못 하였다. 두 책을 읽었던 순서가 달랐더라면 이와같은 느낌도 달랐을까? 돌릴 수 없는 시간, 절대 알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