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로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 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유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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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video ever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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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Priscilla Chan?

Mark Zuckerberg and Priscilla Chan welcome daughter Max

Dr. Priscilla Chan has kept a low profile over the past few years, but that will prove harder to do now.

The 30-year-old pediatrician just gave birth to her first child Max, a daughter, with husband Mark Zuckerberg, Facebook's founder and CEO.

She is cofounder and CEO of a new nonprofit private school in East Palo Alto called The Primary School, due to open next year.

And her name is attached to a new limited liability company -- the Chan Zuckerberg Initiative -- to fund nonprofits and "[participate] in policy debates" that help "advance human potential and promote equality." In announcing their daughter's birth, the couple also pledged to donate 99% of their Facebook stock -- worth about $45 billion -- "during our lives" to promote equality and the human potential.

Chan gave her first national TV interview to The Today Show's Savannah Guthrie last year, but up until then had avoided media appearances and posting publicly to her Facebook page.

Chan's childhood

In the interview, Chan talked about her past and how it influences her.

Priscilla Chan grew up in Quincy, Massachusetts, a town outside of Boston. Her parents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refugee boats, she told Guthrie.

Chan is the oldest of three girls, and the first in her family to go to college.

Her mother worked two jobs her entire childhood. On The Today Show, she recounted how she grew up speaking Cantonese and served as a translator for her grandparents, who didn't speak English.

Chan graduated from Quincy High School in 2003 as class valedictorian, and her classmates voted her "class genius."

As a kid, Chan recalled being "really uptight," telling Guthrie: "I bossed my middle sister around all the time."

Chan's college and professional life

Chan attended Harvard University from 2003 to 2007, where she met and started dating Zuckerberg. She earned a BA in biology and studied Spanish.

According to her Facebook profile, she moved to San Jose, California, after graduation and worked for a year as a science teacher for fourth and fifth graders at the Harker School, a private school.

Chan then started medical school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in 2008.

She graduated around the time she married Zuckerberg, which was on May 19, 2012, the day after Facebook went public.

She finished her residency in pediatrics this summer, and works at San Francisco General Hospitalas a pediatrician.

"Congratulations to Dr. Priscilla Chan for finishing your medical residency today! I'm so proud of you for all of the lives you've saved and families you've touched," Zuckerberg said about his wife on Facebook.

Chan's philanthropic projects

Chan's charitable goals are tied closely to her personal and professional backgrounds: mainly education, healthcare and science.

Together with her husband, Chan has donated more than $320 million to school systems, educational nonprofits and hospitals over the past few years.

Next year, she'll launch The Primary School, a nonprofit private institution that will provide K-12 education, prenatal support and on-site healthcare.

"For the past year, our small team has been working with East Palo Alto and Belle Haven families, educators and leaders to develop a model to address these complex needs," Chan wrote in October.

Most recently, the couple donated $75 million to San Francisco General Hospital's new trauma center and acute care wing named after them.

The two also gave out awards for the Breakthrough Prize, a nonprofit organization they helped launch that grants winners $3 million for various scientific achievements.

"Priscilla and I helped create the Breakthrough Prize because we believe that scientists should be recognized as heroes," Zuckerberg said in a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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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 you have a back up plan, you admit to failure."

"you cannot get a test done and paid for by insurance unless you're symptomatic for a given disease." 




Elizabeth Holme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lizabeth Holmes
BornFebruary 1984 (age 30)
Washington, D.C.
ResidencePalo Alto, California
NationalityAmerican
Alma materStanford University (dropped out)
Net worth$4.5 billion[1]
TitleFounder & CEO, Theranos
Term2003–present
Website
theranos.com

Elizabeth Holmes (born 1984) is an American health technology entrepreneur.[2] She is the founder and CEO of Theranos, a health technology and medical laboratory services company.

Early life[edit]

Elizabeth Holmes was born in February 1984 in Washington, D.C.. Her father, Christian Holmes IV, worked in the United StatesAfrica and China as part of government agencies such as USAID. Her mother, Noel Anne (Daoust),[3] worked as a Congressional committee staffer. She has a brother, Christian Holmes V, who is the director of product management at Theranos. One of her ancestors was a founder of the Fleischmann's Yeast company.[4] She is related to actress Katherine MacDonald who was married to Christian Rasmus Holmes II (1898-1944).

As a child, she read the biography of her great-great-grandfather Christian R. Holmes, who was a surgeon, engineer, inventor and a decorated World War I veteran. He was born in Denmark in 1857 and was the dean of the University of Cincinnati College of Medicine,[5] where a hospital is named after him. The career of her ancestor inspired Elizabeth to take up medicine, but she soon found that she had a fear of needles.[4] She later described this fear as one of her motivations to launch Theranos.[6]

When she was 9, her family moved to Houston, where her father had taken up a job with Tenneco. Intrigued by their father's work in China, Elizabeth and her brother learned Mandarin Chinese at a young age.[4] She spent her teenage years in China, and while still in school, started a business selling C++ compilers to Chinese universities.[7][4]

Education[edit]

In 2002, Holmes enrolled at Stanford University to study chemistry. As a freshman, she was named one of the "President's Scholars" and given a stipend of $3,000 to pursue a research project. She persuaded her chemical engineering professor, Channing Robertson,[4] to use the money for a project in his lab.

Holmes supplemented her childhood knowledge of Mandarin with summer language programs at Stanford. This helped her obtain an internship at the Genome Institute of Singapore. The Institute was working on developing new methods to detect the SARS coronavirus in blood or nasal swabs.

After her return to the US, she wrote a patent application on a wearable patch that would help administer a drug, monitor the variables in the patient's blood and adjust the dosage to achieve the desired effect. She showed her application to Professor Robertson, and told him they could put a cellphone chip on this patch for telemedicine.[4] She filed the patent application in September 2003, as "Medical device for analyte monitoring and drug delivery".

Business career[edit]

Holmes proposed establishing a company to Professor Robertson in the fall of 2003, while she was a 19-year old sophomore at Stanford. She used the money that her parents had saved for her education, to establish Real-Time Cures in Palo Alto. Later, she changed the company's name to Theranos (an amalgam of "therapy" and "diagnosis"), because she believed that many people had a cynical reaction to the word "cure".[4] Initially, she worked out of a basement of a group college house.[2] A semester later, she dropped out to pursue her business career full-time. Professor Robertson served as a Director of the company.

Over the next decade, the company grew gradually, raising $400 million from Draper Fisher Jurvetson and Larry Ellison, among others. During this time, Theranos operated in "stealth mode", remaining highly secretive to avoid potential competitors and investors who could fund a competitor. In 2007, it took three former employees to court, accusing them of misappropriating trade secrets.[7]

By 2014, the company offered 200 tests and was licensed to run in every state of the US.[4] It had 500 employees and was valued at more than $9 billion. Holmes retained control of more than 50% of the company's equity.[8]

As of 2014, Holmes has 18 US patents and 66 non-US patents in her name and is listed as a co-inventor on over a hundred patent applications.[4] Holmes is the youngest self-made female billionaire on the Forbes 400 list, where she is #111; her net worth is an estimated $4.5 billion.[1]

http://en.wikipedia.org/wiki/Elizabeth_Hol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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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아닌 진정성, 슬픔을 웃김으로 위장 .. 에너지 시간을 한 틈도 아끼지 않았던 아름다웠던 그의 표현들 .. 이 기록으로나마 남아 다행. 


스스로 죽음을 원했다니, 그의 모든 퍼포먼스가 슬픔으로 다가온다, 슬픔. 


his self induced death transformed all his performances into sadness. 








i remember thinking he is the most insane man ever, might be true.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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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bsolutely beautiful, the best 





https://www.ted.com/talks/john_wooden_on_the_difference_between_winning_and_success 

I coined my own definition of success in 1934, when I was teaching at a high school in South Bend, Indiana, being a little bit disappointed, and delusioned perhaps, by the way parents of the youngsters in my English classes expected their youngsters to get an A or a B. They thought a C was all right for the neighbors' children, because the neighbors children are all average. But they weren't satisfied when their own -- would make the teacher feel that they had failed, or the youngster had failed. And that's not right. The good Lord in his infinite wisdom didn't create us all equal as far as intelligence is concerned, any more than we're equal for size, appearance. Not everybody could earn an A or a B, and I didn't like that way of judging it.

0:54And I did know how the alumni of various schools back in the 30s judged coaches and athletic teams. If you won them all, you were considered to be reasonably successful -- not completely. Because I found out -- we had a number of years at UCLA where we didn't lose a game. But it seemed that we didn't win each individual game by the margin that some of our alumni had predicted and quite frequently I -- (Laughter) -- quite frequently I really felt that they had backed up their predictions in a more materialistic manner. But that was true back in the 30s, so I understood that. But I didn't like it. And I didn't agree with it. And I wanted to come up with something that I hoped could make me a better teacher, and give the youngsters under my supervision -- whether it be in athletics or in the English classroom -- something to which to aspire, other than just a higher mark in the classroom, or more points in some athletic contest.

1:51I thought about that for quite a spell, and I wanted to come up with my own definition. I thought that might help. And I knew how Mr. Webster defined it: as the accumulation of material possessions or the attainment of a position of power or prestige, or something of that sort -- worthy accomplishments perhaps, but in my opinion not necessarily indicative of success. So I wanted to come up with something of my own.

2:14And I recalled -- I was raised on a small farm in Southern Indiana and Dad tried to teach me and my brothers that you should never try to be better than someone else. I'm sure at the time he did that, I didn't -- it didn't -- well, somewhere, I guess in the hidden recesses of mind, it popped out years later. Never try to be better than someone else, always learn from others. Never cease trying to be the best you can be -- that's under your control. If you get too engrossed and involved and concerned in regard to the things over which you have no control, it will adversely affect the things over which you have control. Then I ran across this simple verse that said, "At God's footstool to confess, a poor soul knelt, and bowed his head. 'I failed!' He cried. The Master said, 'Thou didst thy best, that is success.'"

3:01From those things, and one other perhaps, I coined my own definition of success, which is: peace of mind attained only through self-satisfaction in knowing you made the effort to do the best of which you're capable. I believe that's true. If you make the effort to do the best of which you're capable, to try and improve the situation that exists for you, I think that's success. And I don't think others can judge that. I think it's like character and reputation. Your reputation is what you are perceived to be; your character is what you really are. And I think that character is much more important than what you are perceived to be. You'd hope they'd both be good, but they won't necessarily be the same. Well, that was my idea that I was going to try to get across to the youngsters.

3:43I ran across other things. I love to teach, and it was mentioned by the previous speaker that I enjoy poetry, and I dabble in it a bit, and love it.There are some things that helped me, I think, be better than I would have been. I know I'm not what I ought to be, not what I should be. But I think I'm better than I would have been if I hadn't run across certain things. One was just a little verse that said,

4:06"No written word, no spoken plea can teach our youth what they should be. Nor all the books on all the shelves -- it's what the teachers are themselves."

4:18That made an impression on me in the 1930s. And I tried to use that more or less in my teaching, whether it be in sports, or whether it be in the English classroom. I love poetry and always had an interest in that somehow. Maybe it's because Dad used to read to us at night. Coal oil lamp -- we didn't have electricity in our farm home. And Dad would read poetry to us. So I always liked it. And about the same time I ran across this one verse, I ran across another one. Someone asked a lady teacher why she taught. And she -- after some time, she said she wanted to think about that. Then she came up and said,

5:01"They ask me why I teach and I reply, 'Where could I find such splendid company?' There sits a statesman, strong, unbiased, wise; another Daniel Webster, silver-tongued. A doctor sits beside him, whose quick steady hand may mend a bone, or stem the life-blood's flow. And there a builder. Upward rise the arch of a church he builds, wherein that minister may speak the word of God and lead a stumbling soul to touch the Christ. And all about a gathering of teachers, farmers, merchants, laborers: those who work and vote and build and plan and pray into a great tomorrow. And I may say, I may not see the church, or hear the word or eat the food their hands may grow. But yet again I may. And later I may say, I knew him once, and he was weak, or strong, or bold or proud or gay. I knew him once, but then he was a boy. They ask me why I teach and I reply, 'Where could I find such splendid company?'"

5:55And I believe the teaching profession -- it's true, you have so many youngsters. And I've got to think of my youngsters at UCLA -- 30-some attorneys, 11 dentists and doctors, many, many teachers and other professions. And that gives you a great deal of pleasure, to see them go on. I always tried to make the youngsters feel that they're there to get an education, number one. Basketball was second, because it was paying their way, and they do need a little time for social activities, but you let social activities take a little precedence over the other two and you're not going to have any very long. So that was the ideas that I tried to get across to the youngsters under my supervision.

6:38I had three rules, pretty much, that I stuck with practically all the time. I'd learned these prior to coming to UCLA, and I decided they were very important. One was -- never be late. Never be late. Later on I said certain things -- I had -- players, if we're leaving for somewhere, had to be neat and clean. There was a time when I made them wear jackets and shirts and ties. Then I saw our chancellor coming to school in denims and turtlenecks, and I thought, not right for me to keep this other. So I let them -- just they had to be neat and clean. I had one of my greatest players that you probably heard of, Bill Walton. He came to catch the bus; we were leaving for somewhere to play. And he wasn't clean and neat, so I wouldn't let him go. He couldn't get on the bus. He had to go home and get cleaned up to get to the airport. So I was a stickler for that. I believed in that. I believe in time -- very important. I believe you should be on time. But I felt at practice, for example, we start on time, we close on time.The youngsters didn't have to feel that we were going to keep them over.

7:47When I speak at coaching clinics, I often tell young coaches -- and at coaching clinics, more or less, they'll be the younger coaches getting in the profession. Most of them are young, you know, and probably newly married. And I tell them, "Don't run practices late. Because you'll go home in a bad mood. And that's not good, for a young married man to go home in a bad mood. When you get older, it doesn't make any difference." But --

8:09(Laughter)

8:14So I did believe on time. I believe starting on time, and I believe closing on time. And another one I had was, not one word of profanity. One word of profanity, and you are out of here for the day. If I see it in a game, you're going to come out and sit on the bench. And the third one was, never criticize a teammate. I didn't want that. I used to tell them I was paid to do that. That's my job. I'm paid to do it. Pitifully poor, but I am paid to do it. Not like the coaches today, for gracious sakes, no. It's a little different than it was in my day. Those were three things that I stuck with pretty closely all the time. And those actually came from my dad. That's what he tried to teach me and my brothers at one time.

8:57I came up with a pyramid eventually, that I don't have the time to go on that. But that helped me, I think, become a better teacher. It's something like this: And I had blocks in the pyramid, and the cornerstones being industriousness and enthusiasm, working hard and enjoying what you're doing, coming up to the apex according to my definition of success. And right at the top -- faith and patience. And I say to you, in whatever you're doing, you must be patient. You have to have patience to -- we want things to happen. We talk about our youth being impatient a lot. And they are. They want to change everything. They think all change is progress. And we get a little older -- we sort of let things go. And we forget there is no progress without change. So you must have patience. And I believe that we must have faith. I believe that we must believe, truly believe. Not just give it word service; believe that things will work out as they should, providing we do what we should. I think our tendency is to hope that things will turn out the way we want them to much of the time. But we don't do the things that are necessary to make those things become reality.I worked on this for some 14 years, and I think it helped me become a better teacher. But it all revolved around that original definition of success.

10:18You know a number of years ago, there was a Major League Baseball umpire by the name of George Moriarty. He spelled Moriarty with only one 'i'. I'd never seen that before, but he did. Big league baseball players -- they're very perceptive about those things, and they noticed he had only one 'i' in his name. You'd be surprised how many also told him that that was one more than he had in his head at various times.

10:43(Laughter)

10:45But he wrote something that I think he did while I tried to do in this pyramid. He called it "The Road Ahead, or the Road Behind." "Sometimes I think the Fates must grin as we denounce them and insist the only reason we can't win, is the Fates themselves that miss. Yet there lives on the ancient claim: we win or lose within ourselves. The shining trophies on our shelves can never win tomorrow's game. You and I know deeper down, there's always a chance to win the crown. But when we fail to give our best, we simply haven't met the test, of giving all and saving none until the game is really won; of showing what is meant by grit; of playing through when others quit; of playing through, not letting up. It's bearing down that wins the cup. Of dreaming there's a goal ahead; of hoping when our dreams are dead; of praying when our hopes have fled. Yet losing, not afraid to fall, if bravely we have given all. For who can ask more of a man than giving all within his span. Giving all, it seems to me, is not so far from victory. And so the fates are seldom wrong, no matter how they twist and wind. It's you and I who make our fates -- we open up or close the gates on the road ahead or the road behind."

11:51Reminds me of another set of threes that my dad tried to get across to us. Don't whine. Don't complain. Don't make excuses. Just get out there, and whatever you're doing, do it to the best of your ability. And no one can do more than that. I tried to get across, too, that -- my opponents don't tell you -- you never heard me mention winning. Never mention winning. My idea is that you can lose when you outscore somebody in a game. And you can win when you're outscored. I've felt that way on certain occasions, at various times. And I just wanted them to be able to hold their head up after a game. I used to say that when a game is over, and you see somebody that didn't know the outcome, I hope they couldn't tell by your actions whether you outscored an opponent or the opponent outscored you.

12:42That's what really matters: if you make effort to do the best you can regularly, the results will be about what they should be. Not necessary to what you would want them to be, but they will be about what they should, and only you will know whether you can do that. And that's what I wanted from them more than anything else. And as time went by, and I learned more about other things, I think it worked a little better, as far as the results. But I wanted the score of a game to be the byproduct of these other things, and not the end itself. I believe it was -- one great philosopher said -- no, no, Cervantes. Cervantes said, "The journey is better than the end." And I like that. I think that is -- it's getting there. Sometimes when you get there, there's almost a letdown. But there's getting there that's the fun. I liked our -- as a basketball coach at UCLA I liked our practices to be the journey, and the game would be the end. The end result. I'd like to go up and sit in the stands and watch the players play, and see whether I'd done a decent job during the week. There again, it's getting the players to get that self-satisfaction, in knowing that they'd made the effort to do the best of which they are capable.

14:03Sometimes I'm asked who was the best player I had, or the best teams. I can never answer that, as far as the individuals are concerned. I was asked one time about that, and they said, "Suppose that you in some way could make the perfect player. What would you want?" And I said, "Well, I'd want one that knew why he was at UCLA: to get an education, he was a good student, really knew why he was there in the first place.But I'd want one that could play, too. I'd want one to realize that defense usually wins championships, and would work hard on defense. But I'd want one that would play offense too. I'd want him to be unselfish, and look for the pass first and not shoot all the time. And I'd want one that could pass and would pass.

14:51(Laughter)

14:52I've had some that could and wouldn't, and I've had some that would and couldn't.

14:56(Laughter)

15:00I wanted them to be able to shoot from the outside. I wanted them to be good inside too.

15:05(Laughter)

15:08I'd want them to be able to rebound well at both ends, too. And why not just take someone like Keith Wilkes and let it go at that. He had the qualifications. Not the only one, but he was one that I used in that particular category, because I think he made the effort to become the best [unclear].

15:27I mention in my book, "They Call Me Coach." Two players that gave me great satisfaction; that came as close as I think anyone I ever had to reach their full potential: one was Conrad Burke. And one was Doug McIntosh. When I saw them as freshmen, on our freshmen team -- we didn't have -- freshmen couldn't play varsity when I taught. And I thought, "Oh gracious, if these two players, either one of them" -- they were different years, but I thought about each one at the time he was there -- "Oh, if he ever makes the varsity, our varsity must be pretty miserable, if he's good enough to make it." And you know one of them was a starting player for a season and a half. The other was -- his next year, he played 32 minutes in a national championship game, did a tremendous job for us. And the next year, he was a starting player on the national championship team. And here I thought he'd never play a minute, when he was -- so those are the things that give you great joy, and great satisfaction to see one. Neither one of those youngsters could shoot very well. But they had outstanding shooting percentages, because they didn't force it. And neither one could jump very well, but they got -- kept good position, and so they did well rebounding. They remembered that every shot that is taken, they assumed would be missed. I've had too many that stand around and wait to see if it's missed, then they go and it's too late. Somebody else is in there ahead of them. And they weren't very quick, but they played good position, kept in good balance. And so they played pretty good defense for us. So they had qualities that -- they came close to -- as close to reaching possibly their full potential as any players I ever had. So I consider them to be as successful as Lewis Alcindor or Bill Walton, or many of the others that we had, There was some outstanding -- some outstanding players.

17:17Have I rambled enough? I was told that when he makes his appearance, I was supposed to shut up.

17:24(Laughter) (Appl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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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am i to judge






He took the name of a humble saint and then called for a church of healing. The first non-European pope in 1,200 years is poised to transform a place that measures change by the century

Pope Francis
Illustration by Bryan Drury for TIME; Photo reference: Alessandra Tarantino / AP

To read about TIME’s choice in Spanish and Portuguese, click below.
EL ELEGIDO: El Papa Francisco es la Persona del Año 2013 de TIME
A Escolha: O Papa Francisco é a Personalidade do Ano eleita pela Time em 2013

On the edge of Buenos Aires is a nothing little street called Pasaje C, a shot of dried mud leading into a slum from what passes for a main road, the garbage-strewn Mariano Acosta. There is a church, the Immaculate Virgin, toward the end of the ­pasaje—Spanish for passage—where, on one occasion, the local priest and a number of frightened residents took refuge deep in the sanctuary when rival drug gangs opened fire. Beyond the church, Pasaje C branches into the rest of the parish: more rutted mud and cracked concrete form Pasajes A to K. Brick chips from the hasty construction of squatter housing coagulate along what ought to be sidewalks. The word asesino—­murderer—is scrawled in spray-paint on the sooty wall of a burned-out house, which was torched just days before in retaliation for yet another shooting. Packs of dogs sprawl beneath wrecked cars. Children wander heedless of traffic, because nothing can gather speed on these jagged roads. But even Pasaje C can lead to Rome.

As Cardinal and Archbishop of Buenos Aires, a metropolis of some 13.5 million souls, Jorge Mario Bergoglio made room in his schedule every year for a pastoral visit to this place of squalor and sorrow.­ He would walk to the subway station nearest to the Metropolitan Cathedral, whose pillars and dome fit easily into the center of Argentine power. Traveling alone, he would transfer onto a graffiti-blasted tram to Mariano Acosta, reaching where the subways do not go. He finished the journey on foot, moving heavily in his bulky black orthopedic shoes along Pasaje C. On other days, there were other journeys to barrios throughout the city—so many in need of so much, but none too poor or too filthy for a visit from this itinerant prince of the church. Reza por mí, he asked almost everyone he met. Pray for me.

When, on March 13, Bergoglio inherited the throne of St. Peter—keeper of the keys to the kingdom of heaven—he made the same request of the world. Pray for me. His letter of retirement, a requirement of all bishops 75 and older, was already on file in a Vatican office, awaiting approval. Friends in Argentina had perceived him to be slowing down, like a spent force. In an instant, he was a new man, calling himself Francis after the humble saint from Assisi. As Pope, he was suddenly the sovereign of Vatican City and head of an institution so ­sprawling—with about enough followers to populate China—so steeped in order, so snarled by bureaucracy, so vast in its charity, so weighted by its scandals, so polarizing to those who study its teachings, so mysterious to those who don’t, that the gap between him and the daily miseries of the world’s poor might finally have seemed unbridgeable. Until the 266th Supreme Pontiff walked off in those clunky shoes to pay his hotel bill.

The papacy is mysterious and magical: it turns a septuagenarian into a superstar while revealing almost nothing about the man himself. And it raises hopes in every corner of the world—hopes that can never be fulfilled, for they are irreconcilable. The elderly traditionalist who pines for the old Latin Mass and the devout young woman who wishes she could be a priest both have hopes. The ambitious monsignor in the Vatican Curia and the evangelizing deacon in a remote Filipino village both have hopes. No Pope can make them all happy at once.

(MOREBehind the Pope Francis Cover)

But what makes this Pope so important is the speed with which he has captured the imaginations of millions who had given up on hoping for the church at all. People weary of the endless parsing of sexual ethics, the buck-passing infighting over lines of authority when all the while (to borrow from Milton), “the hungry Sheep look up, and are not fed.” In a matter of months, Francis has elevated the healing mission of the church—the church as servant and comforter of hurting people in an often harsh world—above the doctrinal police work so important to his recent predecessors. John Paul II and Benedict XVI were professors of theology. Francis is a former janitor, nightclub bouncer, chemical technician and literature teacher.

And behind his self-effacing facade, he is a very canny operator. He makes masterly use of 21st century tools to perform his 1st century office. He is photographed washing the feet of female convicts, posing for selfies with young visitors to the Vatican, embracing a man with a deformed face. He is quoted saying of women who consider abortion because of poverty or rape, “Who can remain unmoved before such painful situations?” Of gay people: “If a homosexual person is of good will and is in search of God, I am no one to judge.” To divorced and remarried Catholics who are, by rule, forbidden from taking Communion, he says that this crucial rite “is not a prize for the perfect but a powerful medicine and nourishment for the weak.”

Through these conscious and skillful evocations of moments in the ministry of Jesus, as recounted in the Gospels, this new Pope may have found a way out of the 20th century culture wars, which have left the church moribund in much of Western Europe and on the defensive from Dublin to Los Angeles. But the paradox of the papacy is that each new man’s success is burdened by the astonishing successes of Popes past. The weight of history, of doctrines and dogmas woven intricately century by century, genius by genius, is both the source and the limitation of papal power. It radiates from every statue, crypt and hand-painted vellum text in Rome—and in churches, libraries, hospitals, universities and museums around the globe. A Pope sets his own course only if he can conform it to paths already chosen.

And so Francis signals great change while giving the same answers to the uncomfortable questions. On the question of female priests: “We need to work harder to develop a profound theology of the woman.” Which means: no. No to abortion, because an individual life begins at conception. No to gay marriage, because the male-female bond is established by God. “The teaching of the church … is clear,” he has said, “and I am a son of the church, but”—and here he adds his prayer for himself—“it is not necessary to talk about those issues all the time.”

If that prayer should be answered, if somehow by his own vivid example Francis could bring the church into a new relationship with its critics and dissidents—agreeing to disagree about issues that divide them while cooperating in the urgent mission of spreading mercy—he might unleash untold good. “Argue less, accomplish more” could be a healing motto for our times. We have a glut of problems to tackle. Francis says by example, Stop bickering and roll up your sleeves. Don’t let the perfect be the enemy of the good—an important thing for the world to hear, especially from a man who holds an office deemed infallible.

Thousands turn out in Rome to greet Francis during his biweekly audiences.

Francesco Zizola / NOOR for TIME

Thousands turn out in Rome to greet Francis during his biweekly audiences.
See more photos of the Pope made for Person of the Year on LightBox .

A Changing Papacy

This papacy begins with a name. Jorge Bergoglio is the first Pope to choose as his namesake Francis of Assisi, the 13th century patron saint of the poor. The choice, coming after 14 Clements, 16 Benedicts and 21 Johns, is clearly and pointedly personal. The 13th century Francis turned to the ministry when, as legend has it, he heard a voice calling to him from a crucifix to repair God’s house. He left his prosperous silk-merchant family to live with the poor. He was a peacemaker, the first Catholic leader to travel to Egypt to try to end the Crusades. He placed mercy at the core of his life.

From that name follows much of Francis’ agenda. While the Catholic Church envisioned by Benedict XVI was one of tightly calibrated spiritual prescriptions, Francis told Father Antonio Spadaro, editor of the Jesuit magazine Civiltà Cattolica, in an interview published at the end of September, that he sees “the church as a field hospital after battle.” His vision is of a pastoral—not a doctrinaire—church, and that will shift the Holy See’s energies away from demanding long-distance homage and toward ministry to and embrace of the poor, the spiritually broken and the lonely. He expanded on this idea in a 288-section apostolic exhortation called “Evangelii Gaudium,” or “The Joy of the Gospel.” “I prefer a Church which is bruised, hurting and dirty because it has been out on the streets, rather than a Church which is unhealthy from being confined and from clinging to its own security,” he wrote. He made it clear that he does not just want talk—he wants actual transformation.

He has halted the habit of granting priests the honorific title of monsignor as a way to stem careerism in the ranks and put the focus instead on pastoring. He told a gathering of his diplomats that he wanted them to identify candidates for bishop in their home countries who are, he said, “gentle, patient and merciful, animated by inner poverty, the freedom of the Lord and also by outward simplicity and austerity of life.” To Francis, poverty isn’t simply about charity; it’s also about justice. The church, by extension, should not reflect Rome; it should mirror the poor.

Which helps explain why he has turned the once obscure Vatican Almoner, an agency that has been around for about 800 years and is often reserved for an aging Catholic diplomat, over to the dynamic 50-year-old Polish Archbishop Konrad Krajewski and told him to make it the Holy See’s new front porch. “You can sell your desk,” Francis told Krajewski. “You don’t need it. You need to get out of the Vatican. Don’t wait for people to come ringing. You need to go out and look for the poor.” The Archbishop hands out small amounts to the needy, including a recent gift of 1,600 phone cards to immigrant survivors of a capsized boat so they could call family back in Eritrea. Francis often gives Krajewski stacks of letters with his instructions to help the people who have written to him and asked for aid. In what sounds like a necessary precaution, the Vatican recently issued a denial after Krajewski hinted that Francis himself sometimes slips out of the Vatican dressed as an ordinary priest to hand out alms.

Francis also moved early to tame the mess that is the Vatican Bank, an institution even U.S. Treasury officials privately say is corrupted. Soon after he was elected, he named a special commission to investigate the bank, which in turn handed the matter off to an independent firm for an audit. Francis also issued initiatives to counter money laundering and increase the monitoring of the Vatican’s finances. In October, the bank disclosed an annual report for the first time in its 125-year history.

And if personnel is policy, Francis has been particularly busy, shaking up the Curia with his preference for new faces over old ones. In a move that signifies he means business, he tossed Benedict’s Secretary of State, Tarcisio Bertone, and named ambassador to Venezuela Archbishop ­Pietro Parolin, the youngest man to hold the post since Eugenio Pacelli, who went on to become Pope ­Pius XII in 1939.

In April, Francis tapped a boarding party of eight like-minded bishops from around the world to meet with him several times a year to comb through difficult problems, a move that diffused some of the traditional power of the Synod of Bishops. “I don’t want token consultations,” he explained in an interview, “but real consultations.” That, at least so far, appears to be what he is getting. The membership is telling: Cardinals from Chile, Congo and Honduras as well as Munich, Australia and Boston are on the panel. In August, another member, Cardinal Oswald Gracias of India, issued one of the most expansive comments about gays that the church has ever made, stating that while the church does not allow gay marriage, homosexuality is not a sin. “To say that those with other sexual orientations are sinners is wrong,” he wrote to an LGBT group in Mumbai. “We must be sensitive in our homilies and how we speak in public and I will so advise our pri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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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ick to enlarge | TIME Graphic by Cleo Brock-Abraham and Lon Tweeten

And on Dec. 5, in a long overdue move, the group of eight named a new commission on sex abuse, the problem of priests preying on children they had vowed to protect. It is the church’s darkest existential problem in an era of existential problems; the commission aims to study better ways to protect children, screen programs that involve children and suggest new ways to create safe environments and choose the priests to lead them. At worst, the Cardinals are laying out a new set of best practices for far-flung dioceses to follow. At best, they are admitting that the Vatican had focused too much attention on the legal challenges of the sex-abuse crisis rather than on the behavioral problems at its core.

Francis has backed up his deeds with homilies and his first apostolic exhortation. He can barely contain his outrage when he writes, “How can it be that it is not a news item when an elderly homeless person dies of exposure, but it is news when the stock market loses two points?” Elsewhere in his exhortation, he goes directly after capitalism and globalization: “Some people continue to defend trickle-down theories which assume that economic growth, encouraged by a free market, will inevitably succeed in bringing about greater justice and inclusiveness in the world. This ­opinion … has never been confirmed by the facts.” He says the church must work “to eliminate the structural causes of poverty” and adds that while “the Pope loves everyone, rich and poor alike … he is obliged in the name of Christ to remind all that the rich must help, respect and promote the poor.”

The church has always made the poor a ­priority—­a mission that has been the biting paradox of the treasure-laden Vatican. But Francis has made it clear that they are a priest’s first responsibility. “A lack of vigilance, as we know, makes the Pastor tepid; it makes him absentminded, forgetful and even impatient,” he preached in May. “It tantalizes him with the prospect of a career, the enticement of money and with compromises with a mundane spirit; it makes him lazy, turning him into an official, a state functionary, concerned with himself, with organization and structures, rather than with the true good of the People of God.” In case anyone missed the point, he suspended a bishop in Limburg, Germany, for overseeing a $42.5 million renovation of the church residence that included a $20,500 bathtub. Says Father Guillermo Marcó, who was Bergoglio’s spokesman from 1998 to 2006: “It is the first time we have had a priest as Pope.”

An Argentine’s Way

On weekends in Buenos Aires, you can take a 31⁄2-hour bus tour of the neighborhoods where Jorge Mario Bergoglio grew up. “What’s coming up on this street?” the tour guide Daniel Vega asks as the bus pulls up on Calle Membrillar in the Flores district of Buenos Aires. “The house where he was born,” comes the answer. There’s the chapel where his father Mario, a native of the Piedmont region of Italy, and Regina, an Argentine of Piedmontese descent, met in 1934. They married the next year and had their firstborn, Jorge Mario, on Dec. 17, 1936.

The Bergoglios were very strict Catholics, the kind who worry about meeting people who were not married in the church or who were socialists or atheists. But the future Pope was never that doctrinaire: in the four years between realizing he was called to the priesthood and actually entering seminary, he said he had “political concerns, though I never went beyond simple intellectualizing.” He admits to reading and liking publications of the Communist Party but says he was never a member. Many Bergoglio watchers—a minor industry in Argentina—believe that his concern for the destitute is partly rooted in Argentina’s experience with Peronism, a strange socialist-capitalist amalgam that evolved in the country in the 1940s and was powered by a deep, working-class populism. That ideology suffused everything Argentine then—and now.

Bergoglio is quite mystical about his career choice, which hit him when he stopped off at church on his way to join friends to celebrate a holiday. “It surprised me, caught me with my guard down,” he told Francesca Ambrogetti and Sergio Rubin, who interviewed him for their 2010 book, published this year in the U.S. as Pope ­Francis: ­Conversations with Jorge Bergoglio. “That is the religious experience: the astonishment of meeting someone who has been waiting for you all along.” He did not enter seminary until 1957, telling the authors, “Let’s say God left the door open for me for a few years.”

He was briefly a nightclub bouncer and would as a 21-year-old seminarian lose most of his right lung to an infection, a condition that may contribute to his back problems today. He chose to join the Jesuits because the order—founded as the Catholic Church launched th­e ­counterreformation—was at “the front lines of the Church, grounded in obedience and discipline.” He claimed to not be disciplined himself and thus in need of the structure. What he did have was a talent for empathy and for engaging people in conversation. Even before he was ordained, he was a popular and attractive figure to his students at Jesuit schools as well as to many superiors. In 1973, at 36—just three years a priest—he was named the head of the Society of Jesus in Argentina and the boss of Jesuits many years his senior. The office came with prestige, huge responsibilities and, as it turned out, the seeds of almost two decades of turmoil for himself, which nearly derailed his career.

His crisis centered around two Jesuits, Father Orlando Yorio and Father Francisco Jalics, who refused his orders over the period of about a year beginning in 1975 to leave the slums as the country spiraled into political chaos and the military, which considered slum priests to be likely rebels, was clearly moving to take over Argentina. As terrorists on the right and left tore the nation apart, many Argentines—­including some bishops and priests—longed for a strong hand to reassert control over the country, and many welcomed the military coup of March 24, 1976.

In May the two Jesuits were arrested and subjected to torture. Bitterness has lingered among some Jesuits and the relatives of Yorio (who died in 2000), who to this day accuse Bergoglio of virtually giving up the priests to the junta, citing a flurry of bureaucratic paperwork that ultimately failed to provide cover for the clerics to stay on in the slums. Bergoglio said he immediately tried to win their freedom (as he would do for many others), and Yorio and Jalics were released after five months. Very few of the “disappeared”—as abducted Argentines were called—reappeared alive.

Even after Bergoglio served out his term as Jesuit provincial in 1979, he remained a divisive figure. In 1988, when he was serving as a theology lecturer at a school in Buenos Aires, he came into conflict with the provincial at the time, Father Victor Zorzín, who reassigned Bergoglio to Córdoba, more than 400 miles (640 km) northwest of Buenos Aires. From June 1990 to May 1992, according to journalist Elisabetta Piqué, author of the biography Francis: Life and Revolution, he could make no phone calls without permission, and his correspondence was “controlled.” Zorzín says “it cost [Bergoglio] a lot to accept the change. But pain can ripen into something else.”

In what would prove to be a providential turn, a Cardinal who admired Bergoglio’s work as provincial—­including his ability to assess the talents of others and organize productive ­meetings—came seeking him and, rescuing him from Córdoba exile, turbocharged his ascent in the church hierarchy. And as he rose from bishop to Archbishop to Cardinal, Bergoglio began ministering to the slums—the same kind of districts that Yorio and Jalics refused to leave at his orders. Jalics, who now lives in Bavaria, kept silent about the case for nearly four decades but released a statement after Bergoglio became Francis, declaring that “Orlando Yorio and I were never given up by Jorge Bergoglio … I used to think we had been victims of an accusation. But by the late 90s, after many conversations, it was clear to me that I was wrong.”

After becoming Archbishop in 1998, Bergoglio was known for his frugality, for taking the bus and the subway and for living in a simple apartment on the same block as the cathedral, not at the opulent archdiocesan residence. That kind of humility increased his appeal not only with ordinary Argentines but also among his fellow Archbishops in Latin America. His meteoric postexile rise seemed to climax in April 2005, when the death of John Paul II brought Bergoglio to Rome and to the ranks of what Vaticanologists call I ­papabili—the Cardinals who might become Pope. The Wednesday after Germany’s Joseph Ratzinger was elected Pope Benedict XVI, Bergoglio had lunch with his press secretary Marcó and, according to Marcó, never let on that the Latin American Cardinals had gathered enough support to make him the runner-up in the conclave. Some accounts have Bergoglio signaling to his supporters to shift their votes to Ratzinger so as not to prolong the process and give an impression of a divided College of Cardinals.

He returned to Buenos Aires and looked to retirement. He had already picked out the residence where he would live out the rest of his life—an old-age home for priests in Flores, where he was born—and handed his letter of resignation to the Pope when he turned 75 in 2011. “I’m starting to consider the fact that I have to leave everything behind,” he said in 2010. “It makes me want to be fair with everyone always, to sign the final ­flourish … But death is in my thoughts every day.” He insisted he was not sad, and he went on posing for pictures with the faithful. But his face gave him away, and one parishioner called him on it: “Padre Jorge, if you’re going to put on that face, you’re going to ruin the photo.”

Then without warning on Feb. 11, Benedict XVI announced that he was abdicating the papacy, the first time a Pope had resigned in 600 years. The Archbishop of Buenos Aires once again flew to Rome, though he was no longer on the hot list of I papabili. But on the night of March 13, to the world’s surprise, Bergoglio emerged on the balcony of St. Peter’s Basilica as Francis.

Argentines saw on his face what millions of others could not have divined: the sad, haggard look was gone. Joy cometh in the evening.

Francis has made society’s most vulnerable—the sick, the elderly, immigrants and children—the focus of his ministry.

Francesco Zizola / NOOR for TIME

Francis has made society’s most vulnerable—the sick, the elderly, immigrants and children—the focus of his 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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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mits Of Reform

The five words that have come to define both the promise and the limits of Francis’ papacy came in the form of a question: “Who am I to judge?” That was his answer when asked about homo­sexuality by a reporter in July. Many assumed Francis, with those words, was changing church doctrine. Instead, he was merely changing its tone, searching for a pragmatic path to reach the faithful who had been repelled by their church or its emphasis on strict dos and don’ts. Years of working closely with parish priests have taught him that the church seemed more comfortable with narrow issues than human complexity, and it lost congregants and credibility in the bargain. He is urging his army to think more broadly. As he told Spadaro, “What is the confessor to do? We cannot insist only on issues related to abortion, gay marriage and the use of contraceptive methods. That is not possible. I have not spoken much about these things and I was reprimanded for that. But when we speak about these issues, we have to talk about them in a context.”

In short, ease up on the hot-button issues. That might not seem like significant progress in the U.S. and other developed nations. But the Pope’s sensitivity to sexual orientation has a different impact in many developing countries, where homo­phobia is institutionalized, widespread and sanctioned. Similarly, Francis is aware of the liberal clamor in the affluent West for the ordination of women. He also recognizes that Catholic doctrine, as it is currently formulated, cannot be made to justify women as priests. “The feminine genius is needed wherever we make important decisions,” he has said. But that does not involve ordination as priests. Instead, in his recent exhortation, he says he wants to diminish the primacy of the all-male priesthood, arguing that just because they monopolize the sacraments does not mean their gender should be the only one empowered in the church.

That won’t make the grade for women who expect equal protection and rights under secular law. But the real significance of these new horizons will likely come in countries where the stakes for women are far higher than just the question of ordination. In the places where the Catholic Church is growing fastest, Francis’ words may portend significant advances in culture wars where women and other disadvantaged groups have always been on the losing side. When Catholic Archbishop Berhaneyesus Souraphiel of Addis Ababa talks of women in the church, he thinks of the crisis in sub-Saharan African regions where female genital mutilation is common. He is trying to rally Catholics to raise money to build a university where women can have greater access to education. Souraphiel sees great progress in Francis’ statements about women. “It could help a lot,” he says, “because he is saying women have a great role in the church and in society.”

But if there appears to be some wiggle room on homosexuality and the role of women, there is none for abortion. “This is not something subject to alleged reforms or ‘modernizations,’” Francis says. “It is not ‘progressive’ to try to resolve problems by eliminating a human life.” Even so, Francis’ tonal shifts on doctrine have unsettled some church conservatives, particularly in the U.S., where some bishops in the past have declined to offer Communion to elected officials who favor abortion. The exact size of this group is unknown, but no one denies it exists. “Already there has been a lot of backlash from traditionalist groups, conservative groups, people who feel he is moving too quickly away from the traditional style of Benedict on liturgy, on clerical appointments,” says Brian Daley, a professor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But that’s probably a relatively small group of people.”

Those who have inveighed against abortion and homosexuality for decades may fear that the ground is shifting underneath their feet. Some of the harshest criticisms of Francis have come from traditionalists alarmed at his emphasizing the Pope’s role as just another bishop—­albeit of Rome—rather than Supreme Pontiff. They ­argue that this path would lead to the end of the papacy as the world has known it for centuries. In early October, Mario Palmaro, a conservative bioethicist who worked for Radio Maria, went so far as to co-author an essay titled “We Do Not Like This Pope” that hinted that Francis was the Antichrist because of his all-too-knowing use of the media to propagate heterodox ideas. Palmaro was particularly appalled by the interview Francis granted the atheist editor of the Italian daily La Repubblica, in which the Pope was quoted as saying, “I believe in God, not a Catholic God.” The station fired Palmaro for criticizing the boss. But in November, after Palmaro came down with a debilitating disease, Francis telephoned to console him. “I was so moved by the phone call that I was not able to conduct much conversation,” Palmaro told reporters. “He just wanted to tell me that he is praying for me.” Palmaro says he has not changed his opinion of Francis’ policy.

Part of the conservative critique is that Francis’ words and gestures cannot be fully reconciled with the legacy of previous Popes. Apparently aware of that potential for controversy, Francis has been skillfully citing the writings of former Pontiffs, stressing continuity. As the first Pontiff to be ordained a priest after Vatican II, he has been generous to the opinions of John XXIII, who convened that reformist council. But it is a delicate task given that Francis has one thing no Pope has had since the 15th century: a living predecessor. While Benedict resides in quiet retirement in the Vatican Gardens, he remains a potential rallying point for those who fear that Francis may hold the doctrinal reins too loosely. So far, Francis and Benedict appear to get on well: both men flatter each other, and Francis was especially generous with quotations from Benedict in his recent exhortation. In any case, Francis needs to keep his predecessor on his side, for it was Benedict who codified the conservative views of John Paul II, the hero of many Catholics, particularly those on the right of the spectrum.

Francis will continue the policy of both John Paul II and Benedict on détente and fraternal relations with Judaism. (Francis plans to visit Israel in May.) But with his experience working with the Muslim immigrant population of Argentina, Francis will extend a warmer hand toward Islam than Benedict, who famously infuriated that religion’s clerics with a scholarly aside in an otherwise innocuous speech. And he has proved himself amenable to Protestant, evangelical piety, scandalizing conservative Catholics in Argentina by kneeling and being blessed by Pentecostal preachers in a Buenos Aires auditorium.

While still in his home country, the future Pope also said that priestly celibacy is a recent development (it dates to about the year 1000) and has seemed open to change. Again, in Argentina, he startled conservatives by attending the funeral of a rebel bishop who left the church to marry, comforting the deceased prelate’s widow, who used to concelebrate Mass with her husband. Francis is sympathetic to people whose ­marriages have fallen apart: his only surviving sibling, María Elena Bergoglio, is divorced. In Argentina, he worked very closely with Catholics who were divorced and remarried, some of whom continue to take Communion. The Pope has called an Extraordinary Synod of Bishops—only the third such gathering in almost 50 years—in October 2014 to discuss pastoral challenges that face modern families, including sexual ethics, divorce, cohabitation and reproduction.

A place that measures change in terms of centuries doesn’t do relaunches often.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Francis has been Pope for less than a year, and a papacy can change character in midstream. In 1846, Pope Pius IX came to the throne as the great hope to liberalize Catholicism but by the end of his pontificate had become the great champion of conservatism—the font of infallibility and angry confrontation with secular powers like the newborn Italian state. The entrenched dynamics of the church can transform the would-be transformer.

A Day In The Life

Francis begins, ends and dots his day with prayer. He rises at 5 a.m. and prays until 7 before celebrating morning Mass at the Casa Santa Marta chapel. He prays after Mass and again before breakfast. Then at 8 a.m., the day begins. He works through papers until 10, then meets with secretaries, Cardinals, bishops, priests and laypeople until noon, followed by lunch and a half-hour siesta. Six hours of work follow, then dinner and more prayer in front of the Blessed Sacrament. He admits he sometimes nods off at this point, but says, “It is good to fall asleep in God’s presence.” He is usually in bed by 10.

On Wednesdays, he has a general audience around lunchtime in St. Peter’s Square, which brings in the multitudes. On a bright December day, the festive crowd numbers about 30,000. It’s the season of light, and Francis is talking about the Resurrection. He appears to have a cold; he needs the handkerchief tucked in his robes. But his voice is strong, though higher than you’d expect, and more musical, like that of a storyteller with a full range of context and characters to bring to his mission of making you listen. He has a script in hand because once he finishes the lesson, it will be repeated by priests reading in French, German, Spanish, Portuguese, English and Arabic.

Francis hopes to bring the gospel of mercy to the church—and the world.

Francesco Zizola / NOOR for TIME

Francis hopes to bring the gospel of mercy to the church—a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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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every so often, he can’t help himself. The script falls to his lap and he leans forward, looks out over the crowd and just starts talking, his hands in the air, his voice stronger now, doing his own call and response. Jesus is risen, and so shall we be one day, he tells them. And as though they might not quite grasp the implication, he pushes them: “But this is not a lie! This is true!” he says. “Do you believe that Jesus is alive? Voi credete?” “Yes!” the crowd calls back, and he asks again, “Don’t you believe?” “Yes,” they cry. And now he has them. They have become part of the message. He talks about Christ’s love like a man who has found something wondrous and wants nothing more than to share it. “He is waiting for us,” Francis says. And when he comes to the end of his homily, the script drops once more. “This thought gives us hope! We are on the way to the Resurrection. And this is our joy: one day find Jesus, meet Jesus and all together, all together—not here in the square, the other way—but joyful with Jesus. This is our destiny.”

Once the service ends, he greets the Cardinals in attendance on the dais, then walks over to meet first with the sick, then with special guests. Many have brought him gifts, mementos: a small statue of a merry Jesus on a yellow silk altar, a painting of Christ, a coffee-table book of photos from Austria. One man poses with him for a selfie; others do not want to let go of his hand. The ushers and security guards try to keep him moving, but he has more words to speak, pilgrims to meet and missions to launch before the day is over.

It’s hard to imagine a setting farther from Pasaje C. But if Francis can order his steps, it’s not so far at all.

—With reporting by Hilary Burke and Uki Goñi/Buenos Aires and Stephan Faris and Alessandro Speciale/Rome



Read more: TIME's Person of the Year 2013 Pope Francis, The People's Pope | TIME.com http://poy.time.com/2013/12/11/person-of-the-year-pope-francis-the-peoples-pope/#ixzz2p1HstJTl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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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지 중: 기사도 인물도 훌륭 

“The truth is, nobody out-works Denis McDonough,” President Obama said as he named him chief of staff earlier this year.

There has been no immediate legislative payoff from the flurry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opposite ends of Pennsylvania Avenue. But Democrats say they think thawing the icy relationship between congressional Republicans and the tightly controlled White House can only help.

...

If you don't know his face or haven't heard his name, that too is according to plan. Unlike two of Obama's previous, high-profile chiefs of staff, Chicago Mayor Rahm Emanuel and Chicago party vet Bill Daley, McDonough has no professional identity beyond the President, whom he has served for nearly six years. He disagrees with Obama sometimes and even forced the reconsideration of a personnel matter a couple of days into the job. But he is far less likely than Emanuel to tell anyone about it. And unlike Daley, he is the last person to give an interview on the record about his thoughts on anything. (McDonough declined to talk for this story.) "He views himself as a staffer, not a principal," says Dan Pfeiffer, who works down the hall. "And that endears him to other people."

...

Back in college--at athletics-mad Saint John's University in Minnesota, with the winningest football program in NCAA Division III history--McDonough took the defensive plays off the bench and was in charge of reading the offense, earning a reputation as the smartest player on the field. "He wasn't the biggest, and he wasn't the fastest," says Jerry Haugen, his old defensive coordinator. "He knew not only his own job but everybody else's as well. It's kind of what he does now."

...

It was a small gesture, for sure, a nod to the battles yet to come. But it was also a start.

By Michael Schere



Read more: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2143015,00.html#ixzz2UEvX8SZl


TIME  지 구독은 참으로 값지다, 적극 추천 



Profile 

(Pete Souza/ White House)

Why He Matters

President Obama named 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er Denis McDonough, one of his closest confidants who served in his Senate and campaign offices, as his new chief of staff on Jan. 25, 2013. McDonough replaces Jack Lew, who was recently nominated to head the Treasury Department.

McDonough has carved out a reputation as a fiercely loyal and demanding aide who has played a key role in some of the administration’s highest profile decisions, including the U.S. military drawdowns in Iraq and Afghanistan, the response to the Japanese tsunami and the handling of the attack on the U.S. diplomatic mission in Benghazi, Libya.

Following the departure of Obama's first national security adviser, Jim Jones, in October 2010, he became deputy to the new man in charge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Tom Donilon.

He was a top foreign policy adviser to former Senate Majority Leader Tom Daschle (D-S.D.) and to President Barack Obama when he was a senator. He also served as a senior fellow at the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a left-leaning think tank from which a slew of Obama administration officials have hailed.

McDonough advised the president on foreign policy and helped craft his speeches as director of strategic communications for the NSC before taking over as acting chief of staff when Mark Lippert departed.

He was a key player in President Obama's decision to send an additional 30,000 troops to Afghanistan for what was dubbed a temporary surge; those troops are expected to start coming home in July 2011.

And during his tenure as deputy NSC director in May 2011, Osama bin Laden was killed in a U.S. special forces raid in Abbottabad, Pakistan.



  • Career History: Acting NSC Chief of Staff (since October 2009-October 2010); Director of Strategic Communications, National Security Council (since January 2009-October 2010) Member of President Barack Obama 's transition team (Nov. 2008 to Jan. 2009); Foreign Policy adviser to Barack Obama 's 2008 Presidential campaign (2006 to 2008);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Senior Fellow (2004 to 2006)
  • Birthday: Dec. 2, 1969
  • Hometown: Stillwater, Minn.
  • Alma Mater: St. John's University (Minnesota); Georgetown University, M.S. in Foreign Service, 1996.
  • Religion: Catholic
  • Office: The White House, 1600 Pennsylvania Ave.
  • Web site
 

McDonough was a staffer on the House International Relations Committee from 1996 through 1999. He then joined Daschle's (D-S.D.) foreign policy team, where he worked until 2004, advising him on terrorism, AIDS and Middle East policy.

When Daschle lost his reelection bid, McDonough followed him to the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a progressive think-tank founded by former Clinton Chief of Staff John D. Podesta. There he researched health-care policy as a senior fellow and adviser to Dasch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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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Donough has argued for a common-good approach to foreign policy, saying that the U.S. must address problems like global warming and poverty by taking approaches that will benefit other countries as well. He has spoken in support of a cap-and-trade system and called on the U.S. to make a serious commitment to reducing greenhouse gases.

Killing bin Laden

Under McDonough's watch at the NSC, the world's most-wanted terrorist, al-Qaeda leader Osama bin-Laden was killed by U.S. special forces after years of painstaking intelligence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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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fellow at the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McDonough has relationships with Obama transition co-chair and CAP head John Podesta, CAP chief operating officer Neera Tanden and several other prominent Obama backers.

As a former chief of staff for Tom Daschle, McDonough is also a part of the growing list of Daschle alumnae that worked on the 2008 Obama campaign and in the Obama White House. Obama's Senate chief of staff, Pete Rouse, is a a senior White House adviser, and Mark Lippert, also worked for Daschle before becoming NSC chief of staff in the Obama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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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shingtonpost.com/politics/denis-mcdonough/gIQAt6rX9O_topic.html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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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f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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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Miy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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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아름다움 true beauty 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캠패인 활동차원에 Michelle Obama 와 Jill Biden 이 미국을 투어하며 Seattle 도 방문했었다. (당시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내용 첨부. http://blog.naver.com/englicious/120117356969 ) 당시에도 그녀는 위의 DNC Speech 에서 사용된 본인의 아버지와 버락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미셸은 저 이야기를 수 백 수 천번은 했으리라. 그녀의 언변이 보다 능숙하고 치우치게는 습관적이어 보이기까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진심, 진심임을 알 수 있다. 2년 전 20m 앞에서 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도 화면으로 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진심은 늘 있다. 성공의 잣대는 돈이 아닌 기준과 가치라는, 너무나 자주 듣는 식상한 주제이지만 진심은 진부함을 넘어 감동을 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한다, 대중을 움직인다. 놀라워.




Michelle is gorgeous 참 예쁘다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에 남긴 luncheon review, 역시나 기록을 남김은 좋다 좋으다 ! 당시 iPod touch 로 찍은 사진들 하하 2 년 전의 기계 기술. 

2010/10/26 12:23 http://blog.naver.com/englicious/120117356969 


General Election (총선거) 가 오늘로 부터 8일 남았다.

한국은 당이 참 여럿이지만 미국은 Democrate, Republican, 비교적 간단, 일까? 허허허.

 

 

Obamas 와 Bidens, 즉 오바마 내외와 바이든 내외가 캠패인을 돌고있다.

 

본 행사의 공식명칭은 Murray Victory Luncheon with First Lady Michelle Obama

Murray 성공, 영부인 Michelle Obama와의 오찬, 으로 해석, 흠.

 

 

장소는 Hyatt Regancy Bellevue, WA

 

 

 

 

 

 

Washington State, 워싱턴 주는 미국에서 여성 정치가들이 가장 여럿 임.

Governor 주지사 Christine Gregoire

Congress Suzan DelBene

Senator 상원의원 Ptty Murray

 

오늘의 모든 스피커들은 여자였다.

 

연설 순서대로 나열 하자면

 

Suzane DelBene

Ellen Malcom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elle Obama

 

 

Ellen Malcom 은 Emily's List 라는 여성 민주당원들을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검색해보니 IBM 공동 설립자 중 한 명 이며 상속인이다. 1998년 Vanity Fair의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여자 100 리스트에 올랐다. 후덜덜.

 

 

일단 사진을 좀 찍었다.

 

들어가기 위해선 Register를 해야한다. Register는 1000시에 시작이였다. 나의 도착시간 0910. 200명 가량 줄을 서 있었다. 나도 Register를 하기 위해 줄을 선다. 1000시 전인 0940시 부터 Register가 시작되고,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Register는 신분증으로 이름과 본인의 신분을 확인하면 위의 파란 티켓을 준다. 그것을 받고 Security Check 를 받는다.

Metal detector 를 통과해야하고, 핸드폰, 카메라 등 전자제품은 작동이 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함으로 켜고 손에 들고 있어야한다. 액체는 마실 수 있는 것임을 확인 해야 함으로, 경비원 앞에서 한 모금 마셔야 한다.

 

보안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선다.

 

 

 

 

경비 사람.

 

 

 

 

 

 

보안 통과하니 대략 1030시. 오찬은 1100시 시작. 행사가 진행 될 Ball Room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린다.

 

 

기다리는 중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다.

 

아직 붐비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소히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다.

 

 

 

 

구부정히 앉아계신 할아버지.

 

 

 

 

 

 

Volunteer들이 좌석배치도를 가지고 다니며 좌석위치를 확인해 준다. 테이블 번호로 자리를 확인 해주어 Ball Room에 들어가면 바로 테이블을 찾을 수 있다.

 

1000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Volunteer는 대략 30명 가량 이였던듯, 충분했다.

 

 

 

 

 

 

 

조금씩 붐비기 시작.

 

 

 

 

 

 

파노라마 샷.

 

 

1100시, Ball Room 이 열였다.

 

Hyatt Regency Ball Room. 테이블 당 10명, 대략 100 테이블이 넘는 듯.

 

 

 

메뉴는 크랜배리 닭 가슴살과 감자, 그리고 사과 사이다 식초 드레싱 샐러드. 후식의 이름은 모르겠음. 초콜릿과 치즈케익의 종류였음. 난 후식 2개 먹음.

 

 

 

 

 

 

 

오찬에 참여한 가장 예쁜 여자.

 

 

 

 

 

 

 

 

 

 

막상 연설들이 시작되고서는 듣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 않음. 미셸만 2장 찍고 연설 녹음 함.

 

대통령, 영부인, 부통령도 마찬가지겠지만, 보안에 상당히 많은 심여를 기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영부인이 방에 들어온 후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연설대 앞에는 여럿의 투명 30cm x 50cm 정도의 판자들이 세워져 있음. 테러를 대비하여 보호대를 세운다고 한다. 스피커도 일부러 저렇게 적나라히 연설자를 가리는 각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 허허 흠.

 

 

 

 

 

연설자들의 순서를 다시 적어보겠다

 

Suzan DelBene

Ellen Malcolm

Governor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helle Obama

 

각 연설은 대략 10-13분.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었다, 25분을 조금 넘긴 듯.

 

기억에 남는 점들만 적어보겠다.

 

Christine Gregoire

호소력있는 연설가, 내용전달이 명확. 단지 추가설명이 부실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명료. 'Patty Murray의 Republican 상대, Dino Rossi은 안된다' 로 사람들의 호응을 삼. 각 후보의 정치적 역사를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는 나로써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 함. Rossi의 낙태반대와, 피임반대에 대한 입장을 부정적으로 표현. 상대후보를 깍아내리는 식의 연설내용은 사실 비호감. 하지만 열정이 확실히 전해지고, 강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음.

 

Patty Murray

Gregoire와는 다른 부드러운 강인함. 본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며 사람들의 호응을 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7의 형제자매를 기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7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내고, 대학을 졸업시킨 부모님의 이야기를 함. 본인의 엄마신분을 중요시 내세움. 유치원 선생님으로 시작해, 학부모회의 구성원이였던 삶을 이야기하고, 정치에 뛰어든, '운동화 신은 엄마'의 이미지를 사용.

아이들과, 여성과, Veteran (참전 군인)들을 위해 일 할 것을 강조.

 

Jill Biden

비교적 짧았던 연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 현 정부의 업적에 대하여,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 본인의 Community College에서 교수로써의 보람에 관하여, Community College의 중요성에 관하여 설명. Murray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무난한 연설. 역동적이지도, 감동적이도 않은, 수긍 할 만한, 원만한 내용, 전달의 연설.

한 가지 느낀점은 Jill Biden 은 굉장히 예쁘다, 외모적으로.

 

 

 

Michelle Obama

이 여자가 왜 Barack Obama의 여자인지 알 수 있음. 연설대에 서자 사람들이 박수를 매우 많이 침. Michelle이 매우 고마워 함, 웃으며 편안하게 받아드림. 관중을 칭찬하며, 농담으로 시작. 본인은 선거 캠패인에 아직 생소하다며, 얼마 전 있었던 '작은' 캠패인 이외에는 경험이 없다고 농담 (대선 캠패인). 본인이 선거 캠패인에 임하는 자세를 설명, 본인이 지금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두 딸을 위해서라고 설명. 하는 모든 일의 이유는 두 딸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한다고.

 

(이하부터, 나의 개인적 편의를 위하여 1인칭도 사용하겠음, 내 마음대로 블로깅, 허허흠.)

 

세상을 보는 방법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이다. 파병된 아빠를 둔 아이의 눈에서,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아이들을 우리는 위해야 한다.

본인의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함. 아버지는 Multiple Sclerosis로 몸이 불편하여도, 매일 아침 City Water Plan에 일하러 나가셨음. 나와 나의 오빠 (동생인가. .Brother)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주기 위하여 아빠는 매일 일 함.

Barack의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 그와 그의 여동생을 위하여, 동이 트기전에 아침 버스를 타기위해 출근하심. 승진의 기회들이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빗나가도, 불평하지 않고 그녀는 매일 최선을 다하여 일 함.

그리고 현 정부의 실행들을 나열 함.

여성 평등 임금, 국민 보험, 중소기업 세금 감소, 중산층 세금감소 등등.

Veterans에 대해 설명, Womens rights에 대해 설명. 줄기세포 지지에 관해서도 이야기 함.

보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얘기 함. Barack의 엄마가 삶의 마지막 날들을 보험회사와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하며, 보험회사들의 만행을 저지하는 규율들 설명. 국민 보험은 국가의 돈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

Barack 의 슬로건 'Change'에 관해 이야기 함. 변화는 쉽지 않다는 것. 많은 이들은 Barack의 임기가 시작 된 날 '변화'를 기대했지만, 변화는 그리 빠르지 않음. 함께 움직여야, 에너지를 모아, 이번 선거 또한 힘을 모아야 변화의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함.

American Dream에 대해서도 이야기 함. Michelle은 지칠때 기억하는 것은 본인의 아버지임을 이야기 함.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 근육이 굳어가, 단추를 채우기 어려워 하면서도 출근하는 모습을 기억. 그리고 선거날을 되세김. 그리고 취임식날을 되세김.

마무리는 Patty와 같은 지도자가 우리는 필요하다를 강조. 아는 사람 10명에게 연락하고, 그들에게도 10명에게 연락하라고 전달하라. 모르는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라. 앉아있는 사람에게 전달하라, 우리는 이번 선거를 앉아 있을 수 없다 (방관 할 수 없다.) 대선의 에너지를 기억하고, 그 "Movement"를 다시 일으키면,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Yes we can!

Yes we must!

Yes we will!

을 외치며 환호를 받으며 끝.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기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세한 '이미지'와 쉬운 단어들을 사용. 연설 중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었음. 간단한 메세지, 구체적인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연설. 중간 중간 농담을 던져 관중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 또한 큰 몫. 하아, 저 여자.

 

 

 

 

 

 

 

 

기억나는대로, 최대한 순서를 살려 쓰려니 정리가 너무 되지 않았군.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참석한 자리. 작은 기대가 있었다면 '계기'를 찾고 싶었음.

 

음. 감회라면, 두가지. 나 자신이 사회의 조각임,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매우 간단함임을 인식.

 

Jill Biden, Michelle Obama, Patty Murray, 아이들의 엄마이고, 부모들의 자식이고, 남편들의 아내인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살아 가고있음. 아름다움은은 타고난 환상이 아닌, 솔직한 호소, 그리고 인류에 대한 동질감이라 느낌.

 

 

음, 만족. ^ ^

 

[출처] Democrate 선거 운동|작성자 황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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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경상도 친구도 없고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경상도 사투리가 무엇인가,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 하는 느낌은 처음 받았다. 경상도 방언 자체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김제동씨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방언, 그것은 참으로 참으로 매력 철철 아름다운 재미진 것이더라 !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나눈다는 것, 참 용기다. 나는 이따금 하물며 엄마아빠에게 동생에게 친구들에게도 어려워 부끄러워 슬퍼 속상해서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나눈다. 그의 나눔이 전부가 아닌 일부일지라도, 자신의 진심된 일부를 나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용기라 생각된다. 

누군가를 웃게하려면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가 나를 좋아해야한다는 말, 옳다. 이 날 나는 참으로 많이 웃었다 참으로 많이. 주체적임을 강조했던 그의 한 시간, 참으로 진심된 참으로 상대에게 긍정을 바라는 이의 조언에 감동을 받았다. 대중, 어쩌면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텐데, 같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위하는 마음. 그저 사람이기에 혹은 그저 그냥 나 아닌 다른 누군가, 무언가에게 good 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신기하기도하고 고맙고 멋지게 느껴진다. 나에게 웃음과 즐거움, 감동과 행복을 보여준,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김제동씨, 너무 좋아 김제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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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으며, 아니 법륜스님을 무대위에서 보자마자 느낀 것은 '진심' 이었다. 미국이라는 이국까지 해마다 이야기를 나누러 오신다는 부지런함, 은 진심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 참으로 진실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심이 전해졌다. 웃는 모습 또한 그저 '진솔함'의 정석으로 느껴졌다. 첫 인상부터 너무나 신기했던 법륜스님의 모습. 
어쩌면 진부한, 자기계발 서적에서 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기도하지만 진심어린 의견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닿았다. 강연을 보기 전에 인터뷰들과 기사들을 몇 가지 읽고 기대가 없기도했고 있기도 한, 어쩌면 중립에 가까운 마음으로 찾아간 강연은 좋은 경험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가 움직인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인다는 모습이 무엇보다 큰 감동이었고 배움이었다. 진심으로 원하고 실천하는 모습, 그야말로 무엇보다 굉장함, 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B2%95%EB%A5%9C_(%EC%8A%B9%EB%A0%A4)

법륜(法輪, 1953년 4월 11일 ~ , 울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 승려이자 사회 운동가, 구호 운동가, 환경 운동가이다. 현재 구호단체 한국JTS의 이사장이다. 법호는 지광(智光)이며, 속세명은 최석호이다.

1953년 경상남도 울산군 두서면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나 1969년 12월 분황사에서 불가에 입문했다. 그 후, 1988년 수행공동체인 정토회를 설립해 수행지도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는 만해상 포교상을, 2002년에는 구호단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 '국제평화와 이해' 부문을, 2007년에는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 2010년 불교계의 4대강 사업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1] 정토회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2011년 2월 포스코 청암상 청암봉사상을 동티모르의 알로라 재단과 공동수상 하였다.[2]

저서로는 《실천적 불교 사상》,《금강경 이야기》,《반야심경 이야기》,《붓다, 나를 흔들다》, 즉문즉설 시리즈 《답답하면 물어라》,《스님,마음이 불편해요》,《행복하기 행복전하기》,《행복한 출근길》,《날마다 웃는집》,《기도》,《스님의 주례사》 등이 있다.

조계종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조계종 측에서는 법륜을 본명인 '최석호 법사'로 부른다.[3]


한국JTS(Join Together Society)는 정토회 승려 법륜(현재 JTS 이사장)이 기아, 질병,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 기구이다.



정토회 http://www.jungto.org/buddhist/budd1.html

20세기의 마지막에 인류 최후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남북의 대립으로 한쪽에서 수백만의 동포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비극이 아니라 정치적 갈등과 분쟁이 야기하는 인류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국지적인 분쟁과 대립이 양산되고 있는 인류에게 있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법륜스님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정파적인 이해나 이념적인 견해에 우선적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해왔다. 남북한의 긴장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실천은 어느 때는 친북적인 인사로 오해받아 감시를 받고, 또 다른 때는 반북적인 인사로 활동을 제한받기도 하였다. 법륜스님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과 그보다 더 냉정한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일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인 지원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대북 지원과 탈북자 돕기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한 장기전략을 연구하는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 눈물로 읍소하면서 펼쳐온 북한동포돕기운동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서 법륜스님 하면 북한동포돕기가 떠오를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을 발로 뛰어다니며 알리고 눈물로 호소하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법륜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다, 동포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조선족 동포들의 이야기에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직접 압록강변에서 불러도 쳐다보지 못하는 북한어린이의 모습에서 법륜스님은 그 동안의 외면한 마음에 대한 참회와 함께 바로 앞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력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북한돕기에 대한 눈물어린 서원을 세웠다. 
96년 12월 잠수함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될 때 각계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북한동포돕기의 불씨는 전국으로 퍼져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함께 대북지원을 호소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북한돕기운동은 국내의 반대 여론뿐아니라 북한정부의 반감을 살지라도 목숨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힘입어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2. 갈등과 대립을 넘어 상생과 조화의 관계로 
법륜스님은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보살의 삶을 서원으로 한 정토회를 설립하여 배고픔이 없는 세상, 모든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세상, 배우지 못한 고통이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해왔다. 정토회는 인류에게 불어닥친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의 대안으로서의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무아, 무소유, 무아집의 부처님과 보살의 삶을 모델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문제가 단지 소비와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과 문명,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삶의 전환운동이라는 것, 분쟁과 갈등의 세계 안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단지 한 민족에게 국한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외세의 개입, 그로 인한 지역적 긴장 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이 될 수 있다. 

3. 사상가이자 수행자로서의 삶 
법륜스님은 인도에서 국제 워크캠프를 열고 태국 국경지역의 미얀마 난민을 구호하는 일, 몽골 한파 지역의 긴급구호, 이디오피아 가뭄 피해 자원활동 등,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는 많은 일을 펼치고 있다. 인류는 디지털세상과 인간복제로까지 나아가는 21세기의 과학문명과 여전히 상존하는 계급, 계층, 문화, 종교, 성의 갈등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얽혀있다. 법륜스님은 인류가 타인의 불행 위에 행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일구는 생명운동과 문명의 전환운동을 펼치고 실천한다.
법륜스님은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실현해가는 평화운동가로서, 인류의 문명전환을 실현해가는 전지구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사상가로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활동가로서, 깨어있는 수행자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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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2012 Commencement AddressSalman Khan gives commencement address at MIT (2012)

"principle over profit"


"smile with every atom in your body"


"take a walk through the woods forget your name, your idenTiTy, for just a little bit, realize what you are, just another animal walking towards another mammal"


"try to build true empathy for everyone"


"now i can optimize things"


"i can finally tell them how much i appreciate them. i can give the more hugs more time... i can be more source of positivity for people around me."


"thank you"


나 또한 Khan Academy 의 youtube 비디오들을 보면서 수업 공부를 하였다. 사실상 요즘 online open course 온라인 오픈 코스로 사실상 학교를 물리적으로 가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왠만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마이클 샌댈의 course 도 물리 화학 수학의 모든 개론 수업 등 왠만한 수업을 온라인에서 만날 수 있다. 굳이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학비가 과소비로 느껴진다. 무튼 무관히 고등 교육 과정이 공개적으로 무료로 허용되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MIT의 참으로 이롭고 선하고 굉장한 선택이었다. 


더불어 재밌는 것은 나의 사촌도 MIT 졸업생이고 그녀의 남편도 MIT 졸업생이다 하하하! 

나도 가고 싶다 MIT. 근래 대학원에 대한 없던 스트레스가 콩알 만하게 생기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다시 Sal 의 연설을 들으니 사라졌다 하하하. 기분이 좋구나.


자료: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Salman_Khan_(educator)

Salman Amin 'Sal' Khan (Bengaliসালমান খান;[2] born 1976) is a Bangladeshi American educator and the founder of the Khan Academy, a free online education platform and nonprofit organization. From a small office in his home, Khan has produced over 3000 videos elucidating a wide spectrum of academic subjects, mainly focusing on mathematics and the sciences. As of July 2012, the Khan Academy channel on YouTube has attracted more than 355,000 subscribers.[3] In 2012, American magazine Time named Salman Khan in its annual list of 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 in the world: Time 100.[4]


Khan Academy

In late 2004, Khan began tutoring his cousin, Nadia, in mathematics over the internet using Yahoo!'s Doodle notepad.[11] When other relatives and friends sought his tutoring, he decided it would be more practical and beneficial to distribute the tutorials on YouTube where he created an account on 16 November 2006.[12] Their popularity on the video sharing website and the testimonials of appreciative students prompted Khan to quit his job as a hedge fund analyst in late 2009 to focus on developing his YouTube channel, 'Khan Academy', full-time with the aid of his long time friend Josh Gefner.[10]

His videos attracted on average more than 20,000 hits each. Students from around the world have been attracted to Khan's concise, practical, and relaxed teaching method.[12]

Khan outlined his mission as to "accelerate learning for students of all ages. With this in mind, we want to share our content with whoever may find it useful." Khan also plans to extend his "free school" to cover topics such as English. Programs are being undertaken to use Khan's videos to teach those in isolated areas of Africa andAsia. He delineated his motives:

With so little effort on my own part, I can empower an unlimited amount of people for all time. I can't imagine a better use of my time.[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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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 보존 입자의 발견에 대해 읽던 와중 이휘소 박사에 대한 글들을 만나게 되었다. 과학자로써의 업적이 시대적으로 앞섰다는 의견들이 많이 보인다. 더불어 그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글들이 많다. 1900 년대에 핵을 연구하였뿐더러 분야의 선두주자였다면 당연한 현상이다. 전형적이여서 흔하기도하지만 none the less 흥미로운 주제이고 인물. 일단 자료만 얼추 정리. 


이휘소 자료: 위키피디아 wikipedia 

이휘소
출생1935년 1월 1일
일제 강점기 조선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사망1977년 6월 16일 (42세)
미국 미국 일리노이 주 케와니
거주지미국 미국 일리노이 주 글렌 엘린
시민권미국 미국
국적일본 제국 일본 제국 (1935년 ~ 1945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1948년 ~ 1968년)
미국 미국 (1968년 ~ 1977년)
분야장의 양자론
입자물리학
이론물리학
소속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페르미 연구소
시카고 대학교
출신 대학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 학사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석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박사
지도 교수에이브러햄 클라인
지도 학생강주상
주요 업적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재규격화
맵시 쿼크 질량의 예측
물리우주론적 리-와인버그 경계의 계산
영향받음에이브러햄 클라인
시드니 메슈코프
영향줌스티븐 와인버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압두스 살람
수상국민훈장 동백장
종교불가지론
서명BenjaminWLee Signature.png
《이휘소평전》 - 강주상
이휘소(李輝昭영어: Benjamin Whisoh Lee 벤저민 휘소 리[*]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이다. 세계적으로는 그의 영문명 벤저민 W. 리(Benjamin W. Lee), 벤 리(Ben Lee)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하였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07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출판되었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이 중 68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7편이다. 2011년 6월 현재 그의 모든 논문들은 12,500회 이상 인용되고 있다.[1]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이휘소 평전

저자
강주상 지음
출판사
럭스미디어 | 2011-03-25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을 그린 평전. 저...
가격비교


자료 : yes 24 http://www.yes24.com/24/Goods/4827692?Acode=101 

책소개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이휘소의 참모습!
이휘소 박사의 죽음과 관련된 온갖 소문과 억측들,
그 의문의 실체를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최초로 밝힌다!


이휘소 박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몇 편의 소설에서의 애국적인 모습으로 기억된다. 소설은 분명 그를 우리나라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학문적 업적으로 세계적 명예를 얻었던 이휘소 박사의 진정한 명성을 가리고 있다. 이 책은 이휘소 선생의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하여 기록한 전기로 이휘소 박사의 죽음과 관련된 온갖 소문과 억측들, 그 의문의 실체를 밝혀주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에 이휘소 박사가 깊숙이 관여한 중심인물이었다는 오해는 이 책이 만들어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 없다면 소설들의 내용이 정설로 굳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로 믿어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닌 '소립자 물리학자'이다. 이 책은 그가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한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에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라는 가장 극명한 진실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 소개

저자 : 강주상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스토니브룩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고에너지 소립자 이론물리학을 연구했으나 1981년 귀국 후에는 고에너지 실험물리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대통령 자문 21세기 위원회에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장기적 과학 기술 정책 수립에 기여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종신회원이다. 스토니브룩 물리학과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논문을 지도받은 것을 계기로 사제의 연을 맺었다.


더 이상 소설은 없다

1977년, 비운의 교통사고로 42세에 요절한 이휘소. 물리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비춰볼 때 이휘소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이휘소 박사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설을 통해서였다. 몇 편의 소설을 통해 알려진 이휘소 박사의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을 도와 우리나라의 핵개발에 앞장선 용감한 과학자이자 애국자이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활약을 통해 국내에 핵을 들여온다는 설정은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법정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이휘소의 이미지는 여전히 소설 속의 이미지이며, 이휘소를 다룬 서적들 역시 빈약하고 부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곁들여 만들어진다. 이런 류의 책에서 이휘소는 애국적인 과학자로, 효심 깊은 과학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휘소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에게 애국심이 있었건 효심이 깊었건 그렇지 않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 있는 것이다. 

몇 편의 소설은 분명 이휘소 박사를 우리나라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실제의 이휘소가 아닌 가상의 이휘소로서의 명성은 불명예의 명성을 드높인 것이다. 이휘소의 유족과 지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소설 속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휘소는 이미 학문적 업적으로 세계적 명예를 얻었다.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닌 상상력이 발휘된 허구의 이미지는 그에게 오히려 흠만 될 뿐이다. 미화로 각색하고 허구를 덧칠하지 않아도 이휘소의 생애는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정확하고 방대한 조사를 통해 사실에 기초한 최초의 이휘소 평전을 저자 강주상이 썼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휘소가 강주상의 스토니브룩 물리학과 시절 박사 학위 논문의 지도 교수였다는 친분 외에도 같은 물리학자로서 이휘소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공정하고 객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이나 기록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내를 오가며 이휘소의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하여 이 책을 써내려갔다. 상상을 배제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지인들의 논리적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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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이휘소 박사는 한국이 배출한 많은 석학 중에서도 학문적 업적이 탁월한 세계 최정상급의 과학자였다. 그의 도움으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또한,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노벨상 수상이 확실할 것이라는 평가를 대다수의 학자들이 내릴 정도로 물리학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그가 거둔 성과는 이휘소 개인으로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세계 물리학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후학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그는 이제 없지만 그가 남긴 성과들은 여전히 빛난다. 이 책을 계기로 많은 청소년들이 물리학을 비롯한 기초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각각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리게 될 그날을 기대해본다.- 오명(웅진에너지 회장)


『이휘소 평전』 발간의 의미는 나에게 남다르다. 책을 쓴 강주상 교수는 고려대 시절 은사이며 이휘소 박사는 강주상 교수의 은사이니 나에게도 스승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이휘소 박사는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낸 선배이자 동료이기도 하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뿐만 아니라,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의 면면을 제대로 기록한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같은 물리학자로서도 기쁜 일이다. 이 책이 그동안 잘못 알려져왔던 이휘소 박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학자로서의 이휘소를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세계 물리학계의 선두에 서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김영기(시카고 대학 물리학과 교수)


세계 입자물리학 연구의 메카인 페르미 연구소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 물리학자였던 이휘소 선생. 그는 한국의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정신적 버팀목’이면서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 이른, 그리고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베일에 가려지거나 왜곡돼왔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은 이휘소 선생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데,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제자 강주상 선생이 집필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책에서 당신은 소설보다 더 위대한 이휘소 선생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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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이준석 기업인
성별
남성
소속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대표), 클라세스튜디오 (대표)


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C%9D%B4%EC%A4%80%EC%84%9D&os=799113



이준석 "디도스 국민검증委, 나꼼수도 영입"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2203&idxno=524869 
 

한나라당의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은 28일 자신이 맡은 '디도스 검찰수사 국민검증위' 구성에 대해 "국민검증위라는 이름에 걸맞게 일반시민을 위원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또 중앙선거관리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사건에 대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인터넷 팟캐스트 정치풍자 토크쇼인 '나는 꼼수다'(나꼼수) 진행자들의 영입도 고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6세의 이 비대위원은 28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민검증위는 검찰수사결과가 국민 눈높이 수준에 맞는지를 검증하는 곳"이라며 일반시민 영입 의사를 밝혔다.

그는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시민'의 기준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일반시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검찰 수사결과 발표를 보고 국민검증위가 실제적인 활동에 들어갈 것"이라며 "수사결과가 기술적으로 미진한 부분이 있다거나 정치적으로 봤을 때 '나꼼수'에서 거론되는 의혹 같은 걸 해소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 사안에 따라 같이 활동할 위원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 비대위원은 "(의혹 제기를) 시작한 곳에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김어준 등 나꼼수 진행자들에게 내일 연락을 취해볼 계획"이라며 "안철수연구소 등에 기술검증도 의뢰할 생각"이라고 부연했다.

또 "국민검증위에서 나온 결론을 비대위에서 추인해 선관위에 관련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거나 검찰에 추궁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비대위 권한을 빌려서 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이준석 한나라 비대위원 "젊은층과 소통"
2011/12/27  10:05:09  연합뉴스
http://cn.moneta.co.kr/Service/paxnet/ShellView.asp?ArticleID=2011122710050901331  

"들러리 서지 않을 것..ICL에 관심 많다""박근혜 위원장의 진정성 의심하지 않게 돼"(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에 내정된 이준석 클라세스튜디오 대표는 27일 "제가 들러리를 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대위 참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26세로 미국 하버드대 출신이며 저소득층 학생 대상 무료과외 봉사단체인 '배움을 나눈 사람들(배나사)'을 출범시킨 이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부담이 매우 크다"면서도 "젊은층과 소통을 위해 고지식하게 정책을 많이 고민하겠다"고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이 위원과의 일문일답.

--20대에 여당의 비대위원이 된 소감은.

▲모두 파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명단이 지난주쯤 확정됐는데 지금까지 비밀이 유지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박근혜 비대위원장과는 어떤 인연인가.

▲만난 적이 두 번 있다. 첫 만남은 박 위원장도 모르고 있을 것 같다. 제가 미국서 대학을 다닐 때 한선교 의원과 찾아와서 그때 처음 봤다. 박 위원장은 지난 10월인가, 11월에 '배나사' 마포교육장을 방문해서 오랫 동안 수업을 참관하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누고 갔다.

박 위원장은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숨김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진지하게 많은 얘기를 해줬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들어가게 된 동기 등을 물었는데 진지하게 답변하더라. 가볍게 말하는 법이 없고, 생각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가 비대위원으로 결정된 것에는) 두번째 만남이 결정적인 것 같다.

--언제, 어떻게 비대위 참여를 요청받았나.

▲지난주 수요일(21일)쯤 박 위원장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저희 단체 내부구성원의 의사를 수렴할 시간이 없고 오해받을 소지가 큰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주말에 박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직접 왔다. 청년층 문제와 관련해서 (제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대위 참여로 마음을 돌린 이유는.

▲제가 고민해온 정책들이 있었는데 반영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나사' 활동을 4∼5년 하면서 여러 정치인을 만났지만 이번에는 제가 들러리를 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위원장과 통화하면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됐다.

제가 비대위에 계층대표, 직능대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가 "제 첫 인상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하는 타입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더니 박 위원장은 "당연히 그러셔야죠"라고 말했다.

-- 비대위 참여가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부담이 매우 크다. 그래도 부담을 인지하지 못해서 따라가는 나이는 아닌 것같다.

--젊은층과의 소통 강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겠나.

▲`소통을 위해 트위터를 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지만 저는 고지식하게 정책을고민을 많이 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정책이 2개 있다.

우선 취업후 상환 학자금대출(ICL)에 관심이 많고 그 쪽을 파헤쳐 보겠다.

--한나라당에 어떤 인물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좀 과감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시민사회운동 계열에서 좋은 사람을많이 보는데 많이들 움츠리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여준 게 있지 않는가. 그분을 `찬양'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당에 배운 사람과 현장에서 뛴 사람 사이의균형이 필요하다.


airan@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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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Schopenhauer (22 February 1788 – 21 September 1860)


It is the courage to make a clean breast of it in the face of every question that makes the philosopher. He must be like Sophocles' Oedipus, who, seeking enlightenment concerning his terrible fate, pursues his indefatigable inquiry even though he divines that appalling horror awaits him in the answer. But most of us carry with us the Jocasta in our hearts, who begs Oedipus, for God's sake, not to inquire further.
Letter to Johann Wolfgang von Goethe (November 1819)

Correct and accurate conclusions may be arrived at if we carefully observe the relation of the spheres of concepts, and only conclude that one sphere is contained in a third sphere, when we have clearly seen that this first sphere is contained in a second, which in its turn is contained in the third. On the other hand, the art of sophistry lies in casting only a superficial glance at the relations of the spheres of the concepts, and then manipulating these relations to suit our purposes, generally in the following way: — When the sphere of an observed concept lies partly within that of another concept, and partly within a third altogether different sphere, we treat it as if it lay entirely within the one or the other, as may suit our purpose.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1819; 1844) Vol. I, Ch. 10, as translated by R. B. Haldane

Reason is feminine in nature; it can only give after it has received. Of itself it has nothing but the empty forms of its operation. There is no absolutely pure rational knowledge except the four principles to which I have attributed metalogical truth; the principles of identity, contradiction, excluded middle, and sufficient reason of knowledge. For even the rest of logic is not absolutely pure rational knowledge. It presupposes the relations and the combinations of the spheres of concepts. But concepts in general only exist after experience of ideas of perception, and as their whole nature consists in their relation to these, it is clear that they presuppose them.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1819; 1844) Vol. I, Ch. 10, as translated by R. B. Haldane

The cheapest form of pride however is national pride. For it betrays in the one thus afflicted the lack of individual qualities of which he could be proud, while he would not otherwise reach for what he shares with so many millions. He who possesses significant personal merits will rather recognise the defects of his own nation, as he has them constantly before his eyes, most clearly. But that poor beggar who has nothing in the world of which he can be proud, latches onto the last means of being proud, the nation to which he belongs to. Thus he recovers and is now in gratitude ready to defend with hands and feet all errors and follies which are its own.
Parerga and Paralipomena (1851) Kap. II


How very paltry and limited the normal human intellect is, and how little lucidity there is in the human consciousness, may be judged from the fact that, despite the ephemeral brevity of human life, the uncertainty of our existence and the countless enigmas which press upon us from all sides, everyone does not continually and ceaselessly philosophize, but that only the rarest of exceptions do.
Counsels and Maxims Vol. 2, Ch. 3, § 39


The discovery of truth is prevented more effectively, not by the false appearance things present and which mislead into error, not directly by weakness of the reasoning powers, but by preconceived opinion, by prejudice.
Counsels and Maxims Vol. 2, Ch. 1, § 17


As the biggest library if it is in disorder is not as useful as a small but well-arranged one, so you may accumulate a vast amount of knowledge but it will be of far less value to you than a much smaller amount if you have not thought it over for yourself; because only through ordering what you know by comparing every truth with every other truth can you take complete possession of your knowledge and get it into your power. You can think about only what you know, so you ought to learn something; on the other hand, you can know only what you have thought about.
Counsels and Maxims Vol. 2, Ch. 22, § 257 "On Thinking for Yourself" as translated in Essays and Aphorisms(1970) as translated by R. J. Hollingdale 


Reading is merely a surrogate for thinking for yourself; it means letting someone else direct your thoughts. Many books, moreover, serve merely to show how many ways there are of being wrong, and how far astray you yourself would go if you followed their guidance. You should read only when your own thoughts dry up, which will of course happen frequently enough even to the best heads; but to banish your own thoughts so as to take up a book is a sin against the holy ghost; it is like deserting untrammeled nature to look at a herbarium or engravings of landscapes.
Counsels and Maxims Vol. 2, Ch. 22, § 261
 

Truth that has been merely learned is like an artificial limb, a false tooth, a waxen nose; at best, like a nose made out of another's flesh; it adheres to us only ‘because it is put on. But truth acquired by thinking of our own is like a natural limb; it alone really belongs to us. This is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thinker and the mere man of learning. The intellectual attainments of a man who thinks for himself resemble a fine painting, where the light and shade are correct, the tone sustained, the colour perfectly harmonised; it is true to life. On the other hand, the intellectual attainments of the mere man of learning are like a large palette, full of all sorts of colours, which at most are systematically arranged, but devoid of harmony, connection and meaning.
Counsels and Maxims Vol. 2, Ch. 22, § 261


Talent works for money and fame; the motive which moves genius to productivity is, on the other hand, less easy to determine. It isn’t money, for genius seldom gets any. It isn’t fame: fame is too uncertain and, more closely considered, of too little worth. Nor is it strictly for its own pleasure, for the great exertion involved almost outweighs the pleasure. It is rather an instinct of a unique sort by virtue of which the individual possessed of genius is impelled to express what he has seen and felt in enduring works without being conscious of any further motivation. It takes place, by and large, with the same sort of necessity as a tree brings forth fruit, and demands of the world no more than a soil on which the individual can flourish.
Counsels and Maxims Vol. 2 "On the Suffering of the World" as translated in Essays and Aphorisms (1970), as translated by R. J. Hollingdale


Writers may be classified as meteors, planets, and fixed stars. A meteor makes a striking effect for a moment. You look up and cry “There!” and it is gone forever. Planets and wandering stars last a much longer time. They often outshine the fixed stars and are confounded by them by the inexperienced; but this only because they are near. It is not long before they must yield their place; nay, the light they give is reflected only, and the sphere of their influence is confined to their orbit — their contemporaries. Their path is one of change and movement, and with the circuit of a few years their tale is told. Fixed stars are the only ones that are constant; their position in the firmament is secure; they shine with a light of their own; their effect today is the same as it was yesterday, because, having no parallax, their appearance does not alter with a difference in our standpoint. They belong not to one system, one nation only, but to the universe. And just because they are so very far away, it is usually many years before their light is visible to the inhabitants of this earth.
Counsels and Maxims Vol. 2 "The Art of Literature" as translated in Essays and Aphorisms (1970), as translated by R. J. Hollingdale

A man of intellect is like an artist who gives a concert without any help from anyone else, playing on a single instrument — a piano, say, which is a little orchestra in itself. Such a man is a little world in himself; and the effect produced by various instruments together, he produces single-handed, in the unity of his own consciousness. Like the piano, he has no place in a symphony; he is a soloist and performs by himself — in soli tude, it may be; or if in the company with other instruments, only as principal; or for setting the tone, as in singing.
Counsels and Maxims



Philosophy ... is a science, and as such has no articles of faith; accordingly, in it nothing can be assumed as existing except what is either positively given empirically, or demonstrated through indubitable conclusions.
Parerga and Paralipomena (1851) Vol I



Spinoza says that if a stone which has been projected through the air, had consciousness, it would believe that it was moving of its own free will. I add this only, that the stone would be right. The impulse given it is for the stone what the motive is for me, and what in the case of the stone appears as cohesion, gravitation, rigidity, is in its inner nature the same as that which I recognise in myself as will, and what the stone also, if knowledge were given to it, would recognise as will.



http://en.wikiquote.org/wiki/Arthur_Schopenh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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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선생, 먼저 살다 2011. 11. 25. 17:20


조국
(196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U of California Berkley 법학석사 법학박사
석사장교 군복무
울산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 부운영위원장
서울대학교 대외협력 부본부장
국가인권위원회
한국형사법학회
한국형사정책학회
한국비교형사법학회 이사

저서

1991년 <실천법학 입문>(편역, 학민사)
2001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책세상)
2003년 <형사법의 성편향>(
박영사)
2003년 <형사절차와 취약계층>(편저,
사람생각)
2004년 <성매매>(편저,
사람생각)
2005년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박영사)
2008년 <성찰하는 진보>(지성사)
2009년 <보노보 찬가>(생각의나무)
대한민국에 고한다(21세기북스)

역서
2010년 <인권의 좌표>(명인문화사)

공저

2008년 <배신>(한겨레출판)
2009년 <로스쿨 형법총론>, <로스쿨 형법각론>(박영사)
2010년 <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

수상

2003년 한국형사법학회 정암형사법학술상 수상.
2004.06: 한겨레신문, “한국의 미래 열어갈 100인” 중 “학술(인문•사회) 8인” 선정
2005.12: 경향신문사 “한국을 이끌 60인” 선정
2006.08: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 선정[수상저작:『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박영사, 2005)]
2008.04: 2007년 서울대 법과대학 우수연구교수상.
2009.10: 시사저널, "차세대 리더 300인" 선정
2010.05: 동아일보, "2020년 한국을 빛낼 100인" 선정

[2009.09.15 위클리 경향] 지식인의 길과 정치인의 길

조 국

법학교수로서 법학 연구 외에 법과 제도의 변화를 위한 사회 참여를 소명으로 삼고 살다 보니 어쭙잖게 허명(虛名)이 시중에 나돌게 되고 정치권과도 접촉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근래 국회의원 또는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필자가 진보개혁 진영 정치인으로서의 ‘상품성’이 있다는 판단, ‘책상물림’으로 장외에서 훈수만 두지 말고 직접 ‘선수’가 되어 뛰어라 하는 권유가 깔려 있는 듯하다.

사실 교수나 지식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 발전의 향방을 정하는 데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에 교수나 지식인이 학문 연구나 사회 비판을 넘어 정치 일선에 뛰어드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한국 여야 정당에 교수 출신 정치인이 여럿 포진해 있다.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미국 토머스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은 프린스턴 대학 교수였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로스쿨에서 법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으며, 현재 일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도쿄 공업대 교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변신이 가능하다고 하여 지식인과 정치인의 기본적인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은 진리를 탐구하면서 이에 반하는 그 무엇과도 싸우는 사람이기에 외롭더라도 대중보다 열 걸음, 아니 백 걸음을 앞서서 걸어 나가야 한다.
지식인은 본성상 ‘선출직’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식인도 지지정당을 갖지만 그 정당에 대한 ‘돌쇠’같은 강한 ‘충성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 정당에 대해서도 객관적 시각에서 혹독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다. 최인훈의 소설 <서유기>의 한 구절을 빌리면 “현실 정치의 어떠한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세력의 보증인도 되기를 거부”하며, “다만 가장 진보적인 당파의 가장 진보적인 행위의 가장 짧은 순간만을 지지”하는 것이 지식인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정치인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정치인은 끈적이고 질퍽이는 대중의 삶 속에 발가벗고 들어가 그들과 호흡하고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진리를 대중에게 강요할 수 없기에 정치인은 스스로를 대중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정치인은 대중보다 ‘반보’ 앞서 나가는 기술이 필요하다.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 아니 ‘차악’을 찾는다. 그리고 정치인은 소속 정당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에 종종 ‘당파성’을 진리보다 우위에 놓는 선택을 하게 된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인은 ‘악마와의 손잡기’를 하는 사람으로, 그 힘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힘 때문에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날짜가 다가오자 ‘정치계절풍’이 지식인 사회에까지 불고 있다. 다음 대선이 임박하면 이 바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지식인의 길과 정치인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없지만 둘 사이에는 존재론적 긴장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 참여를 하는 지식인일수록 어설픈 변신 이전에 이러한 긴장을 직시하고 자신의 삶을 펼쳐야 한다. 지식인과 정치인이 각자의 역할과 임무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서로 존중·소통·협조할 때 우리 사회의 틀도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조 국 교수(서울대학교)가 다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이라는 제목으로 두툼한 연구서 한 권을 출간하였다. 57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2001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2003년 『형사법의 성편향』에 이어 벌써 세 번째이다. 외국과 달리 연구서 출간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매우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차근차근 연구성과를 쌓아가는 조 교수의 관심이 다음에는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느 선배 교수가 필자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교수는 세 가지 과제를 늘 염두에 두고 연구생활을 해야 하는데, 첫째 열심히 가르쳐서 훌륭한 제자를 키우는 일이고, 둘째 평생을 두고 정진해야 할 연구테마를 하나 갖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연구성과를 책에 담아 출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책을 쓰는 일은 학문이 세대를 통하여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책 뒤 판권의 조 교수 약력을 보니 대학 졸업연도가 86년으로 되어 있다. 대충 나이를 셈해보니 이제 불혹(不惑)의 나이를 갓 넘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자로서 그렇게 많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교수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연구서에 담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특별히 이번 세 번째 책은 단순한 연구서 차원이 아니라 조교수 자신의 인생역정이 녹아 있는 결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은 관심을 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 교수는 형사절차혁명의 결실인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이야말로 형사사법 민주화의 요체로 보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를 위해 나름대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하늘은 학문은 ‘붓’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 교수 스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법률의 피의자 신분이 되면서 ‘위법수집증거’는 이제 자신의 현실로 둔갑한 것이다. 가상의 현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의 토대위에서 그렇게 조 교수의 버클리 박사논문 ‘위법수집자백 및 물적 증거의 증거배제’는 탄생하였다. 이러한 논문이 어떻게 남의 이야기처럼 쓰여 질 수 있겠는가. 이번에 출간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은 이 논문을 이론적 토대로 하여 한국 형사사법 현실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고 박종철(1965.4.1~1987.1.14)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조 교수의 아린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고려대 배종대 교수
한국형사법학회,『형사법연구』제23 (2005 여름),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조국, 박영사, 2005) 서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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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C%A1%B0%EA%B5%AD_(1965%EB%85%84)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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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inished your book yesterday. . . Since I read Von Baer's Essays nine years ago no work on Natural History Science I have met with has made so great an impression on me & I do most heartily thank you for the great store of new views you have given me. . .
As for your doctrines I am prepared to go to the Stake if requisite. . .
I trust you will not allow yourself to be in any way disgusted or annoyed by the considerable abuse & misrepresentation which unless I greatly mistake is in store for you. . . And as to the curs which will bark and yelp -- you must recollect that some of your friends at any rate are endowed with an amount of combativeness which (though you have often & justly rebuked it) may stand you in good stead --
I am sharpening up my claws and beak in readiness


Letter of T. H. Huxley to Charles Darwin, November 23, 1859, regarding the Origin of Species

File:T.H.Huxley(Woodburytype).jpg

"Huxley's support for natural selection is perhaps surprising when contrasted with his earlier attacks on the evolutionary theories put forth by Lamarck and Robert Chambers. Both of these theories advocated some kind of progression -- some kind of general tendency present in all organisms to evolve "upward" into more and more complex forms. Huxley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such progressionist ideas, which he regarded as being more metaphysical than scientific; this mistrust of progression lay behind his initial skepticism of all evolutionary ideas. Similarly, Huxley rejected the then-popular theory of recapitulation, following Karl von Baer (whose writings Huxley had translated from the German). Huxley wrote, "the progress of a higher animal in development is not through the forms of the lower, but through forms which are common to both lower and higher. . . "

Huxley's most famous writing, published in 1863, is Evidence on Man's Place in Nature. This book, published only five years after Darwin's Origin of Species, was a comprehensive review of what was known at the time about primate and human paleontology and ethology. More than that, it was the first attempt to apply evolution explicitly to the human race. Darwin had avoided direct mention of human evolution, stating only that "light will be thrown on the origin of Man;" Huxley explicitly presented evidence for human evolution. In this, once again, he locked horns with Richard Owen, who had claimed that the human brain contained parts that were not found in apes, and that therefore humans could not be classified with the apes nor descended from them. Huxley and his colleagues showed that the brains of apes and humans were fundamentally similar in every anatomical detail."



Thoms Huxley (1825)

assistant surgeon to HMS Rattlesnake
navy
vertebrae palaeontology
anatomist
"darwin's bulldog'
man's place in nature - man's relationship to apes
the x club


http://www.ucmp.berkeley.edu/history/thuxley.html
http://en.wikipedia.org/wiki/Thomas_Huxley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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