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oco Machiko lives and works in Japan. Her charming flora and fauna paintings amaze, with their fauvistic use of color and primitive linework. Gorgeous.
읽는 중이다. chronologically 흘러가는 전개임으로 어린시절부터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잡스의 모습을 읽고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이작슨의 서술형식. 아이작슨의 글은 그의 Einstein 아인슈타인의 전기 후로 두번 째다. 그의 서술에는 변함이 없다. 잡스는 아이작슨에게 직접 본인의 전기를 쓸 것을 부탁했다고한다. 전기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니어서 배경없는 의견이나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작슨의 글은 깔끔하다, 이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깔끔하다. 그래서 좋다. 군더더기라거나 부풀림, 과한 드라마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사건과 사실 fact 로 재미를 만들어낸다. 전기를 쓰는데에 상당히 적합하다.
두 번 째로 느끼는 점은 잡스에 대해서이다. 애플의 제품은 ipod nano 와 ipod touch 이따금 mac 을 사용 한 것. 애플에 메달리지 않는다, 전혀. 반감은 없다, 만 잡스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는 암환자였고 natural remedies 자연 치유법을 시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정도가 배경의 전부였다. 잡스의 어린시절,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애플을 시작하는 시점까지 읽었다. 여기까지 잡스의 삶, 과 그의 삶에 포함되었던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있자면 그는 '미친 히피' 정도로 정리가 된다. 그는 이상하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대부분 'that is shit' 그것은 오물이라고 대답하며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 혹시 제시된 아이디어가 마음에든다면 'that is shit' 이라고 대답하고 일주일 후에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본인의 생각인양 아이디어를 다시 이야기한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은 바보거나 천재였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창작들을 사랑하거나 당신은 재능없는 필요없는 존재인양 여겼다고한다. 그는 불가능을 믿었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불가능을 강요했고 그것이 불가능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로. 그래서 그는 이상했고 비정상적인 요구를 비정상적인 시간안에 완성되기를 요구했고,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혁신들을 나았다. 미쳐야만이 가능한, 미쳤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 참으로 일반의 틀을 벗어나야만이 가능한 일들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읽은 잡스는 '미친 히피'이다, 천천히 읽고있다. 아이작슨의 서술형이 깨끗하고 재미져서 보다 재미있는 책이다. 전개가 기대된다.
세상이 둥그니까 나를 흥분시킨다는 .. 뭐 이리 좋은 노래가 있는가. 비틀즈는 역시나 미친 천재, 천재적으로 미친거야.
One of the best examples of John Lennon, Paul McCartney, and George Harrison's harmonizing, Because.
The song begins with electric harpsichord played by George Martin and then joined by Lennon's guitar doubling the harpsichord and played through a Leslie speaker. Vocals and bass guitar enter in what Alan Pollack calls the "mini-bridge."
The song was one of the few Beatles songs to include an analog synthesizer arrangement (although analog keyboards such as the Mellotron had been used often by The Beatles, few songs featured the use of a traditional analog synthesizer with voltage-controlled oscillators). The Beatles at the time of Abbey Road were among the first contemporary rock bands to experiment with the Moog synthesizer (the first, or at least the first to chart on the top 40, had been The Monkees).
According to Lennon, "Because" was inspired by Ludwig van Beethoven's "Moonlight Sonata". "Yoko was playing Beethoven's 'Moonlight Sonata' on the piano ... I said, 'Can you play those chords backwards?', and wrote 'Because' around them. The lyrics speak for themselves ... No imagery, no obscure references."
The main recording session for "Because" was on 1 August 1969, with vocal overdubs on 4 August, and a Moog synthesizer overdub by George Harrison on 5 August. As a result, this was the last song on the album to be committed to tape, although there were still overdubs for other incomplete songs.
A vocals-only version of the song can be found on Anthology 3 and Love and is an example of three part harmony from Lennon, McCartney, and Harrison, although the latter is slowed down and includes quiet nature sound effects. Both versions include the 'Ahh' at the beginning. This song appears in the movie "American Beauty" where it is dramatically placed right after the last words of the film.
빌 클린턴, 늙었다. 말 참 잘 한다, 히야 .. 잘 한다 하면서 보고있는데 본인이 직접 쓴 연설이란다, 대박. 마치 이 캠페인을 위해 태어난 듯, 능숙함과 편안함. 미국 정치라는 공간에 인생을 담은 사람이니만큼 익숙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놀랍다. 참으로 내가 원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이란 저런 것이구나, 저것이 정석의 모습이구나 싶은 모습. 감탄에 감탄이다, 어메이징. 이러한 현란하지 않은 간단함, 공감의 주제들을 적절히 다룬, 자신이 지식과 능력을 한껏 활용한 연설. 이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다 싶다. 보면서 '투표하고싶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것, 이것이 힘이다. 박수.
미술 그림 인물화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Ikenaga Yasunari 의 작품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눈에 반했다. 주로 여자들을 그리는 현대작가이지 싶은데 눈빛이 슬프기도하고 평안한 것이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 인상을 준다. 색감도 편안하고 문양들도 하나하나 매력적이고 감각적이다. 아름다워 so beautiful.
야스나리 Yasunari 라는 이름은 설국의 작가 Kawabata Yasunari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상기시킨다. 오묘하게도 두 작가 모두 부드러우면서 아픈, 감각적이면서 세련된, 고흑하면서 완벽한, 따듯함과는 상당히 멀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 얼추 비슷한 방향의 느낌을 준다. 피에 닮은 어떠한 것이 흐르는가.
찾을 자료가 있어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를 들어가니 참으로 재미지구나 웃기다. 이전 블로그 http://blog.naver.com/englicious 이전 블로그를 고등학교 때 부터 얼추 3년 사용하였는데 게시글 수가 68이다. 비밀번호를 잃어 비공개 글이 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하다. 현재 이 블로그를 사용한지 1.5년 정도인데 총 글 수가 384이다. 비공개 글은 없다. 물론 당시에도 병행 블로그가 다른 곳에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두 메인 블로그를 비교하여 이리 큰 차이가 나다니 .. 갈 수록 글의 숫자가 늘고있다, 그 만큼 글의 질도 늘었으면 좋겠구나 ! 확실한 것은 내용적으로 즐거움과 편안함이 늘었다, 나의 삶에 즐거움과 편안함이 늘었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의롭고 좋구나 :) good for me ! 장하다.
와중 내가 좋아하던 글귀를 올린 포스팅이 있으니, 지금 읽어도 좋으다 좋구나. 근래 드는 생각이 나에게 장점이있고 단점이 있는 중, 나는 매일 나의 단점, 그것도 특정 단점 한 가지에 목 메여 절절 절망하며 지냈다. 하루도 빠짐 없이 그 한가지 단점에 대해 생각했고 다른 장점들 단점들은 스쳐가는 모습인양 비교 할 만한 비중도 두지 않았다. 그 작은 점에 두 눈과 마음이 모두 가리어저 다른 생각들도 일들도 할 수 없이 낭비한 시간은, 이제 시간의 단위를 넘어 긴 세월들이 되었다. 이제서야 나에게 그 한 가지 외에도 많은 성격 및 경향과 조각들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제서야. 그렇게 나는 하나의 단점이 아닌 장단점의 조합이라는 것을 .. 불과 몇 일 전에 알게되었다. 참으로 당연한 것인데 알 수 없는 것들. 중력처럼 당연하지만 중력처럼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나이가 들었다, 철이 들었다, 하지만 배우고 느낄 것은 고갈되지 않음을. 겸손해야함을 다시 느낀다.
엄마 보고싶다.
하늘이 내게 ‘고난’과 ‘시련’을 내리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고난을 그저 고난으로 여겨 평생 원망만 하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낼 것이나, 지혜로운 자는 역경을 발판 삼아 그 속에서 참으로 빛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본디 사람은 육체의 고통을 빌어 정신을 단련시켜 가는 이성의 존재다. 육신의 배고픔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불행한 것은 세상 물욕에 빠져 혼 줄을 놓고 타락으로 일관하여 살아가는 정신의 궁핍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재물을 곳간에 쌓아 놓고 위세를 부려 본들, 물 위에 떠 다니는 한 가닥 지푸라기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감에 진정한 고난을 모르고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의 배부른 축생(畜生)의 삶에 불과하지만, 고난(苦難)의 이치를 잘 극복하고 헤아리면 전혀 놀라운 뜻밖의 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모름지기 육신이 안락한 사람은 정신이 초라하고, 정신이 풍요롭고 고도한 사람은 그런 자질구질 한 물질의 경지를 이미 넘어 선 상태다. 만고를 통틀어 부(富)를 등에 지고 큰 인물 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일찍이 가난을 벗 삼아 만인의 추앙을 받는 성인(聖人)이나 현자(賢者)된 자들은 수두룩 하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스스로 만사를 불공평하게 만들고 살 뿐이다. 그 모든 인생의 원천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랑 위대한 “의 힘”이다.
참된 아름다움 true beauty 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캠패인 활동차원에 Michelle Obama 와 Jill Biden 이 미국을 투어하며 Seattle 도 방문했었다. (당시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내용 첨부. http://blog.naver.com/englicious/120117356969 ) 당시에도 그녀는 위의 DNC Speech 에서 사용된 본인의 아버지와 버락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미셸은 저 이야기를 수 백 수 천번은 했으리라. 그녀의 언변이 보다 능숙하고 치우치게는 습관적이어 보이기까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진심, 진심임을 알 수 있다. 2년 전 20m 앞에서 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도 화면으로 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진심은 늘 있다. 성공의 잣대는 돈이 아닌 기준과 가치라는, 너무나 자주 듣는 식상한 주제이지만 진심은 진부함을 넘어 감동을 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한다, 대중을 움직인다. 놀라워.
Michelle is gorgeous 참 예쁘다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에 남긴 luncheon review, 역시나 기록을 남김은 좋다 좋으다 ! 당시 iPod touch 로 찍은 사진들 하하 2 년 전의 기계 기술.
한국은 당이 참 여럿이지만 미국은 Democrate, Republican, 비교적 간단, 일까? 허허허.
Obamas 와 Bidens, 즉 오바마 내외와 바이든 내외가 캠패인을 돌고있다.
본 행사의 공식명칭은 Murray Victory Luncheon with First Lady Michelle Obama
Murray 성공, 영부인 Michelle Obama와의 오찬, 으로 해석, 흠.
장소는 Hyatt Regancy Bellevue, WA
Washington State, 워싱턴 주는 미국에서 여성 정치가들이 가장 여럿 임.
Governor 주지사 Christine Gregoire
Congress Suzan DelBene
Senator 상원의원 Ptty Murray
오늘의 모든 스피커들은 여자였다.
연설 순서대로 나열 하자면
Suzane DelBene
Ellen Malcom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elle Obama
Ellen Malcom 은 Emily's List 라는 여성 민주당원들을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검색해보니 IBM 공동 설립자 중 한 명 이며 상속인이다. 1998년 Vanity Fair의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여자 100 리스트에 올랐다. 후덜덜.
일단 사진을 좀 찍었다.
들어가기 위해선 Register를 해야한다. Register는 1000시에 시작이였다. 나의 도착시간 0910. 200명 가량 줄을 서 있었다. 나도 Register를 하기 위해 줄을 선다. 1000시 전인 0940시 부터 Register가 시작되고,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Register는 신분증으로 이름과 본인의 신분을 확인하면 위의 파란 티켓을 준다. 그것을 받고 Security Check 를 받는다.
Metal detector 를 통과해야하고, 핸드폰, 카메라 등 전자제품은 작동이 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함으로 켜고 손에 들고 있어야한다. 액체는 마실 수 있는 것임을 확인 해야 함으로, 경비원 앞에서 한 모금 마셔야 한다.
보안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선다.
경비 사람.
보안 통과하니 대략 1030시. 오찬은 1100시 시작. 행사가 진행 될 Ball Room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린다.
기다리는 중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다.
아직 붐비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소히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다.
구부정히 앉아계신 할아버지.
Volunteer들이 좌석배치도를 가지고 다니며 좌석위치를 확인해 준다. 테이블 번호로 자리를 확인 해주어 Ball Room에 들어가면 바로 테이블을 찾을 수 있다.
1000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Volunteer는 대략 30명 가량 이였던듯, 충분했다.
조금씩 붐비기 시작.
파노라마 샷.
1100시, Ball Room 이 열였다.
Hyatt Regency Ball Room. 테이블 당 10명, 대략 100 테이블이 넘는 듯.
메뉴는 크랜배리 닭 가슴살과 감자, 그리고 사과 사이다 식초 드레싱 샐러드. 후식의 이름은 모르겠음. 초콜릿과 치즈케익의 종류였음. 난 후식 2개 먹음.
오찬에 참여한 가장 예쁜 여자.
막상 연설들이 시작되고서는 듣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 않음. 미셸만 2장 찍고 연설 녹음 함.
대통령, 영부인, 부통령도 마찬가지겠지만, 보안에 상당히 많은 심여를 기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영부인이 방에 들어온 후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연설대 앞에는 여럿의 투명 30cm x 50cm 정도의 판자들이 세워져 있음. 테러를 대비하여 보호대를 세운다고 한다. 스피커도 일부러 저렇게 적나라히 연설자를 가리는 각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 허허 흠.
연설자들의 순서를 다시 적어보겠다
Suzan DelBene
Ellen Malcolm
Governor Christine Gregoire
Patty Murray
Jill Biden
Michelle Obama
각 연설은 대략 10-13분.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었다, 25분을 조금 넘긴 듯.
기억에 남는 점들만 적어보겠다.
Christine Gregoire
호소력있는 연설가, 내용전달이 명확. 단지 추가설명이 부실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명료. 'Patty Murray의 Republican 상대, Dino Rossi은 안된다' 로 사람들의 호응을 삼. 각 후보의 정치적 역사를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는 나로써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 함. Rossi의 낙태반대와, 피임반대에 대한 입장을 부정적으로 표현. 상대후보를 깍아내리는 식의 연설내용은 사실 비호감. 하지만 열정이 확실히 전해지고, 강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음.
Patty Murray
Gregoire와는 다른 부드러운 강인함. 본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며 사람들의 호응을 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7의 형제자매를 기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7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내고, 대학을 졸업시킨 부모님의 이야기를 함. 본인의 엄마신분을 중요시 내세움. 유치원 선생님으로 시작해, 학부모회의 구성원이였던 삶을 이야기하고, 정치에 뛰어든, '운동화 신은 엄마'의 이미지를 사용.
아이들과, 여성과, Veteran (참전 군인)들을 위해 일 할 것을 강조.
Jill Biden
비교적 짧았던 연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 현 정부의 업적에 대하여,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 본인의 Community College에서 교수로써의 보람에 관하여, Community College의 중요성에 관하여 설명. Murray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무난한 연설. 역동적이지도, 감동적이도 않은, 수긍 할 만한, 원만한 내용, 전달의 연설.
한 가지 느낀점은 Jill Biden 은 굉장히 예쁘다, 외모적으로.
Michelle Obama
이 여자가 왜 Barack Obama의 여자인지 알 수 있음. 연설대에 서자 사람들이 박수를 매우 많이 침. Michelle이 매우 고마워 함, 웃으며 편안하게 받아드림. 관중을 칭찬하며, 농담으로 시작. 본인은 선거 캠패인에 아직 생소하다며, 얼마 전 있었던 '작은' 캠패인 이외에는 경험이 없다고 농담 (대선 캠패인). 본인이 선거 캠패인에 임하는 자세를 설명, 본인이 지금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두 딸을 위해서라고 설명. 하는 모든 일의 이유는 두 딸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한다고.
(이하부터, 나의 개인적 편의를 위하여 1인칭도 사용하겠음, 내 마음대로 블로깅, 허허흠.)
세상을 보는 방법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이다. 파병된 아빠를 둔 아이의 눈에서,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아이들을 우리는 위해야 한다.
본인의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함. 아버지는 Multiple Sclerosis로 몸이 불편하여도, 매일 아침 City Water Plan에 일하러 나가셨음. 나와 나의 오빠 (동생인가. .Brother)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주기 위하여 아빠는 매일 일 함.
Barack의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 그와 그의 여동생을 위하여, 동이 트기전에 아침 버스를 타기위해 출근하심. 승진의 기회들이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빗나가도, 불평하지 않고 그녀는 매일 최선을 다하여 일 함.
그리고 현 정부의 실행들을 나열 함.
여성 평등 임금, 국민 보험, 중소기업 세금 감소, 중산층 세금감소 등등.
Veterans에 대해 설명, Womens rights에 대해 설명. 줄기세포 지지에 관해서도 이야기 함.
보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얘기 함. Barack의 엄마가 삶의 마지막 날들을 보험회사와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하며, 보험회사들의 만행을 저지하는 규율들 설명. 국민 보험은 국가의 돈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
Barack 의 슬로건 'Change'에 관해 이야기 함. 변화는 쉽지 않다는 것. 많은 이들은 Barack의 임기가 시작 된 날 '변화'를 기대했지만, 변화는 그리 빠르지 않음. 함께 움직여야, 에너지를 모아, 이번 선거 또한 힘을 모아야 변화의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함.
American Dream에 대해서도 이야기 함. Michelle은 지칠때 기억하는 것은 본인의 아버지임을 이야기 함.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 근육이 굳어가, 단추를 채우기 어려워 하면서도 출근하는 모습을 기억. 그리고 선거날을 되세김. 그리고 취임식날을 되세김.
마무리는 Patty와 같은 지도자가 우리는 필요하다를 강조. 아는 사람 10명에게 연락하고, 그들에게도 10명에게 연락하라고 전달하라. 모르는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라. 앉아있는 사람에게 전달하라, 우리는 이번 선거를 앉아 있을 수 없다 (방관 할 수 없다.) 대선의 에너지를 기억하고, 그 "Movement"를 다시 일으키면,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Yes we can!
Yes we must!
Yes we will!
을 외치며 환호를 받으며 끝.
Michelle의 연설이 가장 길기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세한 '이미지'와 쉬운 단어들을 사용. 연설 중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었음. 간단한 메세지, 구체적인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연설. 중간 중간 농담을 던져 관중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 또한 큰 몫. 하아, 저 여자.
기억나는대로, 최대한 순서를 살려 쓰려니 정리가 너무 되지 않았군.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참석한 자리. 작은 기대가 있었다면 '계기'를 찾고 싶었음.
음. 감회라면, 두가지. 나 자신이 사회의 조각임,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매우 간단함임을 인식.
Jill Biden, Michelle Obama, Patty Murray, 아이들의 엄마이고, 부모들의 자식이고, 남편들의 아내인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살아 가고있음. 아름다움은은 타고난 환상이 아닌, 솔직한 호소, 그리고 인류에 대한 동질감이라 느낌.
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경상도 친구도 없고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경상도 사투리가 무엇인가,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것이 경상도 사투리인가 ?! 하는 느낌은 처음 받았다. 경상도 방언 자체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김제동씨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방언, 그것은 참으로 참으로 매력 철철 아름다운 재미진 것이더라 !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나눈다는 것, 참 용기다. 나는 이따금 하물며 엄마아빠에게 동생에게 친구들에게도 어려워 부끄러워 슬퍼 속상해서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나눈다. 그의 나눔이 전부가 아닌 일부일지라도, 자신의 진심된 일부를 나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용기라 생각된다.
누군가를 웃게하려면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가 나를 좋아해야한다는 말, 옳다. 이 날 나는 참으로 많이 웃었다 참으로 많이. 주체적임을 강조했던 그의 한 시간, 참으로 진심된 참으로 상대에게 긍정을 바라는 이의 조언에 감동을 받았다. 대중, 어쩌면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텐데, 같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위하는 마음. 그저 사람이기에 혹은 그저 그냥 나 아닌 다른 누군가, 무언가에게 good 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신기하기도하고 고맙고 멋지게 느껴진다. 나에게 웃음과 즐거움, 감동과 행복을 보여준,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김제동씨, 너무 좋아 김제동씨!
올 해 시애틀은 특별히 여름이 길다. 9월의 문턱을 넘었는데도 하루하루 파란하늘과 금빛 햇살이 가득하다. 비는 너무나 좋지만 흐린 하늘은 버거운 나에게 행복을 주는 하늘이다. 법륜스님과 김제동씨의 강연에 담긴 내용 중 '주체적' 이라는 주제가 인상에 깊게 남아 하루에 몇 십번씩 생각이난다. 하루하루 주체적으로 나는 나의 주인임을 기억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만큼 하는 것. 이따금 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나의 모습들, 때로는 너무나 견디기 어렵고 불편한 나 자신이지만, 하루의 시간 중 주체적인 비율을 많게하도록 노력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이렇게 쌓이는 날들이 쌓이는 글만큼 많고 나를 만든다. 슬픈 일이 많았지만 돌아보면 '배움이었다' 라며 웃을거다. 이렇게 행복하고 가볍게 살 수 있는 것을, 그 동안 어리석었지만 무관히 앞으로 행복하기.
행복하다. 하루하루 운동 공부 감사함 햇살로 가득한 날들이 이어지고있다. 언니는 9일동안 유럽여행을 떠나셨지만 이 번에 빈 집은 지난 번 처럼 공허하고 어렵지 않다. 역시나 경험은 배움을 주었고 괜찮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괜찮다, 좋다 행복하다 즐겁다.
어젯 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얼추 이주일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 통화동안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엄마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운 우리 엄마, 보고싶은 우리 엄마, 사랑하는, 언제나 나를 위하는 엄마. 엄마아빠가 나의 귀국날을 매우 기다리신다. 봄 쯤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하니 굉장히 기뻐하시며 기대를 많이 하신다. 나와 동생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끼신다는 두 분, 참으로 감사한 엄마아빠. 매일 보며 지낼 수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애뜻한, 아쉬움만큼 그리움이 큰 유학생활이다.
super proud of me :) 언제나 솔직한 것이 가장 옳은 것
불면에 신경완화제를 종종 먹곤 했었는데 습관이 되는 듯 싶어 멀리하는 중. 그제는 잠이 오지 않아 6시에서야 잠에들었지만 약을 먹지 않았다, 뿌듯하다 proud of myself. 근래 참 많이드는 생각이다. '나아지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감사하고 뿌듯하다. 긍정을 향하고있는 지금,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positivity brings positivity 긍정이 긍정을 부른다, 사실이다. 주체적임은 의도적이고 축복은 운명이지만 의도가 운명을 만든다. 나으리 heal 나았다 have healed.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부정하고싶지만 언제나 솔직한 것이 가장 옳은 것이기에, 객관적인 진단은 아직이라는 것. 하지만 나아지고있다, 분명히. 무엇보다 긍정에대한 믿음이 있다. 또한 정신적으로 무엇이 옳은지에대해 뚜렷한 기준이 만들어졌다. 옳지 않은 것이 옳지 않음을 몰랐던 시절보다 수 단계 나아진 지금이다. 몸을 성스럽게 생각하고 아끼자, 옳바르게 대하자. treat my body right. 요즘 눈이 따금거리고 기관지, 특히나 목구멍이 부었고 아프다. 턱과 어금니 또한 자리를 잃은 느낌, 나을 시간이 필요하다.
9월이어서인지 시험공부하는 카페인들이 늘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있는다, 종일. 카페 한 구석 여자가 남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긴 문장들을 빠른 속도로 줄줄이 뱉어낸다. 남자가 가방을 등에 맨 체로 눈을 껌뻑이며 듣는다. 서러운 얼굴과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이 마주 앉아있다. 유리 벽 밖은 비가오더니 흐린 하늘에서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곧 가을이, 혹은 이미 가을인가. 네 아기 엄마들이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셋이 흰색 검정색의 줄무니 옷을 입었다. Snickerdoodle 을 찾으러 갔지만 오후여서인지 하나도 남지 않았다. Holiday limited offer 라는 White chocolate Macadamia nut 로 대신한다. 아 달달해 :) 짙은 금발의 남자가 흐린 하늘빛 단추셔츠 안에 흰 라운드 면티를 입고 앉았다. 회색 맥 프로를 두드리다 왼손으로 코를 만진다. 네번째 손가락에 굵직한 반지가 끼워져있다. 파란 바탕에 흰 포카닷 남방을 입은 여자가 일자 앞머리를 내고 긴 뒷 머리를 정수리에 동그랗게 묶었다. 쇼파에 넓게 앉아 David Sadaris 를 읽는다. 책은 민트색이고 입술은 빨갛다. 눈은 파랗고 몸은 무겁다. 지금은 없지만 얼추 두시간 전 쥐색 면 티셔츠에 보트슈즈를 신은 동양청년이 높은 의자에 앉았었다. 브루넷 남자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던 그는 앉은 모습에서도 큰 키와 주 5회 운동의 습관이 보였다. 반해서 한참 쳐다봤는데 어느 사이 사라졌다. 아쉬움이라면 허리가 구부정했으며 손짓이 어색했고 웃지 않았다. 연한 청 자켓에 검정 회색의 줄무니 셔츠를 안에 입은 검정머리 학생이 넓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있다. 종이 몇 장과 3가지 색의 펜을 테이블에 두고 흰색 검정색 Bose 이어폰을 양 귀에 꽂고있다. 종이들을 한참 바라보다 허리를 펴 검정 16 inch 노트북을 뒤적인다. 나다. 하하. 저 커플은 몇 시간을 저러구있다. 나두 할래 연애.
"everybody dies but not everybody lives" 누구나 죽지만 누구나 살지는 않는다
월요일이다, 한 주 중 가장 좋아하는 월요일이다. 토요일 일요일 건너 뛴 운동을 다녀왔다. 기분전화에 운동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한 세트에 20개씩하던 윗몸일으키기인데 처음으로 40개 세트를 했다, 와우 ! 근력이 늘고 있는 것이다 베리 굳 매우 좋다. 운동을 마치고 자전거를 데리고 상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한다. 오늘의 두번 째 샤워를하고 저녁식사를한다. 가방을 챙겨서 카페에 간다. 두 잔 째 커피, decaf 를 주문한다. 2229시, 카페에 60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음료와 업무 혹은 여유를 가지고 앉아있다. 이 중 10 % 는 한국인, 와우 기이하구나.
'더 이상 절대로 안되'라는 생각을 수십번 하였는데도, 발전은하였지만 완전히 버리지 못 한 습관. 숨은 길어지고 마음은 피곤하다. 기도를하자 아픈만큼 절심함으로, 기도를하자. 제발 .. 간절함을 기도하자. 많이 매일 자주 계속 오래 , 죽어라 하자 기도.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죽었다. 참으로 피곤하다, 이제는 지쳐서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도 잡지 않으리라. 모든 힘 기운 에너지를 놓아버리고 내가 아닌 우주의 기운에 맡길테다. 다들 잘 한다고 하는걸텐데, 사는게 그냥 웃기다. 다들 최선을 다 하는걸텐데, 각자 나름의 노력 중일텐데. 나 또한 잘 하고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하고 웃기다. 왜이러고 살지, 후회도하고 되돌아가고싶기도하고,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잘해야지 다짐은 매일 매해 이지만 여전히 후회 중이다. 하지만 괜찮아 ! 괜찮아, 잘 하고있어. 웃자.
실력이 제법 늘었다. 다 모르겠던 문제들인데 이제는 10 ~ 20 % 모르겠다. 여전히 갈 길이 제법되지만 온 길이 훨씬 길다. 나는 열심히 지냈는가, 열심히 지냈다고 자신있게 대답 할 수 없다. 괜찮다고하자,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운동예찬 ! 운동했다. 몸무게가 늘어 충격적인 마음을안고 열심히. 윗몸일으키기가 보다 수월해졌다. 앞으로 더욱이 수월하기를. 기분이 상쾌하고 신이난다. 몸은 무겁지만 곧 가벼워지리라 ! 소화가된다, 몸이 좋아지고있다. 무게를 줄이자 아래로 아래로 줄줄줄이자. 기분 좋아 헤헤. 카페에 앉아있는 2305시. 유난히 귀여운 사람들이 많은 오늘이다, 기분이 좋은건가. 신선한 야채 장 봐서 집에 가서 자야겠다. 기도하구 청소하구 기도하구 자야지, 굳 밤 :) ♥♥♥ 행복해
그제 어제 오늘 속이 좋지 않다 싶더니, 매일 점심으로 먹는 토스트와 치즈가 문제였다. 오늘도 토스트를 구워 먹는데 빵이 상하고있음을 알아차림. 미미한 크기였지만 눈에 보일만큼 상했다면 이미 미생물 번식은 몇 일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조각이었는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하지만 큰 탈은 아니었고 의아하다 싶을 정도였으니 다행.
근래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약을 먹고 잔다. 어제는 왠일인지 약이 잘 듣지 않아 중간에 깨었다. 면역력이 생기는 것일까.
카페 화장실, 라임색 큼직한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긴 금발 생머리 십대 여자 아이가 거울 앞에서 울고있다. 나는 마지막 운 것이 언제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Seattle 로 이사를 와서 많이 울기도했지만 고등학교만큼 편안하게 운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면 이유도 되지 않는 이유들로 물풍선이 터지 듯 엄마 아빠 앞에서 눈물을 쏟고는 했다. 생각하니 또 코가 찡하네. 근래 이렇게 툭하면 코 찡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다. coldplay 의 up in flames 를 들어도 us against the world 를 들어도 들을 때마다 코가 찡하고 마음이 쨩하면서 울 것 같은, 순간들이 울컥울컥 온다. 하루에 이 곡들을 수십 수백번 종일 들으며 매 번 찡하다. 하루 수백번 찡하다, 감수성 폭발의 9월 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눈물을 쏟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편안하게 울 수 없는 곳이 Seattle 이지 싶다.
9월의 목요일 - Thursday of September 단어조합만으로 느낄 수 있는 완벽함.
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으며, 아니 법륜스님을 무대위에서 보자마자 느낀 것은 '진심' 이었다. 미국이라는 이국까지 해마다 이야기를 나누러 오신다는 부지런함, 은 진심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 참으로 진실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심이 전해졌다. 웃는 모습 또한 그저 '진솔함'의 정석으로 느껴졌다. 첫 인상부터 너무나 신기했던 법륜스님의 모습.
어쩌면 진부한, 자기계발 서적에서 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기도하지만 진심어린 의견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닿았다. 강연을 보기 전에 인터뷰들과 기사들을 몇 가지 읽고 기대가 없기도했고 있기도 한, 어쩌면 중립에 가까운 마음으로 찾아간 강연은 좋은 경험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가 움직인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인다는 모습이 무엇보다 큰 감동이었고 배움이었다. 진심으로 원하고 실천하는 모습, 그야말로 무엇보다 굉장함, 이다.
법륜(法輪,1953년4월 11일~ ,울산광역시출생)은대한민국의승려이자 사회 운동가, 구호 운동가, 환경 운동가이다. 현재 구호단체한국JTS의 이사장이다. 법호는 지광(智光)이며, 속세명은 최석호이다.
1953년경상남도울산군 두서면 (현울산광역시울주군)에서 태어나1969년12월분황사에서 불가에 입문했다. 그 후,1988년수행공동체인정토회를 설립해 수행지도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는 만해상 포교상을,2002년에는 구호단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막사이사이상'국제평화와 이해' 부문을, 2007년에는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2010년불교계의4대강 사업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1]정토회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2011년 2월 포스코 청암상 청암봉사상을 동티모르의 알로라 재단과 공동수상 하였다.[2]
저서로는 《실천적 불교 사상》,《금강경 이야기》,《반야심경 이야기》,《붓다, 나를 흔들다》, 즉문즉설 시리즈 《답답하면 물어라》,《스님,마음이 불편해요》,《행복하기 행복전하기》,《행복한 출근길》,《날마다 웃는집》,《기도》,《스님의 주례사》 등이 있다.
조계종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조계종 측에서는 법륜을 본명인 '최석호 법사'로 부른다.[3]
한국JTS(Join Together Society)는정토회의승려법륜(현재 JTS 이사장)이기아,질병,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구호개발비정부 기구이다.
20세기의 마지막에 인류 최후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남북의 대립으로 한쪽에서 수백만의 동포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비극이 아니라 정치적 갈등과 분쟁이 야기하는 인류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국지적인 분쟁과 대립이 양산되고 있는 인류에게 있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법륜스님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정파적인 이해나 이념적인 견해에 우선적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해왔다. 남북한의 긴장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실천은 어느 때는 친북적인 인사로 오해받아 감시를 받고, 또 다른 때는 반북적인 인사로 활동을 제한받기도 하였다. 법륜스님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과 그보다 더 냉정한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일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인 지원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대북 지원과 탈북자 돕기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한 장기전략을 연구하는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 눈물로 읍소하면서 펼쳐온 북한동포돕기운동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서 법륜스님 하면 북한동포돕기가 떠오를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을 발로 뛰어다니며 알리고 눈물로 호소하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법륜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다, 동포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조선족 동포들의 이야기에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직접 압록강변에서 불러도 쳐다보지 못하는 북한어린이의 모습에서 법륜스님은 그 동안의 외면한 마음에 대한 참회와 함께 바로 앞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력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북한돕기에 대한 눈물어린 서원을 세웠다. 96년 12월 잠수함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될 때 각계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북한동포돕기의 불씨는 전국으로 퍼져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함께 대북지원을 호소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북한돕기운동은 국내의 반대 여론뿐아니라 북한정부의 반감을 살지라도 목숨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힘입어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2. 갈등과 대립을 넘어 상생과 조화의 관계로 법륜스님은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보살의 삶을 서원으로 한 정토회를 설립하여 배고픔이 없는 세상, 모든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세상, 배우지 못한 고통이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해왔다. 정토회는 인류에게 불어닥친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의 대안으로서의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무아, 무소유, 무아집의 부처님과 보살의 삶을 모델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문제가 단지 소비와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과 문명,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삶의 전환운동이라는 것, 분쟁과 갈등의 세계 안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단지 한 민족에게 국한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외세의 개입, 그로 인한 지역적 긴장 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이 될 수 있다.
3. 사상가이자 수행자로서의 삶 법륜스님은 인도에서 국제 워크캠프를 열고 태국 국경지역의 미얀마 난민을 구호하는 일, 몽골 한파 지역의 긴급구호, 이디오피아 가뭄 피해 자원활동 등,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는 많은 일을 펼치고 있다. 인류는 디지털세상과 인간복제로까지 나아가는 21세기의 과학문명과 여전히 상존하는 계급, 계층, 문화, 종교, 성의 갈등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얽혀있다. 법륜스님은 인류가 타인의 불행 위에 행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일구는 생명운동과 문명의 전환운동을 펼치고 실천한다. 법륜스님은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실현해가는 평화운동가로서, 인류의 문명전환을 실현해가는 전지구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사상가로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활동가로서, 깨어있는 수행자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간만에 계란을 삶아 샐러드에 넣었는데, 읔 속이 너무 비리다 흐엉 괴로워. 채식 제과류 외에 유제품이 들어간 제과류도 먹기에 유제품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싫었다. 채식을 지향하지만 이따금 육류제품이 먹고싶을 때가 있다. 해물은 불편한 마음 없이 먹는다. 몇 주 전에는 난데없이 닭튀김이 먹고싶어 닭튀김을 직접 구입해서 먹었다. 몇 년만의 닭 .. 먹으면서 정신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이상했다. 내가 닭이 갑자기 왜 먹고싶은지, 닭이라는 것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살아있는 닭의 모습이 머릿 속으로 그려지면서, 이걸 먹고있다고 생각하니 으엑 이상했다. 생각만큼 비리지 않아 놀라웠고 채식을 하다가 고기를 먹고 아픈 경우에 대해서 많이 읽었기에 아프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나쁘지 않은데 ? 라는 생각이 들어 의외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닭을 먹는다'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다.
치즈는 너무 맛있다. 채식을 해야지 마음먹고 치즈또한 콩으로 만든 제품들만 먹었는데 그 다양한 치즈들이 전시 된 마트에서 콩치즈만을 먹는 다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치즈를 먹는다. 그런데 얼추 일이년 정도 우유치즈를 먹지 않다가 먹어서인지 제법 오래 먹고있는데도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있다. 혹은 치즈가 문제가 아닌가. 우유 또한 섭취하지 않은지 몇 년. 빵에 들어있는 유제품은 먹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다. 더불어 몇 번 시리얼을 먹으며 우유를 먹기도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두유가 훨씬 익숙하고 맛있고 좋다. 우유는 비리다 으엑.
완전한 채식을 시도했고, 지금은 채식과 잡식의 중간에서 나만의 식습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거은 이전의 잡식으로 돌아 갈 수는 없다는 것. 이따금 원해서 육류제품들을 먹는 경우가 있는데 몸의 반응도 그러하고 논리적으로도 무언가 조화롭지 않고 이상하다는 반감이 든다. '고기를 먹어야한다'는 개념은 확실히 불합리하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 할 수 있다. 환경을 위해서라도 육식은 줄이는 것이 옳다. 곧이 채식도 아니고 잡식도 아닌 식성이 된 지금, 비논리적 위선적으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괜찮다. '채식을 해야해' 혹은 '채식 안 해' 라는 어떠한 강박관념 없이, 그저 '건강, 행복' 하리라.
The community has become one of the world's most important sites of Christian pilgrimage. Over 100,000 young people from around the world make pilgrimages to Taizé each year for prayer, Bible study, sharing, and communal work. Through the community's ecumenical outlook, they are encouraged to live in the spirit of kindness, simplicity and reconciliation.
Early years
The Taizé Community was founded by Frère Roger in 1940.[1] He pondered what it really meant to live a lif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began a quest for a different expression of the Christian life. A year after this decision Roger reflected, “‘The defeat of France awoke powerful sympathy. If a house could be found there, of the kind I had dreamed of, it would offer a possible way of assisting some of those most discouraged, those deprived of a livelihood; and it could become a place of silence and work.’” Because his Swiss homeland was neutral and thus less affected by the war, he felt as if France would be ideal for his vision. For Roger, France was a “land of poverty, a land of wartime suffering, but a land of inner freedom.” He eventually settled in Taizé, which was a small desolate village just north of Cluny, the birthplace of western monasticism.
In September 1940, Roger purchased a small house that would eventually become the home of the Taizé community. Only miles south of the separation line that divided a war-torn country in half, Roger’s home became a sanctuary to countless war refugees seeking shelter. On November 11, 1942, the Gestapo occupied Roger’s house while he was in Switzerland collecting funds to aid in his refuge ministry. Roger was not able to return to his home in Taizé until the autumn of 1944, when France was liberated.
In 1941, Roger had published a few small brochures outlining several facets of a Christ-centred communal life together. These brochures prompted two young men to apply, soon followed by a third. They all lived in Switzerland in a flat owned by Roger’s family until after the war when they began a new life together in the French countryside. Over the next few years several other men would join the community. On Easter day 1949, seven brothers committed themselves[2] to a life following Christ in simplicity, celibacy and community.[3]
[edit]Growth of the community and current situation
Brother Roger, founder of the Taizé Community, shown at prayer in 2003
In the years that followed, others joined. In 1969 a young Belgian doctor became the first Catholic brother to pledge his life to the community in Taizé. More brothers from Reformed, Anglican and Roman Catholic backgrounds joined the community. Soon the Brothers of Taizé were making trips to take aid to people in both rural and urban areas.[4] They began forming “fraternities” of brothers in other cities that sought to be “signs of the presence of Christ among men, and bearers of joy”. Since 1951, the brothers have lived, for longer or shorter periods, in small fraternities among the poor in India (chiefly Calcutta), Bangladesh, the Philippines, Algeria, Brazil, Kenya, Senegal, and the USA (Hell’s Kitchen in Manhattan, New York City).
At the age of 90, Brother Roger was murdered in 2005 in a knife attack by a mentally ill woman.[5] Brother Roger's funeral was attended by several dignitaries including the president of Germany and numerous religious leaders. The presider at his funeral was a Catholic cardinal, Walter Kasper. The funeral was attended by approximately 10,000 people.[6][7]
At the end of 2010, the community was composed of about one hundred brothers, from Protestant and Catholic traditions[8], who originate from about thirty countries across the world.[9] The community is currently led by Brother Alois, a German-born Catholic, who had been appointed by Brother Roger before his death on August 16, 2005.
In the 1960s young people began to visit the Taizé community. The first international young adults meeting was organized in Taizé in 1966 with 1400 participants from 30 countries.[citation needed]
The village church of Taizé, which had been used for the community's prayers, became too small to accommodate the pilgrims.[citation needed] A new church, the Church of Reconciliation, was built in the early 1960s with the help of volunteers, and expanded several times in the subsequent decades, first with tents, and then with simple wooden annexes.
In 1970, in response to student protests taking place all over Europe and the world, as well as the Second Vatican Council, Brother Roger announced a "Council of Youth",[10] whose main meeting took place in 1974.
At the end of the 1970s, the meetings and surrounding activities began to be referred to[who?] as a "Pilgrimage of Trust on Earth". The community decided to focus on youth.[citation needed]
Young adult meetings word wide: Pilgrimage of Trust on Earth
The Taizé Community attempts to send pilgrims back from youth meetings to their local churches, to their parishes, groups or communities, to undertake, with many others, a “Pilgrimage of Trust on Earth.”[15] Every year around New Year (usually from 28 December to 1 January), a meeting in a large European city attracts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young adults.[citation needed] It is organized by brothers of the Taizé Community, sisters of St. Andrew, and young volunteers from all over Europe, and from the host city.
The participants stay with local families or in very simple group accommodations. In the morning, they take part in a program organized by the parish closest to their accommodation. For their midday meal, all participants travel to a central location, usually the local exposition halls. The meal is followed by a common prayer, and the afternoon is spent in workshops covering faith, art, politics and social topics. In the evening, everyone meets again for the evening meal and an evening prayer.
In his "Unfinished Letter",[16] published after his death, Brother Roger is quoted to have proposed to "widen" the "Pilgrimage of Trust" originating from the Taizé community. As a result, international meetings for young adults have begun to take place, beginning with Kolkata in 2006. The program closely resembles the European meetings, though some aspects, such as the songs, are often adapted to the local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