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esters in Alexandria

올 해 초 1월의 이집트 혁명을 기억하는가? 아 그 희열을 기억하는가. 사실상 이번 혁명 이전까지만해도 이집트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세계를 집중시켰고 한 나라의 정권을 그야말로 뒤집었다.
하지만 모든 이슈가 그러하듯 관심은 불같이 타오르고 쉽게 사그라든다. 나 또한 한동안 이집트의 모습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 다시 읽게되는 이집트의 기사들은 당시의 희열과 그들이 겪을 어려움에 대한 상당한 아쉬움을 일으킨다.


Hosni Mubarak 2009

2월 Hosni Mubarak 의 정권이 내려오고 정권은 Supreme Council of the Armed Forces 로 넘어갔다. 그렇게 나라는 6개월 후의 선거까지 military junta 에게 넘어갔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시위는 계속된다.


2011 2 8 혁명자체와 시위들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였던 Tahirir Square

카이로 Cairo 의 시위는 이 후 시민들의 자발적인 청소 "Friday of cleaning" 와 같은 선도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wikipedia 에 상당히 유용한 테이블이 있다 -
시위의 요구와 그것의 수용 및 상황 Status

Demand Status Date
1. Resignation of President Mohammed Hosni Mubarak. Met. 11 February 2011
2. Canceling the State of Emergency (colloquially referred to as "The Emergency Law"). Announced.[201] TBA
3. Dismantling the State Security Investigations Service. Met.[202] 15 March 2011
4. Announcement by (Vice-President) Omar Suleiman that he will not run in the next presidential elections. Met.[203] 3 February 2011
5. Dissolving the Parliament. Met. 13 February 2011
6. Release of all prisoners taken since 25 January. Ongoing 20 February 2011
7. Ending of the recently imposed curfew. Met.[204] 15 June 2011
8. Removing the SSI-controlled university-police. Met. 3 March 2011
9. Investigation of officials responsible for violence against protesters. Ongoing 28 February 2011
10. Firing Minister of Information Anas el-Fiqqi and stopping government owned media propaganda. Met; minister fired, ministry canceled, propaganda still ongoing[citation needed] 12 February 2011
11. Reimbursing shop owners for losses during the curfew Announced. 7 February 2011
12. Announcing the demands above on government television and radio Met.[citation needed] 11–18 February 2011
13. Dissolving the NDP. Met. 16 April 2011
14. Arrest, Interrogation and Trial of (now-former) president Hosni Mubarak and his two sons: Gamal Mubarak and Alaa Mubarak. Met; All ordered to stand trial. 24 May 2011



이후 Mubarak 을 포함한 당시 정권의 인물들은 수 차례의 재판 등 법적 심문을 받는다. Mubarak 의 order 는
On 24 May, former Egyptian President Mubarak was ordered to stand trial on charges of premeditated murder of peaceful protestors during the 2011 Egyptian revolution and, if convicted, could face the death penalty. The full list of charges released by the public prosecutor was "intentional murder, attempted killing of some demonstrators...misuse of influence and deliberately wasting public funds and unlawfully making private financial gains and profits."

오늘까지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수천, 수만 명의 시위인구가 꾸준히 Supreme Council of Armed Forces 의 혁명 후 조치의 느린 속도와 방향을 규탄하고있다. 더불어 military 군력이 이대로 이집트의 정권을 지속적으로 갖게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개인적으로 중동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상 이집트는 하나의 prototype 이기도하고, 이집트 뿐 아닌, 상당 수의 나라와 정권들이 현재 시위와 혁명, 전화점 등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안전과 안정을 바라며 - 그들의 용기와 에너지에 감탄을 보낸다.



http://en.wikipedia.org/wiki/2011_Egyptian_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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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움직임이 이렇게도 빠르게 크게 momentum - 속도와 움직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작은 Canadian 캐나다의 activist 단체인 Adbusters 로 인해 시작되었다. 2011 9 17 뉴욕의 Zuccotti Park - 뉴욕의 Wall Street Financial district 의 모임이 첫 시위였다. 시위 목적은 사회와 경제적 불균형, 낮은 취업률, 욕심과 부패, 대기업 corporations 들의 부정적 사회영향 - 특히나 financial services 금융업과 government 정부에 대한 불만과 반감표현이었다.

Poster depicting a female ballerina pirouetting on the back of the Charging Bull statue on Wall Street; on the street behind her, a line of gas-masked rioters struggle through smoke. Text on the poster reads: "What is our one demand? #OCCUPYWALLSTREET September 17th. Bring Tent."


시위자들의 slogal 문구는 We are the 99% 이었다. 이것은 자라나는 경제적 영향의 불균형 - 미국의 부유한 1% 층과 나머지를 의미하는 것.
이후로 이 시위는 영국의 British student protests of 2010, 그리스 Greece 와 스페인 Spain 의 anti-austerity protest of the 'indignados' (indignants), 그리고 중동의 Arab Spring protests 들을 prototype 견본으로 삼았다. 이 후로 Occupy Wall Street (OWS) 운동 - 이와같은 leaderless 주도자 없는 운동들이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시위자 인구에는 liberals, political independents, anarchists, socialists, liberatarians, environmentalist 등 다양한 의견의 복합적인 모임이다.

 "A few weeks ago, the Alliance for Global Justice, a Washington-based nonprofit, agreed to sponsor Occupy Wall Street and lend it its tax-exempt status, so donors could write off contributions. That means the Alliance for Global Justice's board has final say on spending, though it says it's not involved in decisions and will only step in if the protesters want to spend money on something that might violate their tax-exempt status."[

규모가 커진만큼 금전적 투자도 들어오는 상황.

내가 생활하는 Seattle 에서만해도 Occupy Seattle 이라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오큐파이의 특징이라면 Camping. 텐트를 치고 한 지역이서 몇 주 씩 생활한다. 몇 주 전에는 Downtown Seattle 에 있는 protesters 시위자들을 체포하겠다고 Seattle 의 시장이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다. 그 날 밤 모두를 체포하겠다고 시장은 선포하였던 어느 날 - 나와 친구는 Downtown Seattle의 지역으로 구경을 갔다. 경찰들이 오십여명, 시위자들 또한 오십여명 구경꾼들 오십여명 정도의 인구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모여있었다. 하지만 그 날 밤 체포는 일어나지 않았고 시위자들은 환호했다. 
이 후로도 시위자들은 계속 camping 을 지속했고, Downtown 뿐 아니라 Capitol Hill 에 들렸던 적에도 그들의 캠프와 텐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여 인구가 높고 꾸준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응하는 방법들은 주마다 법이 다르고, 시마다, 시장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와중 관심을 많이 받는 주제는 use of pepper spray. pepper spray 의 사용이 unconstitutional 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이것을 사용한다. 이렇게 인권 문제와도 연관이 많이 지어졌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Naomi Klein 이라는 사회운동가 또한 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This is a young movement still in the process of determining just how powerful it is, and that power will determine what demands are possible. Small movements have to settle for small reforms: big ones have the freedom to dream."

규모가 커지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도 이에대해 의견을 언급했다는 것.
The Korean Central News Agency of North Korea commented that the Occupy Wall Street movement were "in protest against exploitation and oppression by capital, shaking all fabrics of society."

Raised FistOccupy Wall Street 공식 홈페이지 http://occupywallst.org/

뉴스 및 생중계, 채팅방, 시위 방법 제시, 시위 지역 분포도, 기부 정보 및 상당히 유용한 정보 및 활용 할 수 있는 자료들 종합되어있다. 시위이니만큼 법적인 자료, 경찰, 캠핑, 등에 대한 자료도 정리되어있다. 결과적으로 impressive 제법 유용한 웹사이트.

트위터 #Occupy #OWS #OccupySeattle 등 검색 또한 많은 실시간 자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Occupy movement 가 정부나 기업들에 얼만큼의 영향을 미치는가는 의문스럽다. 눈은 깜짝 하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리 소리질러도 들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포기 할 수 없으니 외치는 것이겠지.

이에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Occupy Seoul 에 대한 아쉬움. 근래 한국 정치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이 늘었다고도하고 나는 꼼수다 또한 큰 움직임을 형성하는 것 같다. 물론 촛불 시위에서도 보여주었 듯이 시위와 정부의 움직임에 무관심하지만은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하지만 Occupy 라는 세계적인 움직임이 Seoul 서울에서 일어나는 규모는 크지 않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요소일 것이다. 나꼼수와 같은 domestic 국내적인 움직임이 occupy 와 같은 international 국제적인 움직임보다 한국인의 관심과 호감을 훨씬 산다는 것. 물론 Occupy 와 비슷한 반감을 우리나라에서도 느낄 것이고, 대한민국 정부 외에도 세계적인 감정을 느끼는 인구가 분명 있을 것이지만 국내적 정치적 움직임과 운동에 관심이 많다는 것.
대한민국은 외국의 문화를 좋아하면서도 고유의 것에 집착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아무튼 한국의 정치적 움직임들 또한 - 대선이 가까운만큼 흥미롭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67


자료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Occupy_Wall_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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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친구가 Hanford Site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어 찾아보았다. 본 지역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부로써 당시 프로젝트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써 상당한 radioactive 오염 물질들이 - 간단히 지하에 묻혀있다. 2차 대전과 냉전의 마무리와 함께 방치되었던 물질들은 비교적 최근에 들어 환경 운동가들의 움직임으로 청소작업에 들어가 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도 볼 수 있듯이 - 아직까지도 우리는 방사능의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상당 부분의 선택들과 정책들은 추측에 기반한다. 현재로써 Hanford Site 의 청소작업은 갈 길이 한참 멀고 작업의 안전성 또한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굉장한 프로젝트가 -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나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끼는 바이다. 어메이징 !

Hanford Site
also known as Hanford Works, Hanford Engineer Works, Hanford Nuclear Reservation, Hanford Project.
1943 Manhattan Project 의 일부로 설립
중남부 워싱턴 주에 위치
최초 full-scale plutonium production reactor 가 있던 곳
본 위치에서 제작된 플루토니엄으로 최초 원자폭탄이 제작되었고 Trinity Site 에서 폭탄이 시험되졌다.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이 시험됨.
냉전당시 프로젝트는 9개의 원자 reactor 와 5개의 큰 플루토니엄 processing complex 로 확장되었음. 본 위치에서 미국의 60,000 원자 arsenal 의 대부분 플루토니엄이 생산되었음.
Hanford Site - Rhode Island 의 1/3 크기 정도로 1,518 km2
현재 대중에게는 열려있지 않음. 사막의 기후에 가까움. Columbia 강이 지역의 북 동쪽을 따라 흐름.


1960 년 당시 Hanford Site의 모습 - 상당한 규모 ........ 관광 (투어) 이 가능하다고 하니 언제 가 봐야겠다.

Manhattan Project 당시 - 1942년 9월, Army Corps of Engineers 는 본 지역을 넓고, 외각진, 인근 1000명 인구의 도시가 없는, 깨끗하고 충분한 수력 자원, 큰 전력 자원, 무거움을 지탱 할 수 있는 지형 - 을 고려하여 본 위치를 선택.
1942년 3월 Hanford Engineer Works 의 설립이 시작되었고 근 50,000 명의 노동자들이 공사지역에 생활하면서 건축을 진행하였음.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Hanford Engineer Works 는 Hanford 에 554개의 건물과 3개의 원자력 reactor 와 3개의 플루토니엄 processing canyons 를 지음. Radioactive waste 를 받기위해 'tank farms' 탱크 농장들 - 64개의 홑겹 지하 처리 탱크 - 를 설립.
Manhattan Project 당시 상당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연구와 발견들을 하였음. 당시 누구도 산업 스케일의 원자력 reactor 를 지은 경험도 없었고 - 과학자들 또한 얼만큼의 열과 에너지가 생성 될지 알 수 없었다. 안전을 유지하면서 최대의 연구를 얻으려 하였음.
엔지니어들의 난재 중 - radioactive contamination 원자력 오염을 어떻게 처리 할 지가 강권이었음. 기계들이 radioactive 되어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없을까 또한 문제였음. 따라서 원격으로 조정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 또한 목적이였음.
1946년 9월 - General Electric (GE) 가 Hanford Works 의 management 를 받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 원자무기 프로그렘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들을 만듬. 1947년 8월 Hanford Works 를 새로운 무기들과 reactors 와 연구를 위한 자금 계획을 발표 - 이로써 Hanford 는 새로운 번창의 시대를 맞음.
1963년 - Hanford Site 는 9개의 nuclear reactor 를 Columbia River 에 따라 건설, 5 processing plants, 900개 이상의 건물, 과 radiological 연구소를 설치함. 추가적인 건설과 수정이 본래 2차 세계대전 reactor 들에게 실행 되고 177개의 지하 waste tank 가 만들어짐. 1956 에서 1965 년 사이에 가장 많은 건설과 제작이 있었음. 총 40년 이상의 진행 동안 - 본 지역은 63개 정도의 short tons (57 t) 의 플루토니엄을 만들었고 - 미국 arsenal 의 60,000 의 무기의 대부분 플루토니엄 필요량을 충족하였다.
대부분의 reactor 들은 1964과 1971년 사이에 닫았다. 가장 최근까지 작동한 reactor 는 1987년에 닫았음.
현재 지역은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을 허용하고 있음.
1988년 6월 - Hanford Site 는 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National Priorities List에 올랐다. 1989년 5월 Washington Department of Ecology와 the federal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와 Department of Energy 는 Tri-Party Agreement 에 들어갔으며 - 그것은 Hanford의 환경적 치유의 법적 틀을 제공하였다. 본 사들은 세계의 가장 큰 환경 관리 사들이며 -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법적, 그리고 문화적 관심과 문제들을 상대하고 있다. 청소작업은 3가지 결과에 집중하고 있다 : Columbia River 의 복구, 장기 쓰레기 처리장 / 보유장으로써의 개선,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 현재 정부는 매 년 $2 billion 정도 Hanford project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 11,000 명의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청소와, 쓰레기 처리, 오염된 건물, 과 오염된 토양을 관리하고 있다. 본래에 30년 내에 완료되기로 한 청소는 2008년 반을 채우지 못하였다.
1970년 대에 radioactive material 의 생산음 멈추었지만 Hanford Site 의 상당부분은 심히 오염되어있다. 대부분의 지역은 위험히 오염되었으며 - 오염된 지하수가 Columbia River 에 끼칠 영향이 상당히 우려되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 또한 우려된다.
현재 지하에 묻어진 177 개의 지하 쓰레기 탱크들은 토양과 물로 세고 있으며 - 2008 년 이후 대부분의 오염물질들은 두겹의 탱크들로 옮겨졌으나 10,600 m3 의 액체 오염 쓰레기와 100,000 m3 소금 오염 쓰레기는 홑 겹 탱크에 남아있다.


자료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Hanford_Site
Hanford Site 공식 정부 웹사이트 http://www.hanford.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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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타임즈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포스팅을한다. 제약회사들과 바이오 기업들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래 본 회사들이 무럭무럭 성장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제약 단지들이 생겨날 정도로 industry의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 우리나라 회사들의 성장 보니 흥미로운 것이 국내에서 상당히 성장하고 있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약하다는 것. 약이라는 것이 신약 하나면 회사의 스케일이 천차만별로 바뀌니 예측하기도 어렵고 투자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회사들이 그러한 '한 방'을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break through 는 언제 쯤 어떤 약으로 나올지는 모르겠다.
기사 마지막에 가까이 정부를 언뜻 언급하였는데 상당한 understatement 이다. "기업과 정부가 함께 나서 국가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양상" 이라고 서술되어있다. 의약업체가 아닌 기업들은 오히려 이러한 정부의 의약에 대한 투자를 불만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 어쩌면 우리나라 제약회사들의 성장의 대부분 기여한 것은 정부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10-20 여년 동안 제약회사와 제약업체들에게 정부는 상당히 관대하였으며 그들의 성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제약회사들이 보다 큰 성장을 하고 국제적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나라 정부의 도움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제야말로 과학적 기술적인 싸움이 필요한 때이다. 홍보나 accessibility 따위로 더 이상의 성장은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는 이제 과학에 투자해야하지 않는가. 이제는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미 순서가 바뀐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늦기도 한참 늦었다. 하지만 지금에라도 정부는 로비가 투철한 약사단체나 제약회사가 아닌 순수와 실용과학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덩치싸움 벌이는 세계 바이오 회사들
암젠의 연간 매출액, 한국 전체 매출액과 맞먹어

2011년 07월 29일(금) 사이언스타임즈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발표한 2010년 국내 의약품 생산실적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의약품 생산실적은 15조7천98억 원으로 2009년에 비해 6.23% 늘어났다. 또 2010년 국내 의약품 시장규모(생산+수입-수출)도 19조 1천437억 원으로 2009년 대비 5.1%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시장규모가 커지면서 세계 의약품시장에 차지하는 점유율도 2009년 1.7%에서 2009년 1.9%로 높아졌다. 언뜻 생각하기에 좋은 실적이지만 식약청에서는 큰 걱정에 휩싸였다. 실적을 정밀 분석한 결과 향후 국내 제약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세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내 의약품, 특히 국내 원료 의약품 생산이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세계 시장은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바이오 회사들의 군웅할거 속에서 신약개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암젠… 출범 28년 만에 세계시장 평정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세계적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모니터(Datamonitor) 최근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바이오기업들의 현황을 분석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암젠(Amgen)은 2009년 바이오기업 중 가장 많은 144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이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5조1천600억 원이 넘는 규모다. 2010년 국내 의약품 생산실적 15조7천98억 원어치에 달하는 의약품을 한 회사에서 생산해 판매한 셈이다.

1983년 출범한 암젠은 1989년 빈혈치료제인 에포젠(Eopgen)을 시판하면서 세계 제약업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백혈구 감소증 치료제인 뉴포젠(Neupogen)을 출시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02년 암젠은 미국의 유명 바이오회사였던 이뮤넥스(Immunex)사를 인수해 류마티스 관절염에 적용하는 'anti-TNF alfa'와 퓨전 단백질 치료제인 엔브렐(Enbrel)의 완전한 소유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판매를 확대한 결과 2003~2009년 간 연평균 10.5% 매출이 신장했다.

2005년에는 앱제닉스(Abgenix)를 인수해 항암제 벡티빅스(Vectibix)의 소유권을 확보한 후 단일클론항체 시장에 진입했으으며, 지난해에는 프롤리아(Prolia)라는 차세대 제품을 시판해 단일클론항체 시장에서 15억8천만 달러(한화 약 1조 6천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프롤리아는 항암치료 시 발생하는 폐경기후 골다공증 및 골밀도 손실 치료제로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두 번째로 많은 매출을 기록한 바이오회사는 백스터 인터네셔널(Baxter International)로 2009년 약 64억 달러(한화 약 6조7천억원) 어치를 팔았다. 대표제품은 혈우병 치료제인 애드베이트(Advate)와 리콤비네이트(Recombinate). 이 두 개 제품의 2009년 판매액만 약 14억 달러(한화 약 1조4천억원)에 달한다.

알츠하이머 치료제인 '감마가드(Gammergard)'는 백스터가 향후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제품이다. 현재 임상 3상에 들어가 있는데, 제품이 시판될 경우 세계적으로 큰 선풍을 일으킬 전망이다.

신제품 생산으로 하루아침에 상황 역전

2009년 중 세 번째로 많은 매출을 올린 바이오회사는 바이오젠 아이덕(Biogen Idec)이다. 2009년 42억3천만 달러 어치를 팔았다. 이 회사는 독립된 바이오회사인 바이오젠과 아이덕이 합병한 회사로 중추신경계와 종양 시장 분야 질환치료제를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발성 경화증 치료제인 아보넥스(Avonex)와 크론씨 병 치료제인 단일클론항체 의약품 티이사브리(Tysabri)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미래 더 큰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네 번째로 매출을 많이 올린 회사는 젠자임(Genzyme)이다. 2010년 40억5천만달러(한화 약 4조2천억원) 어치를 팔았는데, 이 규모는 2009년과 비교해 1억5천만 달러가 감소한 것이다. 미국 올스톤과 매서츄세추에 있는 공장이 바이러스에 오염됐다는 기사로 인해 2008~2010년 중에 의약품 매출액이 급감했다.

제자임은 고셔병 치료제인 세레자임(Cerezyme), 파브리병 치료제인 파브라자임(Farazyme), 폼피병 치료제인 미오자임(Myozyme) 등으로 성공을 거둔 바이오 기업이다. 현재 지난 2008~2010년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유전자질환 분야 치료제를 개발 중에 있다.

현재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내일이 불투명할 정도로 새로운 신제품이 개발되고 있는 불투명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암젠, 백스터, 바이오젠, 젠자임 등 이들 기업들은 탄탄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의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기업과 정부가 함께 나서 국가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양상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신제품 개발로 하루아침에 상황이 뒤바뀌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식품의약안전청이 의약품 생산실적을 발표하면서 한국 제약산업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강봉 객원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1.07.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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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부터 병원에 다녀와 약을 약국에 가서 지어야하는 변화를 우리는 모두 겪었다. 그것이 2000년의 일이니 11년이 지난 오늘이다. 당시 의사들은 건강보험재정 고갈을 우려했으나 복지부는 반강제적으로 의약분업을 강행하였다. 의약분업에 대한 전반적 입장을 정리해보았다. 자료는 의사회에서 발표한 자료를 따른 것임으로 의견의 치우침이 있을 수 있음을 감수.


의약분업의 애초 목적

- 국민 의료비 감소
어떠한 논리였는지는 아직 미조사.

- 처방전에 대한 의약사 이중점검
사실상 가장 구차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념적으로는 의사의 처방을 약사가 점검함으로써 처방전의 안전과 유효성을 높힐 것이라는 주장인데 - 사실상 이러한 효과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시스템적인 결함이라기보다 문화적/관습적인 오류인지 싶다. 우리나라의 항생제 처방에 대해 이미 많은 말이 오갔다. 가벼운 감기에도 항생제를 처방하는 어이없는 일이 상당히 보편적인 습관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의약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올리겠으나 사실상 우리나라의 약처방 유효성을 공정 할 사람들이 약사들이라면 그들은 제 일을 제대로 하고있지 않다.

-약사의 전문화된 복약지도
딱히 약사라는 기술에 대해 특별함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처방전을 읽고 그것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복약지도' 약에 대해 보다 올바른 이해를 약사를 통해 환자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 사실상 이는 의사와 약사의 말을 모두 참고해야하는 환자로써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가 오히려 크다. 더불어 이는 약사에게 제한된 권리 혹은 권한이 아니다. 의사들은 복약지도를 할 의무마저 있음으로 동선의 복잡성이 유발된다.

- 의약품 유통구조 개선
정부는 의약품의 유통을 약사로 일원화 함으로써 유통구조를 개선 할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유통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이르고 있다. 당시 의사들은 조제내역서를 발급을 주장하였다 - 이는 의사의 처방이 올바르게 조제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였으나 이 의견은 무시당하였다. 약사의 조제기록을 정리한 시스템이 없는 지금 환자들의 약 복용내역이 정리된 데이터가 없는 현실이다. 이는 의학적으로 혼란을 부르며 치명적인 실수를 나을 수 있는 틈이다. 약사법에 약사가 의사에게 통보하에 의사의 처방을 대체조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 이러한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대체조제대 대해 통보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청구를 의사처방으로 한 것 처럼 하고 보다 저렴한 약으로 조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알려진 비밀이다. 어떠한 의약품의 경우 연간 총처방량이 총 생산량보다 많은 경우가 있으니 분명 오류가 있음에 분명하다.

- 암의조제 근절
약사들의 임의조제를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이였으나 지금도 약국에서는 환자에 대한 불법적 문진과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허무하게도 법적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려 - 일반약의 비중을 높히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며 약사들의 임의조제는 조장되고있다.

- 의약품 오남용방지 및 항생제 처방 감소
항생제 처방은 이미 알려진 문제이다. 이에 대응한다던 정부의 입장이였다. 하지만 의약분업이외에도 항생제 처방 감소의 정책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의사들의 입장이다.

- 환자의 알권리 증진


의약분업 후 문제점

- 국민 의료비 상승
정부의 애초 목적과 달리 의료비는 상승하였다.
2001년 건강보험 총 진료비 17조 8천억
2009년 건강보험 총 진료비 39조 3천억
121% 상승

건강보험료 월평균
(직장가입자 경우)
2000년 7688원
2009년 27049원
251.8% 상승

(지역가입자 경우)
2000년 10965원
2009년 28652원
161.3% 상승

국민의료비 상승에는 만성질환자, 노인의료비 증가 - 혹은 물가 상승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테지만 의약분업의 제도적 변화또한 기여하였음.

- 의약품비 상승
의약분업 이전 , 의약품을 직접 구매하여 처방조제하던 의료기관은 더 이상 저렴한 의약품을 처방 하지 않게된다. 약에 대한 안정성이 담보된 약의 처방이 증가 할 수록 약제비는 상승. 저가약 처방유도를 위한 정책이 없는 부작용.
더불어 복제약의 경우 가격이 오리지널에 비하여 20-40% 수준인데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60-80% 까지 복제약 가격을 산정해주는 정부의 약가정책은 복제약의 애초 목적을 희석하고 국민의 부담을 얹음.

- 유래없는 법안들의 탄생
재정고갈이 이어짐에 따라 법안들이 논의 및 시행되고 있음. 예를들어 처방전 2매 발행, 리베이트 쌍벌제.


이득을 보는 것은 의약업체, 약사

이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약사와 제약회사. 제약회사는 복제약가를 오리지널 대비 60-80%까지 받음으로써 상당한 성장을 이룸. 우리나라 대표적인 제약회사들은 로비로 인한 정부의 높은 값 산정으로 이득. 이러한 높은 값의 약과 정부 결정된 상당한 조제료 수익으로 약국은 처방전이 많이 나오는 병원가에 위치함으로써 실력과는 무관한 이득을 봄. 더불어 정부가 묵언하며 넘어가는 임의조제 그리고 대체조제 인센티브로써 이득.

출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679756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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