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歸農] <명사> 다른 일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려고 돌아감. <반의어> 이농(離農). 귀농-하다 <자동사><여불규칙활용>


귀농 - 생각해보면 기이한 단어이다. 때로 사람들은 '귀농'이라며 도시생활을 등지고 농사짓는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왜 이 것을 '귀농'이라 하는가. 이는 분명 농사로써의 삶을 선택하는 것 아닌가. 애당초 농사와 관련이 없고 시골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도, 마치 그곳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굳이 농사를 시작하는 일을 '귀농'이라 부른다. 물론 인류는 자본사회 이전의 농민사회로 시작하여, 본디 우리의 대부분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보다 포괄적인 관점 -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 '인구'가 이러한 생활방식으로 돌아간다면 '귀농'이라는 의미는 적합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단위에서 마저 이 특정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귀농'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의미가 왜곡되는 일에는 이유가 있을 것임에 - 그것이 궁금 할 뿐.

시골이나 농사의 삶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왜 그것에 대해 있지도 않았던 소속감을 느끼는가. 이는 현대사회에 대한 반감에서 나오는 것이라 추측한다. 본디 자신의 근본, 유래가 현대생활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 자신의 origin 근원은, 사실과 무관터라도 농민사회에 있다고 느끼는 것. 이러한 현대적 사회에 대한 정서적 불만족은, 정서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 때문이리라. 사회적 의식이 채 변화하지 않음에도, 현재 시대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관히 빠르게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의식 중 혹은 무의식 중에, 이와 동의치 못하고, 본인의, 사회의 본질은 시골 - 농민사회에 있다고 여긴다.

굳이 '귀농'이라는 단어가, 보다 포괄적인 범위로 사용된다고 하여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와중 소외되는 단어가 있자면 '농사'이다. '귀농'이 주는 어감과 '농사'가 주는 어감은 다르다. '귀농'은 현대사회를 뒤로하고, 평안과 소소함을 향해 다가가는 현대인의 의식적인 선택 따위의 연상적 의미가 있다. 반면 '농사'에는 지긋히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 혹은 그곳 이외의 것을 접해보지 못 한 이들의 객리적인 연상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연상을 할 지는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나만의 해석이지만 나의 의식의 보편성을 믿어본다. 이렇게 분명 '농사'로 불려져야 할 행위들이 '귀농'이라는 와전으로, 괜한 로망따위를 연관시킨다.

농사와 귀농, 다를 것 없지만 분명 다른 두 의미, 그리고 그보다 다른 둘에 대한 인식이, 바른 기준을 따랐으면 싶다. 사람들의 '인상'에 대한 얄팍한 자존심에, 단어의, 행위의 의미가 와전되고 비하되는 행위는 참으로 덕되지 못하다.


'농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농사
갈아 농작물을 심어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일. ~를 짓다. <동의어> 농공(農功).농사 물정 안다니까 피는 나락 홱 뺀다 남의 아첨하는 말이나 비꼬는 말을 제대로


농공
은 또 왠말인지 - 나는 모르겠다. 이는 다음 기회에 연구해 보아야겠, 다 -





자료 http://kr.dic.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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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0630시 즈음 깨어 방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카페. 일부러 뉴스를 피하고있다 - 사진도 비디오도, 기사도 읽지 않으려 하지만 조금씩 보게되는게 궁금증인지, 호기심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가슴이, 어깨가 무겁고, 코 끝은 찡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속이 먹먹해서 답답하다. 나의 마음은 이러한데, 정작 본인들의 심정이 어떠 할 지 상상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햇빛은 국경을, 인종을, 종교를, 지위를 모른다. 그것은 차별없이 모든 이에게 내리고 -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모든 이의 햇 빛을 가린다. 햇빛 아래, 땅 위에, 우리는 그저 사람일 뿐. 일본이 중심적으로 타격이 크고 이슈화되고 있지만, 시작은 중국이였고, 하와이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으며, 알라스카를 포함한 서부 미지역은 모두 주위 대상이다. 그의 정도가 심하건 약하건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나인지를 자연은 상기시켜준다. 환상적인 날씨에 그저 행복하고, 지각의 역동적 움직임에 목이 턱 막히고 눈물이 난다.
국가 단위를 넘어, 인류라는 단위를 넘어, 우리는 자연이라는 공동체이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이고 그것을 저항 할 수 없다. 자연에게 사람이 준 아픔도, 자연은 저항하지 않았다. 우리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다.
무섭다며 여러 일본의 비디오 링크와, 마음을 안정하라며 동물들의 사진을 담은 이메일이 왔다. 비디오들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 링크만 보아도 코가 시려, 링크를 눌렀지만 일어를 듣는 순간 창을 닫아버렸다. 사진으로 부엉이의 털 깃이 손 끝에서 느껴지는 듯 하다. 녀석처럼 고개를 숙여야겠다는 숙연한 생각이 든다.
우주를 향해 마음을 전해본다, 안녕을, 괜찮음을, 사람을, 사랑을, 우리를, 공존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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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lovepotion9.tumblr.com/


일본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많은 동물들은 자연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이동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지능적이라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지, 자연 앞에서 인류는 나약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괴로울지 상상가지 않지만, 나 또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지구의 반대편이지만, 그들의 두려움이 전해지는 것인지, 나 또한 괴롭습니다 - 비교 할 수 없겠지만요.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머니, 흙에 덮힌 자식을 안은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감히 글로 서술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죄송합니다.
인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해 마다 오는 자연재해, 영향을 받는 것은 특정한 나라가 아닌, 지구의 모든 생명체 - 그 가운데 인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지구에 공존하는 인류입니다. 나의 가족 친구, 모두들 나의 가족이건데, 그들의 아픔이 괴롭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잠시나마 묵념의 시간을 갖습니다. 인류, 그들은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을 위하여, 특정한 하느님이 아닌, 우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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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ucks의 고장 Seattle. Starbucks가 올 해로 40주년을 만났다. 처음 태어난 Starbucks는 지금과 많이 다르다. 스타벅스의 '진화'를 지켜보며, 스타벅스의 정체는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커피체인. 50개 국가에 17,000에 가까운 지점. 유난히 Seattle에서는 고개 돌면 있는게 스타벅스다. 열 걸음 내외로도 있다. 커피, 뜨거운 음료, 차가운 음료, 샌드위치, 물, 제과류, 견과류, 과일류, 샐러드, 요구르트, 커피콩, 보온병, 도시락 통, 물통, 따위를 판매하며 지점마다 무료 wifi 제공. 지점마다 틀어져 있는 Starbucks 티비의 채널은 현재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소개하기도하고, Starbucks에 관한 정보가 올라오기도한다. Starbucks 본 지점 뿐 아니라 마켓 등에서 Starbucks 커피,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구입 할 수 있다. 

시작은 Seattle 의 유명한 Pike Place Market 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1971년  첫 지점은 2000 Western Avenue 에 있었으나, 1912년 Pike Place 로 이동하였다. 오늘도 Pike Place 의 Starbucks 는 1호점이라는 이름으로 굉장히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있다. Starbucks 의 본사는 오늘도 Seattle에 위치.



기이한 스타벅스의 진화는 그들의 로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번 40주년을 맞아, 스타벅스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로고의 변화과정이다.




아래 A의 그림은 스ㅏ벅스에서 사용된 상징이다. 15세기의 Two-tailed siren.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카페를 처음 연 것은 3명의 영어 선생. 그들은 커피와 커피 기계 등을 판매. 영어선생이였던 만큼 Starbucks의 시작은 소소한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Starbucks라는 이름은 소설 Moby-Dick 중 인물의 이름이다. 소설 속 Starbucks 는 마르고, 최소한을 고집하는 인물이였다. 그는 말의 수가 적었고 행동으로 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는 극 중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고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치 않은 상황에 자신을 던지지 않았다.
이렇게 창업의 시작은 넘치지 않는 필수적인 이미지이었다. 반면에 그들을 상징하는 로고는, 이 점을 강조하듯이 섬세하다. 그들의 로고 가운데의 이미지는 Two-tailed siren 이다. Siren 은 그리스 전설에서 가장 위험하고 매혹적으로 표현되는, 반 여자, 반 새 인 개체들이다. 그들은 섬에서 바위와 절벽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생활한다. 그들은 어부들과 해인들을 유혹하고 험한 바다로 부른다. 위의 개체가 Starbucks 의 로고가 되기까지는 Starbucks 와 Il Giornale 와의 만남을 이야기해야한다.



위 사진은 Il Giornale, Starbucks 의 투자가 - Starbucks의 자본화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첫 로고를 자세히 보면, 그림은 상의를 입지 않고 나체의 상반신을 하고있다. 보다 익숙하고 대중적인 로고로, Il Giornale 의 초록 동그라미와 Starbucks 가 만나, 새로운 로고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Starbucks 의 로고변화는 큰 상징성을 띈다. 처음 그들의 상업성을 띄면서도 변화되었고, 점점 변하여 오늘의 로고가 만들어진다. 오늘의 로고는 보다 간단해진 모습이다. Starbucks의 한 고객이 "Someday they'll have a green circle for it."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언젠간 초록 동그라미가 되어버릴거야." 점점 단순화되는 로고는 어떠한 상징성을 띄는가 - Starbucks는 이번 40주년을 맞아 텔레비전 광고 또한 시작하였다. 그들은 "Here's to you"라는 슬로건을 걸고, '개인의 입맛에 맞추어진 커피'라는 아이디어를 팔고있다.

그들의 커피를 개인적으로 만드는 것은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자 놀이에 가깝다. Dry double tall soy mocha cappuccino 라던가 Triple grande two and a half pump white chocolate 2% latte with light whip 따위의 '개인성'이 그러하다. 이 아이디어를 보다 강조하기도 하는 듯, Starbucks는 고객의 이름을 묻는 것을 보완한 듯 하다. 손님이 없는 와중 받는 주문은 주로 이름을 받지 않던 그들이, 지난 주 부터 모든 주문에 이름을 받기 시작하였다.

로고는 단순해진 반면 메뉴는 복잡해져간다.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가 만들어진다. 연말에는 연말 스패셜 메뉴를 만들고, 최근은 40주년 Petite Pastries 작은 제과류, 라며 미니 컵케익, 이쑤시게에 꽂은 케익 따위를 제공한다. 나는 종종 Starbucks에 노트북을 끼고 앉아 시간을 때운다. 딱히 먹을만한 메뉴가 없어 거의 늘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앉아있는다. 와중 어제는 남는다며 미니 컵케익을 주더라 - 초코케익에 땅콩버터를 얹고, Recess peanut butter cup 반 조각을 꽂아놓았다. 딱히 역한 맛은 아니지만 별 맛은 없다. 초코 케익은 무슨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고, 오랜만에 먹은 땅콩버터의 향만 강하게 인상에 남는다. 오히려 작은 싸이즈가 평소의 제과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새로운 메뉴 중 가장 기이했던 것은 와인, 치즈, 맥주. Starbucks 의 본 고장인 Seattle인 만큼, 첫 시도도 Seattle 에서 되었다. 몇 매점만이 알코올 - 와인과 맥주 판매를 작년부터 시도하고있다. 시행 매점에 가 본 적은 없지만, 크게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큰 반응은 없는 것 같다.

복잡해지는 것은 메뉴 뿐 아닌 사이즈도 마찬가지이다. Starbucks는 기존의 short, tall, grande, venti 를 넘어 trenta 라는 사이즈를 만들었다. 이 또한 작년 쯤 시행된 듯하다. Trenta 는 916ml 그야말로 거대하다. 와인이 한 병이 들어가고도 남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도대체 커피를 그 만큼 마시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와인, 맥주, 치즈에 이어 어이없는 사이즈의 trenta까지 - 도대체 Starbucks는 본인들의 본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더불어, 그들의 비즈니스 철학 또한 의심할 만하다. 국제 대기업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올 해 쯤에서야 그들은 재활용에 노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compost 와 recycle, 둘로 나누어진 휴지통들을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분류는 큰 효과가 없다. 냅킨 음식물따위는 compost, 종이컵 플라스틱류는 recycle로 분류된다. 참으로 단순하지만, 휴지통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운지 많은 사람들은 재활용 옆에 배치된 일반 휴지통에 모든 것을 버리기 일쑤이다.

모든 메뉴를 종이 컵에 받는 것 또한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카페 내에서 커피를 마시어도, 주문시 요청하지 않으면 커피는 종이컵을 사용한다. 또한, 커피의 온도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종이컵을 두개씩 끼워 주기도한다. 누가 보아도 본 회사가 환경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Starbucks의 마케팅 전략 중 Starbucks (Red) 가 있다.

Every time you buy a (STARBUCKS)RED product or pay with your (STARBUCKS)RED Card*, we make a contribution to the Global Fund to help people living with HIV/AIDS in
Africa.
" (STARBUCKS)RED 제품을 구입하거나,  (STARBUCKS)RED 카드로 결제하는 경우, 본 회사는 Global Fund로 HIV/AIDS 를 가지고 아프리카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돕기위하여 기부를 합니다."
여기에 입력되지 않은 정보는 얼만큼의 금액이 기부되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부족한 검색 능력일지 몰라도 Starbucks 홈페이지에서 이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Starbucks 카드를 선물로 받아 소지하고 있다. 카드에는 기부 금액이 적혀있고, 그것은 5cent/purchase 이다. 5cent 라 치면, 40원 정도이다. 물론 기부는 좋은 의도이다. 하지만 왠만한 라떼의 값이 3-4 $ 임을 감안하면 5cents는 1% 정도에 미친다. 선의를 배푸는 모습은 좋지만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 않나싶다.

Starbucks - 그 시작은 영어선생님들이였고 철학이 있었다. 오늘날의 Starbucks는 그저 대기업, 자본, 현대사회, 마케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Starbucks의 맛 없는 커피를 열심히들 마시는 모습을 매일같이 바라보며, 나 또한 그 중 하나임을 기억하며, 우리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료/정보 출처
http://www.starbucks.com/responsibility/community/starbucks-red
http://en.wikipedia.org/wiki/Starbucks
unlimitedmagazine.com
http://www.shmoop.com/moby-dick/starbuck.html
http://www.examiner.com/starbucks-in-national/starbucks-101-what-is-the-story-behind-the-siren-logo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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