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감성과 논리 사이에서 어느 것이 옳다 - 할 수 있겠는가. 둘 중 옳은 것은 없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그러하듯 둘의 중점 - 균형이 중요 한 것. 하지만 어느 누가 둘의 완벽한 경계선을 걸을 수 있겠는가. 한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함이고 어느 쪽도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 나는 논리 쪽으로 기울고 싶다. 상황하에 내가 어떤 것에 비중을 두는 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능한 논리의 편에 서고 싶은 나이다.
그러더라 - 감정이란 본능적인 태초의 것이고, 논리란 사회적인 합의일 뿐이기에 감정에보다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논리의 손을 잡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맞다고 느끼기 때문. 사회적으로 합의 된 그 지점이 맞는 지점이라 나도 동의하고 싶은 마음. 클리셰는 지겹고 닳았고 보편적이며 식상하지만 -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그것을 선호하고 사용하는 빈도가 잦은 이유는 그것에 어느 정도 옳음이 알맞음이 - 끌림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오랜 시간동안 감정에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였고 그것에 몰두하여 생활하였다. 사실 나의 생 중 논리보다 감정에 치우치여 살은 시간이 해 수로 따시면 훨씬 길다. 어느 순간....... 이라기보다 언제인가부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 - 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의견들이 모여 사회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혼자라기보다 '사회의 구성원'이다 라는 느낌을 그 쯔음 받으며 - 나보다 큰 틀에서 생각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의 의견이 아닌 - 나의 밖의 의견 ,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나의 모습 ........ 나만이 나일 수 있음으로 내가 나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 라는 논리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 지금 선택에 만족스럽다. 상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려는, 머리로 생각하려는 모슴, 비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고 옳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개인적 취향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렴 어떠랴 - 언젠가 그르다고 느껴지면 흘러 흘러 진화하면 되는 것을 .......... 지금은 이러하며 모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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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은 생명체의 생물적 기능의 끝을 말한다. 숨과 심장의 운동이 멈추고 생물적인 움직임이 멈추는 것. 죽음의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으며 그의 정당성에 대한 의견들도 끊이지 않는다. 영적인 죽음 , 법적인 죽음 등 방면적으로 제각의 정의를 지니고 있다. 사후세계에 대한 의견도 다분.
죽음의 정의가 무엇이건 많은 - 아니 모든 것을 미화한다는 것은 사실인 듯 싶다. 대부분의 위인전을 읽자면 업적에 중심을 두는 경향이 이에 포함되지 않을까. 죽음은 풀리지 않았지만 마감되는 느낌. 어떠한 삶을 - 누구의 삶이라도 풀 수는 없을 것이다. 삶에 어찌 답이있을 수 있겠는가만 죽음이란 '어쩔 수 없는 마무리' - 본인을 그리고 모든이를 무능력케하는 독고적인 방법. 때로 죽고싶은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용서받지 못 할 일들도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 사라짐 소멸에는 그러한 기운이 있다.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 아쉬움이라는 안타까움으로 덮힐 수 있을까 싶어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것 - 가장 아름다울 때에 돌아서야 하는 논리...... 떠나가는 이의 모습에 어찌 더러움을 던질 수 있겠는가. 죽은이의 생은 삶이 아닌 전설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라는 개념 자체가 삶과는 다르게 목적과 맥락이 있다 - 이야기와 삶은 같게 그것을 나누는 이들 사이에 특정한 인상을 심는다. 현재 나의 어려움은 고통이지만 시간이 흐른 상처의 아무름은 배움이고 경험이된다. 아픔은 승화가되고 시간은 미화의 역할을 한다.
어쩌면 너와나의 - '우리'를 죽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글이 한 방향을 흐르려 하는데 - 아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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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 근래 듣고있는 10cm의 유난히 가사가 좋은 good night. 밤, 잠. .
현재 4/21 0243시, 이유있는 불면으로 밤을 샐 듯 싶다. 쏟아지는 기사들에 허무할 뿐이고, 느릿하던 카페도 놀란 사람들로 붐비어 서버 다운. . 그야말로 한도초과이다. 머릿 속에 우주를 넣어때 꺼낸 듯 한 두어시간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밤은 까맣고 조용하기만 하더라. 고개를  들어 세상을 똑바로 보라던, 잡 설들에 휘청이지 않도록 정신을 가다듬는다. 급 속도로 쏟아지는 글들이며 기사들, 수 만명이 소설을 쓰고 있다. 읽을 필요도 없을 뿐 더러, 부추겨서는 않되는 글들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는 인터넷의 공간. . 한 걸음 물러서서 시간이 가라앉힌 진실만을 읽으리. . 
솔직히 나는 비교적 냉소적으로, 덤덤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그의 나이 40이고,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함께 생활한다는 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당연한 일이고, 충격이라기엔 너무나 기쁠 일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니. . 정도 모르고 토해내는 루머들, 역겹다. 앞뒤도 맞지 않는 기사들에, 혼란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그 와중, 정치적 소식을 덮으려는 양치기소년 언론의 수작 플레이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간 국민들이 얼마나 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단 의심해야하는 언론의 보도들, 연예스캔들에 바로 정치기사로 눈이 간다는 사람들 - 다행인지 안타까워야하는지, 감정이 복합적이다. 물론 실속있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도 물론 많다. 어디나 옳음과 옳지 않음은 공존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한 단면만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지금 관심을 안고 있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언론을 이용하고 농락하는 더러운 기자들의 펜이다. 속이 상한다.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이더라도, 이러한 농락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추측인지, 거짓인지, 오해인지 알 수 없지만,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기자들은 기자의 자격이 없을 뿐 더러 인격의 저질이다.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어떠한 목적을 취하려는 이들의 속이, 싫다.
나의 벽에 붙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 그를 연예인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연예인 - 그를 어떠한 인물이나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의 음악과 공연, 사상들을 나에게 기운을 주는 에너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멜로디, 가사, 철학, 삶의 방식들 - 나에게 허용된 범위 내의 그의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하고, 무엇보다 큰 위로를 받았고 늘 그러하다. 나에게 소중한 덩어리, 그의 음악을 듣던 시간, 글을 읽던 시간, 위로 받았던 기억들, 감사하는 마음, 우리가 함께 모여 그라는 것을 공유 할 수 있도록 시발점이 되어준, 한 시대의 사상을 그려준, 나에게 동경을 알려준, 그 기운의 에너지의 덩어리가 부디 어디에서든 편안한 마음이였으면 좋겠다. 그 뿐이다, 그가 편안 할 수 있었으면. 그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듯, 나 또한 어떠한 에너지의 일부가되어 위로이고 싶다.
혼란의 폭풍이 지나고, 시간이 사실만을 정화하여 주었으면 바래본다, 느린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며.


10cm good night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고요하고도 거친 밤공기, 바람소리, 달빛에
너의 평화롭진 않았을 것 같은 어지럽고 탁한 긴긴 하루, 너의 새벽, 빈 창가

나쁜 기억에 아파하지 않았으면, 숱한 고민에 밤새우지 않았으면
Mmm good night

또 나쁜 꿈에 뒤척이지 않았으면, 빗물소리에 약한 생각 않았으면
팔베개, 입맞춤, 따뜻한 한 이불, 나긋한 숨소리, 이젠 함께 아니지만
눈물과 외로움, 슬픔과 괴로움, 하얗게 지운 듯 깊은 잠 예쁜 꿈속에
Mmm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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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오빠라 부르는 어머니...묶어놓았습니다
소녀가 된 어머니 보살피기... 외할머니, 저 잘하고 있는 걸까요
김수복 
11.04.19 
 

외할머니. 기다리던 휠체어가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살면서 휠체어를 만져본 적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이틀에 걸쳐 그 조작법을 읽혀야 했습니다. 목욕을 하는 중에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인 어머니이고 보니 저로서는 제가 아직 모르는 사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오전 날씨가 너무 좋아서 휠체어를 마당에 펴놓은 다음 어머니를 품에 안고 나왔습니다.

 저는 내심 "아따 꽃이 피었네, 좋다" 소리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봄이 오고 꽃도 피면 휠체어를 반드시 장만해야 겠다고 생각한 원래의 목적이 사실은 그런 탄성을 듣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니는 한 말씀도 없이 그냥 잠들어 버리시는군요. 아니 사실은 제가 품에 안는 순간에만 잠시 깨었을 뿐 어머니는 내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어머니는 일주일 중에 5일은 거의 하루 내내 주무시기만 합니다. 오줌을 누자고 이동식 변기에 앉히면 어머니는 거기서도 잠들어버립니다. 제가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졸다가 그대로 굴러떨어지곤 합니다. 목욕통 안에서도 졸다가 물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에 이부자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항상 곁에서 지켜봐야 하고, 잠시라도 자리를 떠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보자기 두 개를 어머니의 겨드랑이 사이로 끼워넣어서 의자라든가 변기라든가 그때그때 적당한 기둥에 묶어놓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 자신이 무슨 고문기술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암담해져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 묶어놓는 것 이상의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중에 이틀 정도는 또 거의 잠을 안 자고 놀자고만 하십니다. 제가 잠이 쏟아져서 이제 그만 자자고 하면 눈을 '오꿈하게' 치켜뜨면서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놀다가 자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강제로 품에 안아서 이부자리로 옮길라치면 새처럼 가녀리게 우는 목소리로 "으째 그러셔요, 으째 그러셔요" 하시는데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쏟아져서 어쩔 줄 몰라하게 됩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5천 배는 더 즐거워진다"

 외할머니. 오래 전부터 삶이 아득할 때면 들려오는 외할머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알면 삶이 5천 배는 더 즐거워진다는 말씀이지요. 언제 어디서 왜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누군가에게 하시는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입니다.

 외할머니의 그 말씀을 들을 때는 아마 건성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테마를 만지작거리기에는 그때의 제 나이가 많이 어렸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이후 제 안에서 무엇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외할머니의 그 말씀은 제 삶의 기둥이 되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면 으레 외할머니의 그 말씀이 머릿속을 흔들어대며 눈빛을 빛내곤 했으니까요.

 사람이 죽음을 안다는 게 무엇일까요. 조금씩 철이 들어가면서 저는 늘 목이 말랐습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런데 외할머니는 제가 철이 들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셨습니다. 가끔은 외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지?'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온통 공부 잘해야 한다, 돈 많이 벌어야 한다, 출세를 해라 등 추상적인 충고와 조언만 할 뿐이었습니다. 외할머니처럼 그렇게 죽음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을 가슴에 비수처럼 푹 꽂아주며 "여기에 삶의 비밀이 있다" 하고 말해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외할머니에 버금가는 사람을 찾겠다고 산으로 들로 미친 듯이 쏘다니기도 했었지요. 그 즈음의 어느 날 산속에서 '도사'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을 보니 공부할 때가 되었다고, 그러니 자기를 따라와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따라가기에 앞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도사' 말하기를 사람 마음을 읽는 게 중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사람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나중에 '철학관' 간판을 걸었을 때 금방 족집게로 소문나고 돈방석에도 앉고 그런다는 거였습니다.

 살아가기 팍팍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앞날의 방향을 점쳐주는 게 아니라, 찾아온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급한 게 무엇인지를 금방 감지해서 그것으로 족집게 소리를 듣는 그런 공부를 하라고 권했던 그 '도사'는 결국 자기가 '제자'로 삼고자 하는 애송이의 마음 하나도 읽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접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우리 오빠, 닭이라도 사다 드려야 쓰겄는디"

 외할머니.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가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 이즈막에 이르러서야 죽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혀줘서 고맙다고 하실 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연거푸 고맙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실 때 저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싶어집니다. 단순하게 그냥 껴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부러지도록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로 마구 몸부림을 쳐보고 싶어집니다.

 몇 번인가 실제로 그렇게 해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큰 위안은 없이 매번 눈물만 나오려 하더군요. 그런데다 어머니는 또 "아이고, 이러지 마시오.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애원을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민망하고 머쓱해져서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혼자 맹세를 하며 어머니를 이부자리 위에 가만히 눕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죽어서도 안 잊어 먹을라요, 이 고마움을…."

 죽어서도 안 잊겠다는 어머니의 이 말씀이 저를 숙연하게 합니다. 지난 3년여 동안 아마 3천 번은 들었던 것 같은데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한참 동안 멍해지곤 합니다. 도대체 죽어서도 안 잊겠다는 발언은 어떤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지난 시기 그 어느 때보다 확신과 자신감에 차 계십니다. 아들은 의심할 필요 없는 오빠이고, 까마득한 과거에 돌아가신 당신의 친정어머니는 지금 어딘가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은 아직 옷도 입을 줄 몰라서 아랫도리를 벗고 다니는 아주 작은 소녀입니다. '오빠'가 '소녀'를 안아다가 자리에 눕히거나 목욕을 끝낸 뒤에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그녀는 또 이런 말로 저를 웃겨주십니다.

 "아이고 우리 오빠, 닭이라도 한 마리 사다 드려야 쓰겄는디."

 사 주고 싶으신 게 항상 닭인 것은 아닙니다. 수박도 사 주고 싶고 오징어도 사 주고 싶고, 풍천장어도 사 주고 싶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사 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도 유독 닭을 더 많이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아무튼 어머니가 그렇게 무엇을 사 주고 싶다 하실 때마다 저는 슬쩍슬쩍 장난기가 발동해서 파고들어가 봅니다. 무슨 돈이 있어서 닭을 사 온다는 것이냐고, 돈도 없으면서 거짓말이나 한다고 책망하는 투로 어머니를 놀려보는 것입니다. 그런 때 어머니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음마, 오빠도 참. 아, 우리 어머니한테 달라고 해야지요."

 그런 말씀을 하실 때의 어머니는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갸름하게 뜨고 고개를 살짝 틀어서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정색을 하는, 너무도 진지하고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그 표정에 저는 그만 헷갈려서 한참씩 눈을 깜빡이게 됩니다. '가만 있어, 외할머니가 지금 살아 계시는 건가?'하고 말입니다. 하긴 이런 어리둥절함이 제게는 그리 낯선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 어머니에게서 받는 용돈이어야 합니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의 외할머니는 살아 계실 당시의 외할머니보다 훨씬 자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외손자인 저를 맞아주곤 하셨지요. 제가 밤늦게까지 친구 집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집 앞의 측백나무 밑에 앉아 계시다가 사르르 일어나시며 "아이고 너무 늦었다, 어서 들어가자"하시는 거였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왜 이렇게 살아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가, 의아하고 무서워서 처음에는 도망치기도 했지만, 차츰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일부러 늦게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요즘은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품에 안고 '정지간'으로 나가서 목욕을 시키던 날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떠올라오곤 합니다. 때가 되면 가야 할 곳을 알고 살던 데를 떠난다고 하는 늙은 코끼리처럼 외할머니는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우리 곁으로 오셨었지요. 마치 "나 여기서 죽을란다, 괜찮지?" 하는 듯이 말입니다.

 5남 1녀 육 남매,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씻기고 먹이면서 부엌일에 들일까지 하시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친정어머니라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는 아마 생각이 제법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으로 살다가 다시 아이가 되는구나' 하는 인식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뭉클하고 거룩했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와는 다른 생을 예비하는 과정쯤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흘린 눈물은 끈적이지 않고 담담했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의 꽃상여가 마당을 빠져나가던 날 별로 울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별로 울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짠하다고 눈물을 많이 흘려주셨지요. 아들 집이 아닌 딸네 집에 와서 돌아가셨다고 말입니다.

 외할머니. 혼자서는 일어나서 앉지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 이후로 어머니는 돈 쓸 일이 부쩍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자식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한 사람,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받는 용돈이어야만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외할머니께서 지금까지 그래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아니 좀 더 자주 어머니의 꿈속을 방문해서 위로도 해주시고 용돈도 쥐어주고 그래주십시오. 어머니가 그 돈으로 오빠라는 이름의 아들에게 닭도 사 주고 수박도 사 주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사 주실 수 있도록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꿈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 행복해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름 즐거워하는 외손자가 혹시 기도만으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귀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 한 편의 작은 글로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출처 : 나를 오빠라 부르는 어머니...묶어놓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할머니, 엄마, 나, 삼대. . 할머니는 엄마를 나았고, 엄마는 나를 나았고, 나도 언젠가 생명의 엄마가 될 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존재. . 엄마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코 끝이 따뜻한 것이, 엄마 사랑해, 그냥 항상 미안해. . 근래 대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얼마 전 아빠 또한 나에게 이러한 철학은 옳지 않다며 전화너머 긴 위로의 말을 해주셨다. 분명 나는 자살의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지만서도, 아빠는 준비한 듯, 아니 마음의 쌓여있던 걱정을 봇물 터지듯 풀어놓으셨다. 듣기 싫었지만 얼마나. . 아빠의 진심이 느껴져 얼마나 속이 따뜻해지던지. . 이렇게 나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부모님께서 길러주셨다.
세 해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누워계셨던 할머니, 따라서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었던 일이였으리라. 미국으로 오기 전의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던 여름, 당시 할머니는 누워계셨다. 병원에서 투석을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모두 보았다. 나는 투석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과정을 조용히 누워 받으시는 할머니를, 곁에서 보았다. 그 해 여름, 병원에서도, 방에서도, 할머니는 늘 누워계셨고, 나는 그 곁에 눕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들이 할머니와 함께했지만, 할머니 곁에 누웠던 사람은 나 뿐이였던 것 같다. 엄마도 앉아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고, 다른 손주들도, 나만큼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 나와 창준이 가까이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셨다. 다른 손주들과 우리 남매가 할머니 마음에 어떻게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남매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오랜시간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창준이는 사춘기 남학생이기도하고, 애교라곤 없는 무덤한 성격이여서 안기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할머니 곁에 누워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이하게도 아무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할머니의 사촌분들에 관한, 가족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사실 나와는 먼 어른들 처럼 느껴져 누가누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별히 건강하라, 잘 지내라, 와 같은 조언따위의 말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 . 과일을 먹으며 우리는 그냥 그렇게 누워서 놀았다. 그 여름, 나는 4주 동안 제주도에서 일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할머니의 곁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뭐해요? 로 시작해, 우리는 역시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온다느니, 청주는 뜨겁다느니. . 아이들이 나를 좋아한다, 할머니는 누워있지. . 점심은 아직 안 먹었다, 오늘은 엄마가 왔다갔다. . 등등.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해는 내가 미국으로 처음왔던 해이다. 내가 속상할까 걱정되었던 엄마는, 사실을 몇 주 후에 알려주셨다. 처음 소식을 접한 날, 겨울의 어느 날이였다. . 당시 엄마가 어떠한 문장으로 소식을 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이였지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예상된 일이였으니. . 특별히 슬프지도 않았다, 가슴이 아프다거나하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나와 이 공간에 함께 계시다는 느낌을 짙게 받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어느 일요일,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의자에 두 다리를 안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할머니의 기억이 나면서, 눈물과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두어시간을 나는 의자에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생각날 이유도 없었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는데, 그렇게 나는 속을 개우듯 울었다.
엄마, 엄마는 어땠을까. . 지난 해 여름 엄마를 만나, 엄마는 그 해 너무나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셨다. 딸을 미국에 보내고, 엄마마저 곁을 떠났으니. . 속이 속이 아니였으리라. . 엄마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함께 장을 보는 것,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것,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며 먹어주는 것, 미사를 드리는 것, 엄마와 공원을 걷는 것, 함께 쇼핑을 하는 것, 나의 여름은 대부분 이러한 일들로 가득하다. 특별한 일이 없을 시에는 엄마와 장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거리를 걷는 시간들이 많다. 와중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한 나와의 모든 시간이 사라지고, 엄마마저 돌아가셨으니. . 나로써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증조할머니, 엄마의 할머니는 90이 넘어서 돌아가셨다.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으며 매우 마르고 작으신 분이였다. 담배를 태우셨고, 이빨이 많이 없으셨으며, 항상 머리를 쪽지로 묶으셨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셨으며, 걷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셨다. 앉아계실 적에는 늘 한 무릎을 땅에두고 한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쉬게하셨다. 피부는 그을리신 듯 구릿빛이셨고, 얄팍하고 늘어진 주름들이 많으셨다. 눈은 작고 쳐지셨으며, 머리는 길고 가늘고 하야셨다. 담배를 좋아하셨고 공원을 좋아하셨다. 가끔 웃으셨으며, 말을 매우 씩씩하게 하셨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셨다는 것이, 당시 어린 나로써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단하신 분이다. 언젠가 엄마가 증조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있다. 할머니가 늙으시어 몸에 기운 한 줌 없이 누워 계시던 중, 화장실에 가야한다며 몇 번을 가셔도 일을 보지 못하시더란다. 괴로우셨는지 부축을 받아가시며 화장실을 계속 드나드셨지만, 변을 밀어낼만큼의 힘이 없는 할머니는 일을 보실 수 없었다. 힘 없는 할머니는 괴로움을 안고 누워계실 수 밖에 없었더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엄마는 장갑을 끼고 할머니의 항문에서 변을 꺼내셨단다. 그 작은 몸에서 얼마나 많은 변이 나오던지, 엄마는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 동안 할머니는 얼마나 답답하고 지치셨을까. 엄마의 손길이, 얼마나 큰 체증을 내려주셨을까. 계산 할 수 없고, 결코 비교 할 수 없는 감정, 느낌들이였을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본, 첫 사람의 죽음이였다. 엄마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매우 편안히 이야기해주셨다, 엄마는 늘 죽음에 대해서 편안히 이야기하신다. 할머니는 누워계셨고, 조용히, 아픔이 없으신 듯 편안히 돌아가셨다고,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가장 평안한 방법으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 하셨다.
죽은사람의 길을 알지는 못하지만, 죽음을 맞이한 산 사람의 길은, 체험하였고, 보았다. 증조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 이외에도 할아버지들의 죽음들이 있었다. 죽음에 대해 특별히 두려움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한다. 기사 중 절망 앞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알면 삶이 5천배는 즐거워진다'라는 말이 기둥이되었다는 대목이있다. 아, 이 얼마나 멋진 기둥인가. 살면서 절망이란 많다, 죽으면 끝일거야라는 생각도들고, 끝이면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나를 죽이지 못 한 괴로움들을 뒤 돌아보며, 어떻게 내가 죽지 않았나라는 경이로움과 더불어, 사람이 죽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든가? 죽어라, 힘들다고 징징대려는 순간, 그럼하지마라는 생각은, 투덜거림을 조용히한다. 죽을, 하지 않을 마음도 없으면서, 모순적인 투덜거림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일을 어서 마치고, 뿌듯함을 만끽하는데에 시간을 사용하면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의식의 가까운 곳에 죽음을 두는 것은 분명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살아계신 할머니에게, 잘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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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따끈따끈한 햇빛을 스미며 누워있었더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근래 계속 하는 이야기지만 기분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 교통법 딱지, 자동차 사고, 기름값 (차를 갖다 버려야. .), 적자통장, 게으른 나의 모습, 기다려야하는 대학통지, 정리해야 하는 책들, 뭔 소리 하는지 알 수 없는 생물교수. . 이 정도가 근래 생활의 번거로움 인 듯 하다. 왠지 쓰고보니 순위도 딱 저 정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차를 버려야한다는 결과가나오는구나. . 아무튼, 딱지를 받은 날에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 알고있었고, 기분이 더러웠지만, 무언가 감정의 집착이 사라져버린 요즘. . 이 또한 6개월 후면 쉽게 잊을, 아무런 쓸모없는 에너지, 감정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사실 생활의 번거로움을 찾아보자니 저러한 리스트가 작성되지만, 저들에 대해 나의 에너지의 5%도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근래 나의 기분이 좋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된다. 나의 기분은 왜 좋은가? 얼마전 주위 친구들, 사람관계를 돌아보며, 그것에 블로그를 쓰기도 하였다. (http://watericious.tistory.com/101) 확실히 주위 지인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더불어 사순시기 동안 시간을 들여 읽고있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들에 대한 공감 또한 마음을 비우는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 나의 21년 삶을 돌아보면, 나의 전반적 분위기는 중립, 혹은 어둡에 가깝다. 중립보다 어둠에 가깝다고 해도 되리라. 복잡한 지능싸움따위의 영화를 즐겼고, 나 자신을 더럽게 여겼으며, 가볍기보다는 무거운 주제들의 글을 읽고 썼고, 쉬운 일들은 하소롭게 대하였다. 나의 즐거움은 나에게 매우 생소하다. 나의 변화는 분명하다. 무언가 편안한 일이 하고싶어졌고, 나의 생활에 대해 수긍하고있다. 세상의 불합리를 합리로써 이해한지는 오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최근에 일이고,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작아지기도 하였다. 안락은 나약함이라 믿었던 기준또한 변하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마음의 무게가 변함에 따라 매우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분명히 어느정도 변하였다. 궁금한 것은 왜, 나는 왜 변하였을까?
사람. . 사람이란, 사람이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하느냐가 보다 관심두어야 할 이야기이지 않을까. 개인마다 필요한 것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활의 근본에,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오늘 '선택'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내용이언정 30의 싱글이, 말이 통하지만 공부를하고있는 경쟁력이 없는 남자와, 가정과 사회생활이 안정되어있지만 특별히 재미가 없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글이였다. 글의 댓글 중에는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경쟁력 무시 못 해', '둘 다 아니야', '나이에 압박받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등등 다양하지만 흔한 답변들이 있었다. 보기에, 이것은 매우 흔한 질문이며, 매우 흔한 답변들이다. 이러한 질문은 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600년 후에도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 또한, 시대를 반영하겠지만 멀리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생물의 육체적인 공통분모도 있지만,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바닥은 외로움과 사랑일 것이다. 모두들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사실, 외로움. .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사랑 뿐. .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 순간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감정도, 시간이 지난 후 착각이라 느끼고, 사랑이 아니라 느꼈던 믿음도, 돌아서서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외로움, 누구나 알고있고, 필요하고, 정확히 정의 할 수 없는,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 애매하고도 근본적인 감정들.
외로움에 대하여 - 우리는 외로운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는 사람인가? 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울 수 있는 것이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때로 배가 고프기도하고, 고프지 않기도 한 것과 같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같은 논리로, 인간은 누구나 외롭지 않다. 얼마 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처럼, 혼자인 사람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고? 어차피 혼자사는 세상. . 이 또한 외로움과 배고픔과 같다. 우리는 혼자이기도하고, 혼자이지 않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지 않다. 우리가 배가 고프지만 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배고픔 이상의 배부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만큼 우리는 궁극적으로 혼자이지 않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으며, 가족이 없는 이더라도, 친구가있고, 친구가 없더라도 지인이 있고, 지인이 없더라도 인류가 있다. 이렇게 우리는 분명 속해있는 존재이고 이러한 단체성은 우리에게 속함 belonging을 제공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지 얼마 되지않아 한 생각 중, '인류와 동질감을 느낀 후 살만하다'라는 생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의 감정을 뚜렷히 전달 할 곳이 없었다. 나의 이유없는 감정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가까이 없었으며, 그렇게 영화, 글, 음악들 속으로 빠지는 것이 보다 편안했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의 가까운 지인 중에는 없었지만, 음악, 책, 영화 속에는 나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특정한 인물들이 아닐지언정, 나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다니며 배운 것은, 그러한 감각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음악의 속도, 글자들의 배열, 영화 속 색감의 사용, 그 철학들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는, 이상한 일이지만 모르겠다. 그러한 매개체들을,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한데에는, 의식 중 나 자신을 고립하려는 나의 일부가 아니였나 싶다. 무튼 그렇게 나는 '인류와 나'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끼고 삶이 어느정도 괜찮다라고 느꼈던 기억이있다.
사물도, 자연도, 시간과 세상의 방식들에 마모되고 변화된다. 이처럼, 진화 처럼 나의 변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들 처럼, 나를 만진 에너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아끼는 사람들, 사회, 종교, 자연, 예술. . 이 정도로 추려질 것 같다.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는, 어느정도 나 자신을 이 것들에게 expose 노출하였고, 그들은 나를, 나의 사상들을 만지고 변화시켰다. 나의 기분이 좋은 것은 나에게 기이하고 새로운 일이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또한 기이하다. 마치 늘 그랬던 것 처럼, 늘 입던 옷처럼, 편안하다기보다, 아무런 어색함이 없어 인지하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요즘 근심이 없을 뿐 더러, 불편함이 없다. 번거로움도 마땅히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할 일들은 그저 하고 지나가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일들. 딱지를 너무 많에 떼어 면허 기록이 더러우면 어떠한가. 어느 대학을 가면 어떠한가. 어느 곳에 살면 어떠한가. 우주가 움직이고 있고, 그 안에 내가 있고, 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듯, 나도 나의 자리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에 안심일 뿐.
글을 쓰다보니 해탈한 듯한 글이 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덕인이 되지 못한다. 해탈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평시에도 상당히 조심스럽다. 사실상 사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 전부 그 자체이셨지만,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고 필요치도 않으셨다고하셨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인것 같다. 딱히 이것이 사람보다 우등하여서라기보다, 그저 사람의 자리가 아닌 것이다. 우주에 앞뒤가 어디있고, 위아래가 어디있겠는가. 내가 앉은 자리가 나의 자리이고, 그대의 자리는 그대 것이니라. 나의 것 이외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그냥 그런 것.
나의 부족함,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고, 나는 나를 수용 할 뿐. 이래서 근래 마음이 편안하니 즐거운가보다, 아멘 so b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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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타운
감독 카메론 크로우 (2005 / 미국)
출연 올랜도 블룸,커스틴 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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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Sky의 감독의 작품. 아무런 예측도 없이, 편안한 주말의 로맨틱 코메디라는 마음으로 본, 예상보다 멋져 매우 만족스러웠던 영화.

영화를 본 후 기억에 남는 것들:
burning eagle, band continues to play
cousin Jerry son
"you cannot be buddies with your son"
Kentucky
tradition
cremation vs burrial
friends / family
you failed failed failed
not millions but billions
success, the hungry god served by humanity
go home or
if it's not this, it is another
expectations
pride
death is not the end
death does not have to be sad
roadtrip
music
america
martin luther king
stories of others, people

영화의 배경은 Elizabethtown, Kentucky. 아버지는, 아내를 만나고 Kentucky에서 California로 잠시 체류하고, Oregon에 정착하여 아이들을 낳는다. 그의 아들, 주인공, Orlando Bloom, 어찌 그리 잘 생기셨는지. . 주인공은 대기업에서 큰 실수로 큰 돈을 날리고 실패자가 되어 자살을 결심. 죽으려는 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다. Kentucky에 있는 아버지의 시신과, 장례를 처리하고 다시 자살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Kentucky로 떠남. 승무원인 Claire, 와 즐거운 대화. Elizabethtown이라는 작은 동네에, 서로 모르는 사람은 없다.
Elizabethtown 아버지의 고향에 도착한 주인공, 그곳의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가족이고,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 아버지를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려 했지만 그를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친구들과 가족들.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 Oregon에서 왔다고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California를 들먹이며, 그들과 다름을 강조한다. 그들은 아들과 아버지는 친구 일 수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고집. 와중 자신의 실패를 숨기고, 여전히 대기업의 멋진 아들 역할을 한다.
Claire, 오 클레어. . 그녀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좋아하며, 농담을 즐기고, 자신은 주인공이 아닌 부수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성격에도 불구하고, substitute 대신이 되는 것이 부담이 적다고 이야기한다. 너를 좋아하지만 너는 나를 위한 운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그를 사랑하지만 아닐 것이라 한다. 그녀는 그에게 '너를 좋아해'라고 고백하고, 그는 그녀에게 '나 사실 회사에서 짤린 남자야'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you failed you failed you failed you failed. do you think i care? 그는 큰 돈을 날렸지만, 그녀는 그의 고백에 실망한다. 네가 나에게 고백 할 것이 고작 돈 날린 일이라니. . 나와 헤어지는 것이 슬프다는 말이 아닌, 신발회사의 잔고 이야기라니. . 정녕 멋진 모습은 실패하고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사람들이 '저 잉간은 왜 아직도 웃고있는가'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Claire.
Roadtrip 여행을 떠나 본 적 없다는 그를 위해, 분 (minute)단위로 계획을 짠 지도를 그녀는 그에게 건넨다. 그가 들어야하는 음악, 들려야 하는 지역, 먹어야 하는 음식까지 완벽하고 너무나 멋진. . 너무나 멋진 선물을 전하는 Claire. 그렇게 주인공은, 자신과 화장한 아버지와 함께 차를타고 떠난다. 음악을 들으며, 아버지에게 말도 걸고 화도내고 농담도하고, 웃고 울고, 그의 여행은 그렇게 진행. 그리고 결국 그녀의 지도는 그에게 선택권을 준다. 그녀를 찾을 것인지, 지도를 계속 따라 집으로 돌아 갈 것인지. .
평점이 높지는 않지만 천천히 보면 상징이 굉장한 영화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전통에 대한, 삶, 철학, 실패, 사회, 성공, 사람, 관점, 기준, 부모, 가족, 친구, 자존심, 책임, 의무, 모든 것이 너무나 편안히, 자연스럽게 녹아 있기에 멋진 영화.
자괴감을 상대 해 줄 멋진 영화. 근래 자살 소식들이 쉽게 들려온다. 아빠 역시 얼마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충대의 한 학생이 장학금이 끊어지자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참을 이야기하셨다. 세상에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삶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괜찮은데, 괜찮은데, 괜찮은데, 실패면 어떠하고 성공이면 어떠한가, 그 모든 것이 괜찮지 아니한가.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웠으면, 죽음이 편안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이 아름다울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매정한 모습만 보여주었으면 그래야했을까. . 부디, 그들의 영혼이 편안한 곳에 안녕하기를. .


주인공 Drew 와 통화하는 Claire



Drew and Claire



성조기와 아버지를 들고있는 Drew



Claire and Drew - Both are such wonderful characters, love love love them both !



사진출처 http://herlibraryadventures.blogspot.com/
http://img89.imageshack.us/i/13elizabethtown.jpg/sr=1s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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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흐르는 사랑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2006 / 미국)
출연 휴 잭맨,레이첼 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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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번역이 재미있군, The Fountain 에서 천년을 흐르는 사랑으로. . 분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과 영원, 영생에 대한 영화. Pi 와 Black Swan의 감독의 작품. 흥미롭게도 Pi 다음, 그리고 Black Swan 이전의 작품인데, 대중성이 딱 그 정도인 것 같다 - 둘의 사이. 평범하지만은 않은 구성. 주인공은 연구원이기도하며, 여왕의 충성스런 기사이기도 하고, 영생의 신적존재이기도 하다. 세가지 이야기의 옴니버스 구성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상징한다. 각자 사랑을 위한, 영생에 대한 동경을 그린다. 죽은 별에 도달하면 영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죽음으로 인한 영원을 그리고 있다. 영원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동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하는 와중, 주인공은 그녀의 병을 고치려, 그녀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의 연구실에서 보낸다. '죽음은 질병이며, 모든 질병처럼 고칠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 .
죽음은 영원을 향할 것이라는 믿음. 나무를 이용한 비유, 삶을 대하는 자세, 등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난해하지만은 않은 내용. 그 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연출. 전반적으로 선명한 색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검은우주, 흰색을 입은 그녀, 뉴트럴 neutral 한 색의 나무, 금빛이 흔히 사용된다. 나무의 상징 또한 멋지가 표현되었다. 나무의 살아있는 촉들, 그리고 그것이 죽으며 순감 말라가는 모습의 표현. 주인공의 표정,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손가락에 반지를 문신으로 세기는 모습. 영생을 허겁지겁 마시고, 결국은 자연의 흙과 풀이되어버리는 결과. 감독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낸다.


"Our bodies are prisons for our souls. Our skin and blood, the iron bars of confinement. But fear not. All flesh decays. Death turns all to ash. And thus, death frees every soul."
" He said... death was his father's road to awe."
"You pull me through time."
"Death is a disease, it's like any other. And there's a cure. A cure - and I will find it."


space traveler 주인공


나무와 주인공


그녀 앞에 앉은 주인공


영생의 나무


살아있는 나무의 촉


영생의 꿀을 마시는 주인공


영생의 꿀은 풀과 흙을 만들었다


죽은 그녀를 묻은 주인공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



잃어버린 결혼반지를 대신하여 그녀가 선물한 펜과 잉크로 문신을 세기는 주인공


그리움, 고통, 슬픔, 외로움,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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