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t 사순절 사순시기
Liturgical calendar 로 Ash Wednesday 부터 Easter 지지 46일 간의 시간. 성서에 다르면 예수님은 공적인 ministry 이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드리며 사탄의 유혹을 견뎌냈다고 기록되어있다. Ash Wednesday 이름은 신자들이 하느님에게 후회와 비탄을 표현으로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는 것에서 유래. 올 2011년도 의 Ash Wednesday 는 3월 9일. Easter 는 4월 22일이다. Easter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복하는 날.
사순이라는 말은 40이라는 숫자에서 유래된 것. 4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홍수에서 나온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벌하기 위하여 40밤과 40낮 동안 비를 내리셨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판을 받기 위하여 40일을 엄재 함. 광야에서 40일의 단식.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 40의 상징적 의미가 중요한 것. 속죄, 보속, 참회, 자신의 쇄신 등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준비한다는 상징적인 기간이 사순시기이다.
파스카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40일. 신자들은 받은 세례를 다시 생각하며 참회행위를 통하여 파스카의 신비체험을 준비. 사순절의 시작부터 부활 전야제 까지는 미사 중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 사순절의 시작하는 수요일은 세계의 단식일이며 머리에 재를 얹는다. 사순 제 1, 2, 3, 4, 5 주일 – 성 주간이 시작. 제 6주일은 주의 수난 성지주일이라 부른다. 성주간은 메시아로써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엄격히 단식하던 것을 본받아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노력해야 함. 자신을 이기는 극기의 자세를 요구. 40일 동안 단식과 금육을 통해 절약한 것을 모아 두었다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기도, 미사참여, 사랑의 나눔 등을 실천.
단식의 의미, 형식, 신자들의 의무에 관한 규정 –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 참된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단식은 초대 교회시대부터 사순절 기간과 사계의 재일 중 신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하나로 행해짐. 단식 규정은 상당히 엄격. 단식으로 절약된 양식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사용되도록.
자료 출처 http://www.catholic.or.kr/ 가톨릭인터넷 Goodnews 굿 뉴스
Vatican Holy See 바티칸 2010년 사순절 http://www.vatican.va/liturgical_year/lent/2010/index_en.htm
이번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성당에서 집중하여 기도 할 제안들을 나무에 걸어놓아 하나 들고 왔다. “Pray that all Christians may be light for the world by living out their faith in service.” 마침 방학인지라 금식에도 참여한다. 매일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하나씩 찾아 적겠다. 비록 학교가 시작되면 일상으로 돌아 갈 테지만, 방학 동안 꾸준히 할 것을 다짐하고, 이 후 에도 추기경님의 어록과 기도, 묵상, 은 계속 잇겠다. 4 월 22일 까지니 일일일식을 해야겠다.
3/23 Wed |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다.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태우고 희생하여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죽기까지 가는 것.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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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없애야 합니다. 불화의 뿌리를 뽑아야 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 믿지 않으려는 불신, 용서할 줄 모르는 미움, 나만을 위하는 소유욕과 지배욕, 질투와 경잼심을 버려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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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묵상, 참회 - 속죄, 보속, 참회, 자신의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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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천천히 짚어보자.
속죄 – 상대방에게 지은 죄를 씻고 상호간에 범죄 이전의 유대를 회복하는 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거슬린 인간의 죄를 구세주 그리스도가 대신 보속하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킨 일을 지칭한다. 구약성서에서 속죄는 야훼께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친교를 회복하는 일. 야훼 편에서는 자비의 행위,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는 야훼께서 지정한 특정 행위를 이행하는 일. 야훼께서 지시한 속죄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벗었던 예에서 발전. 속죄제물을 바침으로써 야훼의 분노를 풀어드린다는 속죄사상은 퇴조. ‘야훼의 고난받은 종’이 인간의 죄를 대신 보속해 준다는 예언을 믿기에 이르심. 야훼께서 인류의 죄를 그에게 지우셔서 ‘그 몸에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는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으므로 우리의 병을 고쳐 준 것.’ 신약성서에서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셧고’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다’ 이 속죄는 하느님이 베푸신 자비이며 진실한 대사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인한 결과. 속죄개념은 속죄의 근본을 이루는 의화관념과 관련.
속죄를 그리스도의 구석사업과 관련지어 죄에 대한 보속이라고 본 관점이 있음.
보속 – satisfaction 넓은 의미로 끼친 손해의 배상 및 보환. 그리스도 신학에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벌을 받음.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죄를 충분히 보속한다고 주석한 데에서 비롯. 가톨릭 윤리신학상의 보속은 고백성사의 본질적 요건의 하나로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약.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는 성세성사로써 벌까지도 사하지만 세례 후에 범한 죄는 고백성사로 사하여진다. 그러나 죄의 벌까지도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벌만 사하여 질 뿐 잠벌은 남아있다. 잠벌이란 영원한 벌에 대하여 일시적인 벌, 혹은 연옥벌이라는 뜻이며, 우리는 자신이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보속이라는 것이 필요.
교회는 그리스도 보속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당신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시오’라는 말씀대로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였음. 구약성서도 죄는 용서받았으나 벌은 남아있는 경우가 많음. 원조는 은총상태로 회복되었으나 고통과 죽음은 며치 못했고, 모세의 불신은 용서받았으나 약속한 땅에서는 제외되었다. 신약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 했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라 하였다.
참회 – repentance 참회의 일반적 의미 과거의 범죄사실을 기억, 현재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인식적 요소와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죄가 사해지기를 원하며, 죄를 혐오하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 참회는 죄악의 상태에서 벗어남을 목적.
참회는 인간이 개인적 죄의 용서를 받아 의화되는 경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었음.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행위와 교회의 대표자인 사제의 사죄 및 통회, 고백, 보속을 하는 참회자의 행위가 필요. 이 4자의 행위 중 죄의 용서라는 효과를 가져오는 실질적인 요건은 어느 행위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 아퀴나스에 의하면, 참회자의 행위는 성사의 재료요, 사제의 사죄는 형상, 인데, 양자는 동등하게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유효한 원인작용을 이룸. 전체과정에서 최종적 원인작용은 하느님께 속하므로, 성사적 표시를 도구적 원인작용의 행사라 함. 성사를 받으려는 뜻을 겸한 상등통회를 한 참회자는 고해성사의 예식을 받기 전에 죄의 사함을 받았음을 인정. 성사는 예식 자체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발전해 가는 상태로 보아야 하므로 참회자의 첫 행위에서 성사가 시작되어 성사 예식 자체에서 절정에 달한다는 것.
자신의 쇄신 – 신도 개인, 수도회, 특히 교회가 그 모형인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 교회는 신인 (神人)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인양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으나 인적 (人的) 실재라는 점에서 교회 안에 과실과 죄악이 현존 할 수 있는 것. 한편 교회는 인간 성화를 (聖化) 이룩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성화되는 과정에서 있는 신자들을 포함. 따라서 거룩하지만, 순례하는 교회는 바로 죄인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죄는 거부하지만 죄인은 맞아들인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무죄하시고 죄를 모르시며 다만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교회는 그 품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성스러운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 하며 회개와 쇄신을 끊임 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교회가 계속 정화되고 쇄신되어야 할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의 무한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실천 능력의 유한성에 있다. 신자 각자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공동체의 제도적 차원에서도 반성과 쇄신이 계속되어야 함.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그 실천의 유한성 때문에 어느 특정한 시대나 지역이나 인간들의 제도나 방법이,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 따라서 교회는 시대, 환경, 대상, 인물이 변함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정확하고 유효하게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방법을 쇄신, 제도를 개혁, 생활을 현실에 맞게 조정. ‘교회의 쇄신은 모두 본질적으로 교회사명에 대한 충실성에 있는 것이므로…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불리움을 받음’.
교회는 이러한 쇄신의 능력을 주님의 약속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미 갖추고 있다. 쇄신의 원리는 더욱 더 복음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위하여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진술하기 전에 경건하게 들어야함. 신앙의 원천인 복음에로 돌아가야 거기서 쇄신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음. 원래에서 연역할 수 있는 방향은 전통과 진보의 조화.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내용과 표현의 일치, 대화와 협력의 자세 등.
무턱코 고른 첫 어록인데, 첫 날에 극히 적합하다. 나 자신의 희생, 이상향을 향한 노력. 사랑,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쉽게여겼고, 그것은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논리도 없었던 움직임들. 나 자신을 비우고 아픔을 겪고, 그것을 꺽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바람 조차도 비워 버리리라. 옳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모든, 나 자신 조차도 비워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옳다.
딱히 오늘부터 해야지 - 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 시험이 끝났을 뿐이고, 오늘 저녁부터 해야겠다 - 라고 마음이 생겨, 시작하였을 뿐.모레인 금요일 부터는 주말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 매일 글을 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펜과 김수환 추기경님의 책을 꼭 챙겨가 practice를 소홀하지 않겠다. 예수님은 40 일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과 싸우며 수행을 하셨다. 나는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나 자신을 싸우면 되는 것이기에, 비교 할 수 없는 practice이다. 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꾸준한 의지를 기르겠다. 선을 그어놓으니 마음이 기이하게 편안하다. 즉흥적이고 매우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3/24
사랑 -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둘째날. 이른 아침 일어나 산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 내일 심부름을 하고 점심을 먹고가라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먹을 생각을 하니 금식 이 후 처음의 식욕이 돋았다. 잠을자고 2000시 할머니의 전화에 다시 깨었다. 통화 후,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끓여져 있던 콩나물 국과 고구마를 먹었다 - 아아, 얼마나 미약한 나의 모습인가. 고민은 대략 2분에 불과하였다. 정신은 음식을 찾았고, 몸을 움직였다. 기도를 드리고 국과 고구마를 20분 가량에 걸쳐 먹었다. '먹어도 된다'라는 생각을 하니, 몸의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판의 미로에서 요정의 말을 어기고 포도를 따아 먹은 오필리아의 모습이 나와 겹치며, 분노하던 요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아, 미약한 나의 의지에 큰 실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식단은 몸에 좋지 않다며 따위의 구차한 변명을 드는 나의 모습을 보며, 국을 떠 먹으면서도 아쉬웠다. 사람이란, 아니 나란 허용되는 범위가 생기는 순간 그 범위의 틀을 제 멋대로 정하는 것 같다.
다음 주에는 크로스 컨트리 스키 약속과, 등산약속이 있다. 둘 다 날짜가 정확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굶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예상은 한 일이지만, 이유가 이유인지라, 그저 죄송 할 따름이다.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현대인을 위한 금식 방법을 다시 읽어보니 Ash Wednesday 와 Good Friday 에 금식을 하기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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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 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한다."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 느낀 감정 - 실망과 죄책. 아아,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잘 해야한다는 생각에, 성스러운 일이기에, 보다 잘하고 싶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굉장한 무게와 실망감을 느꼈다. 저녁인 지금, 실망감은 커졌을 뿐. 나의 신앙심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도리에 맞지 않다. 자신을 보다 , 마음을 보다 의지를 보다, 굳게 심어야한다. 그것이 목적이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나 쉬워서야, 아무런 발전도 있을 수 없다.
격일 금식과, 격일 일일일식을 해야겠다. 애초 10일 가량을 굶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등산을 다닌 다는 것이 무리한 계획이였다. 다만 약속이 이렇게 빨리 잡힌 것이 계획의 변화를 일찍 불렀을 뿐. 합리화라 하여도 사실이고, 계획은 다시 세우면 되는 것이다. 아직 셋째날이지 않은가.
오전, 일어나 수녀님과 매리 제인에게 편지를 썼다. 패추릭에게 카드와 선물도 주었다. 옷장을 정리하여 옷 40 여 개를 기부하고 할머니 댁에 가 점심을 먹고 작은 고모에게 심부름을 다녀와,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집에와 떡을 먹었다. 이야말로 실망스러운 일이였다. 나에게, 주님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성체를 모신 사실 조차 잊고, 나 자신을, 주님을 더럽히다니. 생각이 짧은 것을 떠나 없었다. 의지, 의지, 의지 - 자제하는 의지가 1보다 0에 가깝다. 1mm 라도 움직여야 할 텐데, 쉽지 않음은 불가능이 아님을 다시 기억하자. 할 수 있다.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는 추기경님의 말씀. 나에게 사람이란, 커뮤니티란 즐겁기도 하지만 피하고 싶기도하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대화의 불필요함, 말의 복잡성 등이 이유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로 인해 존재하고, 서로에게 밖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미니멀의 인간관계가 아닌, 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로써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으려 - 이에는 노력이 필요하겠지. 상대의 태도를 관찰해야하고 분석해야하니, 나에게는 습관이 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롭겠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러한 프랙티스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어려운, 새로운, 편치 않은 일이기에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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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원을 향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 그릇은 영원을 향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목마름은 '영원에의 동경, 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Rattlesnake ledge에 다녀왔다. North Bend는 가까우면서도 환상의 풍경이다. 새로운 아름다움의 발견에 감사할 따름.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였다. 비록 짧은 기도였지만, 그러한 나의 모습에 감사함을 느낀다. 산에 다녀와 샤워를하고 고구마와 떡을 한 접시 먹었다. 금새 배가 구릉구릉하더니 배가 부르다. 이렇게 사람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기도와 작은 양의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울 것이면 족하다. 이것이 이번 프랙티스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나 그 동안 얼마나 넘치고 풍족히 살아왔는가. 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낭비와 그로 인한 상처를 남겼는가. 부족히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결여였고 자만한 나의 옳지 못한 기준이였다. 새로운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더럽고 부당한 것을 잊고, 미니멀하고 옳은 것을 보다 지향하는, 그러한 새로운 기준의 성립. 부활절 까지 이렇게 일일일식을 실천해야겠다. 물론 어려움도 있을테지만, 꾸준히 해보겠다. 할 수 있다.
수녀님에게 말씀 드린 것 처럼, 수녀님께서 일러주신 것 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걱정 주님께 맡겨두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해야겠다. 어제의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이 다시 생각난다. 고립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많은 기준들이 모여, 가장 옳은 기준을 성립하는 것이다. 많은 기준들의 분포를, 가장 옳은 곳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옳은 이들과의 소통과 나눔이 필요하고, 그로 부터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수녀님,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바른 것을 배우고, 바른 의견을 수용하며, 새로운 나를 성립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목마르다.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러하다. 만족한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늘 보다 나음을 바라고, 완벽 할 수 없음을 인지한다. 이렇게 부족한 나의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향해 만들어졌다고 추기경님이 말씀하신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을 주님으로, 성모님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길을 돌아보고, 그들의 배움을 이해하려 노력해야한다. 그렇게 부족한 나를 계속 채우고 비워야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오로지 주님의 기준으로 나를 채우리 - 할 수 있다, 아멘.
3/28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퀼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동굴 속에 세겨져 있었습니다."
어제 마침 'Schindler's List'라는 영화를 보아, 이 문구가 보다 와 닿는다. 주인공 쉰들러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그의 삶으로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할 수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을 하였다 - 목숨을 구하였다. 전쟁의 풍경은 상상 할 수 없고, 보아도 믿을 수가 없다. 시대를 살았던 이들도, 들려오는 소문들을 믿을 수 없다하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너무나 터무니가 없어 헛 소문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와중에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 Into the Wild 와 대조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은 환경에 충분히 좌우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느님을, 굳이 하느님이라는 성서의 인물이 아닌더라도, 우리 이외의 존재를,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매일 피의 향을 맡고, 구토 악취 폭력 공포에 쌓여 산다면, 악마의 기운을 믿을지도 모르고, 역으로 하느님에게 더 메달릴지도 모르겠다.
무튼 오늘 문구의 중점은, 보이지 않는 것, 느껴지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 것 같다. 믿음이라 - 단순하고도 어려운 감정이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나 자신을 믿는 일 또한 많은 시간, 노력, 용기, 훈련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믿는 일 또한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습관과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익숙치 않아, 나 자신에게 의지하기 일쑤이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짐도, 나누는 방법을 몰라 혼자 짊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느님에게도 청하는 방법 또한 어색 할 수 있고 익숙 할 수 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어색하다. 혼자가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 갈 수록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 자동차 사고 후에도,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니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 주 등산 계획 중에도 고모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의지가 어색하기도하고, 싫기도 하지만, 도움이란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상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나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지를 기억하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조금씩 보다 익혀야 겠다고 생각한다. 의지하고 싶지 않더라도, 공존하는 것을 배우는 것 같다.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만감 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느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보다 비우고, 하느님의 기준을 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맡기고, 나의 질문들과 고민들을 넘기면, 그 분은 나보다 옳은 올바른 기준으로, 정답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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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기도 "오 사랑의 주님 ! 존경받으려는 ... 사랑받으려는 ... 칭찬 받으려는 ... 명예로와지려는 ... 찬양 받으려는 ... 선택 받으려는 ... 인정 받으려는 ... 인기 끌려는 . ..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더러운 하루, 좋지 않을 뿐 더러 괴롭습니다. 오전에 등산을 다녀오고, 오후에 많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필요 이상을 - 최소한을 지키려 했는데, 더불어 간식에 와인까지 마셨습니다. 미루어둔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몰려오듯, 그 동안 참았으니 괜찮을거라는 합리화로, 다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짐의 무너짐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은 더욱이나 어렵습니다. 약쟁이가 Overdose 로 죽은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두려웠습니다, 죽고싶지 않은데 - 나의 무너진 다짐들, 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떠한 대안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 어렵네요.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의 기준, 당신의 희생을 몸소 닮으려 노력하지만 어렵습니다. 아아 어렵지만 할 수 있다고 ,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아, 다짐합니다 - 이 못난 버릇을 버리겠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어떠한 합리화도 용납하지 않으리요 - 기도와 우정으로 노력하고 버리고 고치겠습니다 - 도와주실거라 믿습니다. 할 수 있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죽이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 모든 것이 욕심과 욕망때문이겠지요 - 옳지 않은 기준에 나를 맞추려는 더러운, 부질 없는 욕망. 옳은 것 만 따르겠습니다, 옳지 않은 기준은 버리고, 그것에 나를 맞추려는 더러운 움직임도 멈추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모든 것을 비우고, 비우고 비워, 옳은 것 만이 가득 할 수 있도록, 넘칠 수 있도록, 나를 비우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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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던 시간보다 일찍, 보험회사의 전화로 잠에서 깼다 - 아아 인내심의 시험. 따라서 오늘은 사순에 대한 기억으로 하루를 시작하려한다. 복잡한 일이 생겨도, 번거로운 일이 생겨도, 어려운 조건에서도 바른 마음가짐으로 판단커나 안정을 잃지 않도록.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 나가서 몇가지 일을 보러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작은 일들로 체워지는 생활이 이상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러한 소소한 일들이 나의 삶을 체우다니. 날씨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하늘이 허옇다 - 전형적인 시애틀 날씨. 보험일만 아니면 꽤나 기분이 좋았을 날이다. 하아, 침착히 해결하면 되리라. 어제의 피로로 얼굴이 붓고 속이 좋지 않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듯하며 눈의 붓기가 무겁다. 미래를 기억하며, 곧 잊혀질 일들임을 기억해본다. 오랜만에 만나는친구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괜찮다 괜찮다 알 이즈 웰 - 기도로 승화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아멘 - 약속을 지키는 일, 그은 선을 넘지 않는 일, 할 수 있다, 지킬 수 있다. promise 지키리 - 아멘.
3/31
"세상은 시간적으로 새날이 오고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진실된 인간, 정의로운 인간, 사랑하는 인간'으로 달라질 때에 비로소 새로워집니다."
어제 마신 커피 덕인지 잠을 한 숨도 잘 수 없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며 낙서를하고 돈 보스코의 생애를 읽고, 영화를 보았으며 여러 생각도 하였습니다. 0530시가 되자마자 카페로 달려가 커피 한 잔과 스콘을 하나 먹었습니다. 커피로 이루지 못한 잠인데 다시 커피를 마시다니 -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속이 좋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OD 로 죽은 친구를 보는 듯, 아픔이 조금씩 나타나고 잇고 - 그것의 충격은 가히 말 할 수 없습니다. 잠을 못 잤더니 보다 지치는군요. 머리가 무겁고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습니다 - 아무래도 집에가서 자야 할 것 같네요 - 머리가 너무나 피곤합니다.
당신이라는 새로운 의지를 찾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많은 것은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여유의 시간 - 차분함이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밤 새 여러가지 잡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 하지만 밤은 딱히 길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정도라 할까요 - 감사합니다. 변화 - 많은 이가 간절히 바라지만 , 실행에 있어 , 행동에 있어 변화를 주지 않고 결과적 변화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수 년을 그렇게 보냈고 , 이제는 몸이 지쳐 - 괴로움의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을 긋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 더 이상 용납 할 수 없다고 - 안된다고. 이제 당신에게 의지하겠습니다. 당신과 마리아님과 묵주에 의지하여 나의 원동력을 찾겠습니다 - 나의 시간의 에너지의 주인을 당신으로 섬기겠습니다. 기도로 승화 할 수 없는 것은 없을테지요 - 도와 주실테지요 - 괜찮을테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아멘.
좀 잤다 - 마음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자고 일어나 최소한이 아니지만 밥을 먹었습니다. 최소한을 실천한다는 것 - 예외는 있어야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습이 너무 싫고, 물론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지만 마음만큼 강하지 못한 자신을 자주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약한 마음 모습 모두 주님에게 의지하여 맡기도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도로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약속을 하나 취소하였고 조금 쉬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몇가지 생산적인 일을하였고 괜찮을 수 있음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일부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침 내내 내리던 비도 그쳤네요 - 내일은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타인을 외면 말라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을 기억해봅니다.
새로운 날이 새로운 모습은 아니라는 추기경님의 말씀 너무나 옳습니다 - 몇 날이 지나고 몇 해가 지나도 변하지 못한, 버리지 못한 습관들 - 몹쓸 버릇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당신에게 맡기고 저의 죄를 달게 받되 용서를 구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당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신께 묻고 - 당신의 기운을 따르겠습니다. 딱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많은 이들의 것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당신은 포용하고 수용하고 있을터라 믿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인지를, 인식을 넘어 , 저희의 범위와는 무관한 무한함이실테니까요. 감사합니다 , 노력하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아멘 - so be it.
4/1
사월이네요. 사순시기를 처음 접하던 방학 맞이하던 날 보다 마음이 많이 풀렸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밥도 먹고있고 간식도 먹고있고 , 굶음이 없으니 기도도 덜하네요. 몇 일 동안이지만 기복이 있고 흐름이 있네요. 달리기를 시작하기 위해 이것 저것 준비를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듯 깊음과 더불어 당신을 보다 기억하겠다는 다짐 , 꾸준함 또한 기억해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어야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 요즘 들어 세삼 느껴집니다. 그래도 포기않고 다짐에 다짐을 해 봅니다.
"형제들을 부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들에게 앞서 봉사하는 자 되게 하소서."
비움 비움 비움 -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번 사순시기에 깨닳았습니다. 우리가 , 내가 얼마나 적게 필요로하는지 ,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닳았고, 가장 최소한으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잊기 쉬운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기억하도록 도와주세요. 기도드립니다. 나를 위해가 아닌, 형제를 위해 산다는 것 - 저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타인보다 자신이 무조건인듯 앞섭니다. 보다 너그럽고 관용적이며 포용적일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 노력하겠습니다. 다짐에 다짐에 다짐 - 실천을 전달하겠습니다.
4/3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거듭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높은 분이었지만 낮아지고 부한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었는데 나는 거꾸로 낮은 자가 높이 오르고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어 주님과 '반대로 살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어제 너무나 좋지 않은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다짐이 다시 무너졌습니다. 성당에서 7시간의 세미나가 있었는데 잠을 못 잤고 많은 유혹이 있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핑계를 대봅니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제 자신임을 기억하며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미사도 드리고 성체도 모셨는데 죄스럽습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다시는 안되리라고, 다짐해봅니다. 무려 문구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네요, 역시나 죄는 죄를 부릅니다.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어 글을 먼저 씁니다. 조금은 체계가 있는 하루이기도하고, 내일부터는 학기의 시작이기에 기대가 많습니다.
어제 아프리카와 자매를 맺은 본당들의 모임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에 다녀왔고 그 곳의 본당들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물과 같은 프로젝트들도 진행되고있고 꽤나 체계가 세워지고 있는 듯 합니다. 저 또한 언젠간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졸업이 먼저 하고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리된 삶을 살고싶습니다. 와중 늘 주님을 기억하고 기준으로 살고싶다는 생각 또한합니다. 그들의 미사음악은 참으로 흥겨웠습니다. 와중 쭈뻣쭈뻣 어색해하는 미국인들의 모습과 저의 어중간한 모습이 즐거웠습니다. 하느님의 단체에 이렇게 참여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초등학교 교리활동 이후로 미사 이외의 활동을 하지 않았네요. 수녀원에서도 미사만 참석 할 뿐, 사람들이, 사람들이 모이면 생기는 말들이 싫다며 늘 피하곤했는지, 옳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느님, 인도해주세요 - 비우겠습니다.
4/7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이 네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개강을 하여, 몇 일 소홀했네요 - 아직 부활절이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순시기나마 매일 당신의 뜻을 보다 되세겨 보려하였는데, 수업이라는 핑계로 마음이 나태해졌군요, 죄송합니다. 기도라고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식사 전 기도 정도가 전부이네요. 다시 마음을 잡고 학교 생활 중에서도 당신을 기억 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합니다.
매일 김수환 추기경의 문구를 하나씩 읽으며,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닮으려는 것이 취지였는데 오늘의 문구는 경이의 감탄에 가깝네요. 그 중에서도 '어쩔 수 없는 사랑' 이라는 문구가 새롭게 와닿네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당신께 이야기하고 고백하죠 - 노력하겠노라고. 당신을 향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기억하지만 김수경 추기경님의 글은 자신의 능력과 힘이 아닌, 당신의 힘에 모든 것을 그야말로 맡기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당신에게 맡기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나를 맡겼기에, 나는 당신에게 드리고 당신의 손에 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겠지요.
아, 참으로 아름다우신 당신이고 추기경님이십니다. 나의 삶에, 세계에 여러 영향들이 계시고 기준들이 있어주셔서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 그 중 가장 옳고 아름다운 것을 따르게 하소서, 맡기겠습니다. 놓겠습니다, 아멘.
4/8
정말 울고싶네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째 다짐한 다짐들, 왜 여전히 지키지 못할까요. 내 자신을 놓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다는 듯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나는 자신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도 원하는데 나 자신을 당신에게, 우주의 기운에게, 만물의 손에 놓지 못할까요. .눈물도 나지 않아요. 몇 년 전까지만해도, 정말 낙엽 굴러다고 웃고 울었는데, 이제는 감정의 기복이 적어지고, 다짐의 무너짐에 대한 속상함도 줄어버렸어요. 감정의 '양'이 줄어버렸어요. 이렇게 무뎌져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은데,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보다 자신을 조절하려는 것이 보여요 - 나의 움직임, 행동 하나하나를 조절하려는 모습. 자신을 놓겠다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저를 자유로 풀어주시리라 믿을게요. 나의 자유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닌, 우주의 기운이 주는 것임을 그저 숨만 쉴게요, 그저 숨만, 숨만.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요 - 노력 따위도.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였을 때는 분명 정보전달적인 -이다 어투로 시작하여, 현재는 당신에게 빌고있는 대화형이군요. 음, 내 자신이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인지 - 모르겠다. 내일 금식을 해야겠다, 나 자신을 위해, 우주를 위해, 자유를 위해. 누가 나를 제발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도움을 요청 할 수가 없다.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움을 거부할까요? 역으로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람이거늘, 자신감을 넘은 자만감이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이 아닐까 - 이를 알면서도 궁지에서 나 자신을 가두고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 울지도 못하는 나를. .
절망까지, 이러한 처절함도 괜찮습니다 - 뭐 어쩌렵니까, 시간이 흐르는 것은 같고, 어떻게든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들로 시간을 보냅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실수이고 비겁하고 더럽지만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나의 일부이고, 나는 퍽이나 괜찮은 사람입니다. . 그럴거에요 아마. .
4/9
"고통은 참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되도록 고통을 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을 떄, 고통을 모르는 인간, 고통이 없는 인생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더 찾고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역시 고통이 없었다면 아마도 하느님을 전혀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술에 물 탄 것 처럼 싱겁고 아무런 깊이도 없을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글을 읽으며 - 정말이지 솔직하신 모습에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고통이 없었더라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 추기경이라는 주목받는 위치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종교를 규탄하려는 수많은 이목이 있고, 반종교 지향적인 과학 단체들이 바다를 이룰 정도로 많은 오늘 날, 고통없이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 매우 자극적이다. 하느님은 목발이다 - 라는 주장은, 반종교적인 주장들 중 주요 논리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들은 종교를 나약한 이들의 정신적 자위정도로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을 했었고,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부엌에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엄마는 그러한 관점도 수용해야하며, 종교에 대한, 세상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것 없이 당돌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찌되었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마련인데, 솔직하게 글로 남길 수 있는 추기경님의 모습에 겸손해진다.
고통, 고통, 피하고 싶고 싫다. 하지만 이를 수용해야한다. 하지만 보다 큰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고통을 수용해야하는 것이냐 - 인 것 같다. 어려움, 고통 따위를 수용함으로써 나의 발전을 막는 것 같기도하다. 더러워도 괜찮다는, 고통도 나의 일부라는 생각에, 나 자신의 악에서 나를 보다 절실히 구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놓으리라, 주님이 맡아 주시리라, 아멘 -
4/10
"당신 스스로 비우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그 가난을 본받게 하소서."
하아, 근래 아침마다 되뇌는 생각 - 비우자. 딱히 바쁘지 않은 생활, 수업의 내용도 어렵지만은 않은 듯 하여, 그 만큼 여유로운 마음을 보다 나를 필요로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좋을텐데, 특별히 중요치 않은 잡념들에게 빼앗기는 것 같아 속상타. 자신을 비우는 것, 나를 위함이 아닌 타인을 위하여, 내가 아닌 우주를 위하여, 이타적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그릇을 깨끗이 비워버리고,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수 있기를 - 아멘 so be it
4/11
인간은 하느님의 꿈이라. . 한 번 읽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의 꿈이라 하면, 이루워 질 수 없는, 인간의 '아버지의 닮음'에 대한 끝 없는 동경을 말하는구나 싶었을텐데, 인간은 하느님의 꿈이라니.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를 꿈꾸신다는 것일까. . (그것은 영화 nine 의 내용인데. . 인간을 꿈꾸는 god) 인간은 하느님의 꿈, 인간은 하느님의 꿈을 형상화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닐가. 하느님은 꿈이 있었고, 그것을 우리 인간을 통해 실현한다는 뜻이 아닐까. 순간 나의 삶은 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추기경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보면, 우리는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말하신다. 우리 자신의 꿈들도 세상의 것이기에 우리를 채울 수 없는 것이요, 우리를 완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꿈을 실현하는 것 뿐이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가장 집중하였던 것은 비움이였다. 나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나를 채울 수 있는 것 - 추기경님의 어떠한 문구를 읽어도 같은 맥락인 듯 하다. 나로 가득한이 아닌, 나의 비움,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과 타인을 위한, 내가 아닌 어떠한 매개체가 되는 것에 가까운 듯 하다. 이는 지난 특전미사 중 Father Kelvin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 우리는 영혼이요 육신이 아니고, 우리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몸이지, 완전한 내가 아니다. 하루하루 이어저 가는 점들 사이의 선을 보며, 사순시기도 부활절이 다가오고있다. 마지막까지, 시작의 마음, 초심을 잃지 않기를, 나를 보다 비울 수 있기를, 이러한 원함마저 비우기를, 아멘 so be it.
4/13
휴, 너무 사실이다.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만이요, 믿지 못함은 불신이요, 용서치 못함은 미움이요, 나만을 위한 것은 소유욕과 지배욕이고, 질투와 경쟁심 또한 나의 나약한 모습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각자의 정도로 있으리라. 버리리라, 버리리라, 버렸느니라, 휙 휙 휙 슝슝슝
이미 모두 버렸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보자 - 휴 아멘 so be it
나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자세가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감정적인 관념들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우편물 중 교통위반에 대한 비용을 내라는 편지가 있었다.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이 보다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괜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이번 달 역시 한도를 넘은 통장내역이 나올테지만, 보다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일이 충격이라는 것은 특별히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근래 많은 일이 즐겁다. 약속도 빈번하고, 입을 옷, 잘 수 있는 집, 쉴 수 있는 침대, 먹을 수 있는 식량,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수업마다 귀여운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즐겁다.
이 즐거움의 이유는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째 마음을 계속적을 비우려는 자세로 생활한다. 둘 째 수업에 즐거운 친구들이 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나의 실수에 너그러워지고, 보다 긍정적인 마음의 안정을 준다.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특정한 방법으로 해야한다는 기준이 사라지니, 마음이 편안하고 그저 쉬운 마음으로 생활 할 수 있다. 쉽게 잊을 수 있고, 쉽게 실천한다. 그저 생활의 시간적 단위들을 지내는, 보내는 기분이랄까. 마음이 비교적 가볍다. 친구들에 관해서는 길어질 것 같으니 다른 글로 적어야겠다. 감사할 따름. 내일이 시험임으로, 오늘은 공부를 해야한다, 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amen - so be it
4/14
"하느님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알려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는 자체이시나 아무 것도 갖지 않았습니다.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소유물도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괜찮은 마음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시험 때문인지 잠을 길게 잘 수 없었다. 0600시 쯤 눈을 떠, 샤워를하고, 빵에 계란을 입혀 먹고 공부를 하니 벌써 0830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하루가 길고 딱히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오늘은 마음이 편안한 것이, 근래 얼마나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오에 유기화학 시험을 보고 온실에 화분에 물을 주고 은행에 들렸다가, 할머니 댁에 가기로 되어있다. 이렇게 주말이 불과 몇 시간 내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 문득 마주친 글에서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와, 졸업을 하고도 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일을하며 집으로 돈을 보내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읽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한 달을 꼬박 일하면 120만원을 벌 수 있는데 그것은 베트남 돈으로 1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이라고 한다. 120만원을 버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듯 해보이지만, 하루도 쉬지 않으신다니, 나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루 수업 5시간 정도 듣고도 지쳐 주말을 입에 달고 지내는데, 하루도 쉬지 않는다니. . 120만원을 버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쪼개 자신의 생활비를 사용하고 가족의 것을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 지방의 가장 저렴한 방값도 30만원 정도 하지 않는가. 기본 생활비 또한 최소한 30만원 정도 들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60만원 보내기도 빠듯 할 듯 하다. 하지만 베트남 돈으로는 꽤나 큰 돈이 되니, 그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리라.
이에 비해 나의 생활비는 터무니 없이 많이 나간다. 방값부터 시작하여, 학비, 기름값, 식비, 기본적인 것 외에도 입는 것, 차에 들어가는 돈, 취미생활로 들어가는 돈 등이 한 달 생활비가 꽤나 드는 것 같다. 줄인다고 하여도 방값을 제외하고도 60만원 정도는 족히 쓰는 듯 하다.
하느님은 가난하셨다. 그는 어떠한 것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학벌을 위해 유학을 왔고, 괜찮은 집에 살고 있으며 무려 차도있다. 취미생활을 위해 옷과 도구들을 '필요'로하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구입하고, 내가 가진 물건들에 집착하는 일도 흔하다. 나의 가장 큰 집착은 책. 솔직히 방에 있는 책들 중 읽지 않은 것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책을 보면 갖고싶다. 방에 두면 언젠가는 읽게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정말 원한다면 도서관에서 충분히 빌려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나의 지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밑줄을 치고싶고, 소유하고 싶고, 언제든지 돌아가서 읽고 싶을 때에 읽고싶다는 이유로 책들을 하나 둘 씩 사다보니 어느세 오선반을 가득 채운다.
또한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 드는 가장 큰 지출은 옷. 딱히 많이 사는 것은 아닌데 한 달에 한 두 장 정도는 사게된다. 계절에 따라 사는 옷들이거나, 운동복이 다수. 옷의 세계를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옷이 비싸 마땅한 이유는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닌, 부수에 가까우니, 특별히 저렴하지 않아도 된다. 책은 보다 들어가는 노력에 비하여 저렴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책은 보다 널리 보급되야 하는 것임으로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어떠한 시스템에 의해서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어찌되었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과 옷을 적게 사는 것이다. 지금도 최소한으로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으셨고, 모든 것 그 자체이셨다. 이 처럼 나의 관념을 바꾸면 새로운 지향을, 방향을, 생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일찍 일어났더니 역시나 눈이 따끔거린다. 어서 시험을 마무리하고 할머니 댁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먹고 한 숨 자야겠다. 휙 쿵 - 아멘 so be it.
4/16
배움이라는 것, 겸손이 유일한 방법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자신으로 가득차, 그야말로 자만하여 나 이외의 것을 수용 할 수 없다. 나 자신을 비울 수 있는 방법은 겸손 뿐이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원망치 않고, 보다 옳은 것을 비울 수 있는 여유를 자신에게 허락해야만 무엇이든 배울 수 있고 수용 할 수 있다.
오늘은 토요일, 특전미사에 가는 날이다. 벌써 부활절이 가깝게 다가왔다. 사순시기 동안 비움에 중점을 두고 기도를 하였고, 뿌듯하지만은 않은 날들도 많았다. 반 정도는 뿌듯하지 않고, 반 정도는 뿌듯했던 것 같다. 하지만 net 포괄적으로 전체를 고려했을때, 나의 현재 마음은 시작에 비하여 보다 편안하다. 이것이 100%기도와 비움에 인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매우 큰 부분이 비움으로 부터 오는 행복임은 확실하다. 그것은 나에게 긍정과 편안 - 곧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해 주었다. 이렇게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순의 마무리를 향하는 오늘, 바른 자세로 특전미사를 드리겠다. 나는 비우려 노력했고, 그 노력마저 버리며,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아멘 so be it.
4/17
"주변에서도 건강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권유해 주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수녀님도 그렇게 말씁하셨지요, 부활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지향하면서도 기쁨을 향하는군요. . 아프고도 기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자만하지 않도록 비워주세요, 비우겠습니다, 비웠습니다. 부활이 훌쩍 다가왔네요. 당신의 못 박히심을 기억하며. . 감사합니다, 아멘 so b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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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차를 타는 사람이든, 걸어 다니는 사람이든, 교통법규를 성실히 지키고 실수 할 때에는 지체없이 용서를 먼저 청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른 나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부활에 가까워 졌네요. 글이 길어 수정이 어렵군요, 다른 포스팅으로 옮기겠습니다.
자료 출처
http://www.catholic.or.kr/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 (산호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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