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이클 앱티드 (1994 / 미국)
출연 조디 포스터,리암 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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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North Carolina Robbinsville 과 Charlotte 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영화 속의 호숫가 풍경, 그리고 그 밤 호수를 수영하는 Nell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평생을 엄마와 둘이 고립된 숲 속에서 생활하였고, 엄마의 죽음으로 Nell 은 혼자 살아가야한다. 세상을 만나 본 적 없는 그녀, 낮을 두려워하고, 영어도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을 한다. 영화는 넬의 다름을 강조한다. 그녀의 행동, 언어, 습성 등 문명이나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밤에 수영을하고,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고, 팝콘을 처음 먹어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Nell 은 현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누구나 혼자임을 안다 - 엄마도, 동생도, 친구들도 각자임을 알고, 떠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안다. 죽음은 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괴롭도록 그립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음 또한 안다. 상대의 눈을 바라 볼 줄 알고, 마음을 열 줄도 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언제 필요한지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하대하고 다르게 취급한다. 그녀를 농담거리로 삼고, 과학적 예시로 삼으려 안달이다. 정녕 바보가 누구인지는 당연한 질문이다.

nature vs. nurture - 사람의 본성은 어디까지 이며, 양육의 영향은 어디부터인지. Nell 은 세상과 고립되어있던 존재임으로, 심리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된다.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며 자신이 아닌 존재와 교감을 하고, 놀라면 빠르게 서성거리며 괴성을 지른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그녀는 혼자 산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 생을 하였다. 그 동안 엄마의 행동을 보고 닮았을 텐데, 엄마는 문명과 접한 적이 있던 사람이였음으로, 엄마의 행동이 넬의 행동의 표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넬은 여러 트라우마를 겪는다. 이를테면 자신의 쌍둥이 동생의 죽음, 그리고 강간당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러 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그녀의 정신을 불안정케 하였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다시 엄마의 역활을 의심해본다. 그녀는 왜 엄마로써 딸의 안정에 도움을 주지 못 하였을까. 주었다면 그것은 왜 그리도 미미하였을까. 넬은 엄마라는 존재와 살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야생에 가깝다. 물론 그것이 영화의 의도이지만 구성의 억지가 아닌가 싶다.

내용은 흥미롭고, 구성은 얼추 괜찮지만, 가장 멋진 점은 Jodie Foster의 연기이다. Nell 은 영어와 가깝지만 다른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범위가 없는 자신만의 자유에 기준을 두고 생활한다. 이를 연기하기 위하여는 일상의 모든 습관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걸음걸이, 손짓, 시선, 동선, 표정 등 Nell 의 것은 다르다. 새로움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익숙함을 본인의 몸에서 지워야 했을 것이다. Foster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연기하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법정에서의 Nell 은 처음의 Nell과 달랐다. 그녀의 언어는 보다 영어에 가까웠으며, 행동 또한 일상인의 것과 흡사하였다. 마지막 장면의 능히 변화된 Nell의 모습을 보아하니, 법정의 장면도 의도 되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렇게 그Nell 은 우리와 달랐지만 같았으며, 가까워졌고 일부가 되었다. Nell 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는 - 나만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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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FoodStory
카테고리 생활/요리/건강>요리>요리법
지은이 Andrews, Geoff (McGillQueens,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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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년, 로마의 안티 맥도날드 운동으로 시작된 Slow Food, Movement (운동)이라 칭 할 수 있겠다. Slow Food 를 직역하자면, 느린 음식. 하지만 이 무브먼트는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리고 이 무브먼트는 음식을 상징으로 환경, 생물의 다양성, 개인과 사회의 정치적 성격, 문화, 문명의 과거 현재 미래, 인류의 성격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의견과 방향을 제시한다.

'Convivium' 이라는 단위로, 지역적 단체를 이루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아프리카 등 개발 도상 국가들에서도 연설과 지원으로, 각 지역의 음식 문화 보존에 기여하고 있다. '세계화'의 가운데, 흔히 개발 도상 국가들의 문화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촌스럽다'라는 인식들로 흐려지고있다. 하지만 Slow Food 무브먼트는 그들에게, 문화는 한 물 간 관습이 아닌, 세계와 시대에 무관히 고유의 아름다움임을 깨우쳐며, 그들의 음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모습들이 마치 전통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가추는 것 같다. 오래되었다고 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 또한 생명임으로, 그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세계화로 세상이 획일화 되는 일은 끔찍하다. 어느 지역을 여행가도, 가장 먼저 만나는 것들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임을 이야기하며, 작가는 세계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한다.

현 시대 사람들은 본인을 Consumer 소비자 라고 칭하고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는 음식의 종결, 끝이 아닌, 그것의 과정이다. 식품제조업체들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음식을 만든다. 그들은 인간의 미각을 성별, 나이, 인종, 문화, 지역 별로 분석하고, 정리된 자료에 맞추어, 타겟 소비층을 분석하고 음식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식들의 시작이기도하다. 주어지는 것을 받아 먹지만 말고, 그것의 과정을 알려하고 개입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몸이 무엇을 먹는지, 나의 선택 범위는 어디인지, 보다 나은 먹거리는 어느 것인지를 알려하는 '관심의 자세'가 가장 필요하고, 현대 사람들에게서 가장 결여된 점이기도하다. 많은 사람들은 식탁에 올려진 상추가, 마늘이, 삼겹살이, 쌈장이, 쌀이, 김치가, 두부가 어디에서, 어떠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어느 트럭을 타고, 어느 칼에 베어 식탁에 올려졌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음식은 그저 먹는 것일 뿐. 슬픈 현실이다.

또한, 작가는 음식을 먹는 것을 '정치적'이라 말한다. 내가 특정한 음식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특정한 '아이디어' 혹은 '무브먼트'를 지지 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기농을 고집함으로써 화학조제와 첨가물을 거부 할 수 있다. 지역 농식품을 선택함으로써 지역의 경제에 기여 할 수 있다.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거부함으로써 대기업들을 거부 할 수 있다. 음식을 구입함으로써, 특정 단체에 특정 기부가 되는 '프로모션'등에도 참여 할 수 있다. 이렇게 먹는 것은 단순한 음식의 섭취행위가 아니다.

현 사회구조는 '맛'보다 '값'에 큰 비중을 둔다. 많은 이들이 보다 저렴한 음식을 추구하고, 그것이 '수요'가 되어 '생산'을 자극한다. 제조업체들은 마진을 남기면서도 저렴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싸게, 대신 '많이' 팔아야한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에 드는 비용을 최대한 기계화하여 인금을 줄인다. 같은 땅 면적에서 보다 많은 감자를 기르기 위해 '유전자 조합'이라는 기술을 이용하여 보다 큰 감자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는 연어의 유전자로 자란 감자를 먹는다.

Slow Food 무브먼트는 개인의 건강만을 위한, 혹은 부유층만의 사치가 아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천천히 시간을 갖고, 보다 의식적인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다. Gastronomy, 미식, 이라고 정의되기도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미식의 과학, 나아가 좋은 음식섭취의 과학이다. 음식에 대하여 분석적인 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개인으로써, 인류의 한 명의 부분으로써, 내가 속해있는, 매일 접하는 식품업 시스템에 대해 궁금함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과반수가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나의 개인적 의견을 서술하느라 책의 내용은 많이 적지 못한 것 같다. 대부분의 내용은 무브먼트의 이데올로기, 진행과정, 역사, 사예, 대표인물들, 그리고 현 식품업 시스템의 구조와, 무브먼트의 기여등의 내용이다. 전반적 내용은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다. 내용은 유익하다만 재미가 없는, 주제가 흥미로워 읽히는 책이다. 전체적 흐름을 잡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빠르게 읽어 자세한 부분들은 놓친 것이 많은 듯 하다. 보편적으로 읽혔으면하는 마음으로 후한 점수를 준다.




본문 중

"We are enslaved by speed and have all succumbed to the same insidious virus: Fast Life which disrupts our habits, pervades the privacy of our homes and forces us to eat fast food... In the name of productivity Fast Life has changed our way of being and threatens our environment and landscapes. So Slow Food snow the only progressive answer."
 
우리는 Fast Life의 속도와, 그의 꾸준히 분포되는 바이러스의 노예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관습과 가정의 생활을 침범하고 패스트 푸드를 강요한다... 효율적 생산이라는 맹목적인 이유로 Fast Life 는 우리의 방법들, 환경, 그리고 풍경을 변화시켰다. Slow Food 만이 진보적인 해답이다.
 
 
 
 "for if pleasure in labour be generally possible, what a strange folly it must be for men to consent to labour without pleasure; and what a hideous injustice it must be for society to compel most men to labour without pleasure."
 
노동의 즐거움은 보편적으로 가능하다. 즐거움 없이 노동을 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 없는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란 흉한 부당성이다.
 
 
 
"...a men at work, making something which he feels will exist because he is working at it and wills it, is exercising the energies of his mind and soul as well as his body. Memory and imagination help him as he works. Not only his own thoughts, but the thoughts of the men of past ages guide his hands; and, as a part of human race, he creates."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자의적 실천으로 인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은, 그의 몸과 정신과 혼의 기운을 사용한다. 기억과 상상력은 그의 일을 도울 것이다. 그 자신만의 생각들 뿐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다른 이들 또한 그의 손을 움직이고, 그는 인류의 조각으로써, 창조한다.
 
 
 
"...food is a source of identity often in conflict with the powerful forces underspinning globalisation, which erode local traditions and impose corporate monocultures."
 
음식은 자아의 근원이며, 종종 세계화를 지향하는, 지역문화를 약화하고 대기업 획일문화를 강요하는, 강력한 세력들과 부딫힌다.
 
 
"It is about the right to distinct, uncommodified spaces - cultural activities, rituals, pieces of our ecology, ideas, life itself - that are not for sale."
 
그것(Slow Food) 은 상품화되지 않은 - 문화, 의식, 생태계의 조각들, 이데아, 생명 그 자체 - 구입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지을 권리이다.
 
 
 
"Eating is not only 'an agricultural act', it is also a 'cultural act', and the political and pleasurable ramifications of this are deep and far-reaching."
 
먹는 것은 '농업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행위'이고 그것의 즐길 수 있는 정치적 파급은 깊고 넓다.
 

 

*번역은 저의 것, 직역이 아니거나 개인적 의견이 반영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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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감독 카메론 크로우 (2001 / 미국)
출연 톰 크루즈,페넬로페 크루즈,카메론 디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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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Sky

딱히 환상은 아니지만,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iMDb 점수 6.9. 그래 점수는 후할수록 매력 없지.

 

David: 주인공
Sophia: 환상, 이상향 
Juliana: 현실, 저항요소
Brian: 의미부여 없이 친구라 하죠
Money / Company: 책임, 현실의 생활
Love
Dream Reality: 이상과 현실의 사라진 거리, 공존

 David 아버지의 회사를 상속받고, Juliana 그의 놀이관계. Brian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Sophia 만나는 계기. 만난 Sophia에게 David 의미와 환상을 부여. Julia와의 교통사고에서 David 얼굴이 괴물. 자신을 몸은 냉동, 속의 삶을 산다. 하지만 잠재된 의식의 방해로 그의 꿈은 악몽. 마지막에 그는 현실로 돌아갈 기회와 꿈으로 고쳐진 악몽을 살아갈 갈림길에서, 자신의 궁극적 두려움인 고소공포증을 대면하고 현실을 선택.

Open your eyes. 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눈을 떠라. 모든 사람들은 David 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분명 주인공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잃고, 둘을 융합 속에서 객관성을 찾지 못하는 악몽을 살아간다. 그의 제작이기도 환영들은 그에게 눈을 뜨라고 말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을 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주인공은 가면을 쓴다. 세상의 돈을 모두 가졌지만, 그는 시대의 기술에 갇혀 완벽한 얼굴을 복구하지 못한다. 흉측한 얼굴에 대한 시선을 감추는 이도 많지만, 클럽의 바텐더처럼, 그것을 경계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이처럼 당연한 현실에 분노한다. 사고 후로 Sophia 그가 아닌 그의 친구 Brian 사랑을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의 환상은 환상이니만큼 아름다운 Sophia 그를 구하는 손길이 되어 함께 아름다움을 살아간다. 그것이 주인공이, 누구나가 바라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의지와 공존의 .

하지만 그의 이러한 환상은 잠재된 두려움들로 악몽이 된다. 회사에 대한 책임과 업무적 일의 엮임은 사회의 억압을 대표한다. 그는 자신이 회사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며,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결국 주인공에게 남는 친구란 없다. 사랑하는 Sophia 마저 악몽의 Juliana 구분치 못하고 그녀를 살인하기까지 이른다.

괴로움이 아름다움을 마시고, 그것을 죽이려 주인공은 자신의 환상 또한 함께 포기 밖에 없다.

주인공은 분명 정신적 앓고 있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또한 흐리다. 냉동이라는 방법으로 죽은 사람을 미래까지 보존시키고, 꿈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있게 해준다. 이렇게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아무 것도 정확하지 않으며 평범치 않은 와중, Radiohead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흘러나온다. 적절타.

분명 영화는 보편과 전형의 선에서 이탈하였지만, 누구나 공감 하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하였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바닥에는 사람의 감정이 깔려있다. 두려움, 사랑, 행복, 이상, 동경, 도피, 절망, 혼란, .

또한 영화는 사회적인 압박을 회사와 얼굴이라는 대표적인 개체들로 표현하였고, 그것이 누리는 영향의 범위를 보여준다.

사운드 트랙 또한 퍽이나 보편적이다. Radiohead, Sigur Ros, Beach Boys, Chemical Brothers, U2, Jeff Buckley 꽤나 흔한 음악들이 사용된다. 또한 적절한 아이러니 플레이가 아닌가 싶다.

Vanilla Sky 의미를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그림에 대하여 설명하며 Vanilla Sky 잠시 언급되지만 짧게 넘어간다. 보다 자료를 뒤져보아야겠다.

2001년의 영화, 조금 세련되고 정교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으나 깔끔한 측에 속한다. 사랑, 사람, 바람, 현실, 약간의 공상이 가미된, 괜찮은 주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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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 (2010 / 일본)
출연 마츠 다카코,오카다 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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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Tetsuya Nakashima
원작 소설 작가 Kanae Minato

간만에 아오이 유우가 나오지 않는 일본영화를 보았다. 시작은 딸기 우유마시면서 발랄했는데, 피 범벅으로 튀는, 장르는 무려 드라마/스릴러. 내가 조금 더 예술에 미쳐, 감정이 무뎠더라면 환상이라고 훌륭한 점수를 주었을 영화, 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더라면 좋아라했을 듯 하다. 나이가 들었는지, 비릿내나는 영화에 인상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만점을 줄만큼 '환상적'인 부분은 없지만, 피를 아름답게 사용하였고, 소재를 능숙히 다루었고, 관점이 뚜렸하고, 멈춤없는 전개의, 매우 감각있는 영화이다.

목숨
왕따 / 집단성
자살 / 살인
병 / 병에 대한 인식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진정한 지옥
가족 / 부모 / 애정

목숨 -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윤도현씨가, 죽음에 관한 음악을 쓰고있다고 이야기하며, 딱히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치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얘기인 듯,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어색한 자세였달까. 죽음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한다는 자체가 사실 이상했지만, 사회적 시선은 그런가보다. 우리나라 라디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 아무튼 죽음, 목숨의 끝, 삶의 끝을 이야기한다. 영화 대사 중
"목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혹은 "선생님, 목숨은 가벼운 것이에요." 따위의 대사가 있다. 목숨, 과연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물론 답은 없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목숨의 무게 또한 가늠 할 수 없다. 가족을 잃음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진정한 지옥'이 되기도하고, 미디어가 가장 시끄럽게 다루는 주제 또한 '살인' '자살' 따위의 죽음이지만, 학살 따위를 꿈꾸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인물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는, 목숨에 대한, 상반되는, 쉬운 태도 또한 그려진다.

왕따 / 집단성 - 반의 아이들은 한 개체로 그려진다. 그들은 함께 웃고, 기겁하고, 움직이고, 같은 타겟을 공격한다. 그들은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는, 개인의 의견을 만들지 못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손을 들어, 하겠다고 자발적 행위를 보이면, 나머지는 따른다. 그런 그들에게, 기준이란 수시로 바뀐다, 왕따의 대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 처럼. 집단에게 책임을 부여 할 수는 없다. 집단이 행한 행위는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느낀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방법이, 사회에서는 먹힌다.
왕따는 반 전체를 대상하고, 사회는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만든다. 개별적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은 훨씬 많은 비용이 필요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을 개인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청소년의 가장 작은 단위가 '반'이 아닐까 싶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그 단위를 책임지어야하고, 그것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반은 집단이지만, 그 안에 반장이 있고 왕따가 있다. 주체 없는 아이들을 뭉퉁그려 바라보는 시선이,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살 / 살인 - 죽는다는 것, 죽음의 이유에 따라 죽음의 영향은 매우 달라진다. 누구는 병에의해 죽지만 누구는 타인의 자존심, 애정결핍, 따위의 이유로 죽는다. 암으로 죽은이를 보내는 마음은, 타인의 자존심이 죽인 이를 보내는 마음과 다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후자는 보다 수긍이 어렵고, 복수를 부른다.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청소년은 드믈거란 무서운 상상을 해본다. 갈대같은 기준없는 마음에, 바람이 불면, '죽어버릴래'따위의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갈대같은 만큼, '안 죽을래'가 그 뒤를 쉽게 따르기도 한다. '자살은 나약한 자들의 도피'라는 인식이 있다. '자살은 사회로 인한 타살'이라는 인식 또한 있다. 물론 답은 없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는 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있다. 집단이건, 개인의 자존심이건, 받지 못한 사랑이건, 책임을 부여 할 수 있다. 그 책임에 대한 죄책감을 우리는, 누군가는 느껴야 하는가? 글쎄. .

병 / 병에 대한 인식 - AIDS 감염자의 피를 마시더라도, 감염될 확률은 없음에 가깝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하지만 반 학생들은 피 한방울, 키스, 살결이 스치는 것 조차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기겁하고, 소리 꽥 지르고, 시끄럽다. 감염자의 난처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예의보다 본인의 감염되지 않은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못하는 것에 대해 겁이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의 전문의가 될 수는 없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보편적인 인식을 만들어 그 관점으로 그 대상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병' 은 무섭고, 더럽고, '병자'는 가까이 가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병자가 내뱉은 공기만 나눠 마셔도 옮을 것 같고 손길만 스쳐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 아닌데도 말이다. '바보'짓이 분명하다. 그 따위의 취급을 받는 병자는, 신체적 병에 심리적 병의 합병증을 앓게되고, 고립이 오히려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된다. 
사회는 관심이 없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단체를 바라 볼 뿐이다. '장애인' '감염자'따위가 그러하다. 뭉퉁그려 기피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고 황당한 현실이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그런 관점을 기대하는 것이, 실망을 부르는,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보호 법 / 나이 - 이 또한 시스템의 오류이다. 정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것이 국가라는 단위의 집단을 지도하고 인솔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이로 또 다른 집단을 형성하고, 그 두루뭉술한 집단을 다루는 제도들을 디자인한다.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청소년은 기준이 없음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였을때, 그것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옳지 않은 행위에 괜찮다는 인식을 부여하는, 황당한 제도가 아닐까.

진정한 지옥 - 목숨이 가벼운 이에게, 죽음은 오히려 선물일 수 있다. 복수를 원한다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다면,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다 - 훨씬 고통스러울 것다. 가장 아릅다운 복수의 예로써 올드보이가 있겠다. 그 치욕을 안고 살아야한다니, '죽는게 낫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야 본인의 선택. 복수의 대상을 살려두되, 그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 할 것 - 딸의 인생, 엄마의 목숨, 유일한 추억 따위가 있겠다.
굳이 누군가의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이 지옥'이 되는 일은 스스로도 부를 수 있다. 공부에 목을 달고, 학비가 없어 하고싶지 않은 일만을 하는, 삶 따위가 그러 할 것이다. 누구나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하고싶지 않은 일'만'하는 삶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하고싶은 일'을' 주되게하고, 하고싶지 않은 일'도' 취미삼아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를 - 적어도 나 자신은 이러한 기준으로 행복을 찾아가며 살고있다.

가족 / 부모 / 애정 - 사실 몇 일 전 이 것에 관하여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침 영화의 내용과 싱크가 가능하여 여기에 남겨본다. 영화에서도 다루워지듯이, 청소년은 기준이 없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 '부모가' 청소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성적인 것이 현 시대의 현실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자라나는 정신 - 청소년 - 에게 기준을 심어주어야한다. 지나친 클리셰이지만, 그들에게 공부를 바래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바래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정의, 삶의 방식의 기준이다.
부모란, 가족이란, 사회란, 환경이란, 청소년이 의사, 박사, 인문학도, 사회 기여자가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왜 자식을 그 딴 것으로 키우고 싶어하는가. 환경은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면, 그 '사람'은 자신의 꿈을 찾을 것이다. 환경이 공장인가? 왜 직원을 만들려 하는가, 왜 본인이 나은 생명체로 사업을 벌이고 돈을 벌려하는가, '사람'으로 키우면 된다.
물론 나는 부모가 아니고, 이상적인 20대임으로, 비 현실적인 소리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뭐 모르고 지꺼리네'라는 소리를 들을테지만, 우리는 모두 이상을 향해 가고있지 않은가. 현실이 더럽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상적인 20대라도 이상적이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만의 논리이다.


영화의 소재로는 위의 것들 이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인상에 남은 것들을 위주로 적었다.
본 영화는, 사회의 중요한 주제를 소재로 다루었다. 사회 시스템의 보편성, 그것이 나은 부작용들 - 왕따, 병 기피, 자살, 살인, 미디어, 따위가 있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시각적 효과이다. 카메라는 앞, 뒤, 사이드, 뿐 아니라 위에서 전지적인 듯 한 시점 또한 그린다. 현 시대의 보편적인 매체, 티비와 핸드폰 또한 유용히 사용되었다. 적절하고 직결되는 음악의 사용 또한 내용을 부각시킨다. 영화를 본 후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ost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bgm이라기에는 비중이 있는 듯한 음악은, 가사를 듣게하고, 영화에 또 다른 입체성을 준다.
또한, 피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피의 성질을 매우 훌륭히 활용하였다. 특히나 벽에 칠해진 피, 손에 범벅이된 피, 땅에 떨어진 피의 구도가 매우 잘 계획되었다. 시각 디렉터, 따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각적 배치와 물체간의 대비가 매우 감각적이다. 피의 새빨간 색감이 하얀 벽, 학생의 뽀얀 피부와 대비하는, 장면들이 훌륭히 구사된다. 
영화의 끝자락으로 다가가, 폭발 장면의, 쌩뚱맞은 cg효과 또한 재미있다. 시계라는 아이템을 사용하여,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의 심리를 표현한다. 유리와 파편들이 느리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관객의 집중을 사고, 혼란과 역동적인 심리를 묘사한다.
궁금의 여지가 남는 점은, '과연 그녀는 폭탄을 정말로 전달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폭탄을 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소년은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폭탄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소년은 안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점을 바꾸기에는, 그 거짓말 한 마디, 가상된 사실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작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피 비릿내 잔뜩 나는, 시뻘건 책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사르트레의 '구토'도 읽으며 악몽을 꾸어, 마저 읽지 못한 나인데 말이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누르는 날이 올까 -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충분히 감정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러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 - 나의 감각들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읽을 용기가 아닌, 굳은살이 생기겠지 -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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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toNormalforPiano/Vocal/Chords:VocalSelections
카테고리 예술/건축 > 음악 > 장르(POP,ROCK,JAZZ)
지은이 Kitt, Tom (COP)/ Yorkey, Brian (COP) (Alfred,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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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Tony Award for Best Score
Tony Award for Best Orchestrations

Pulitzer Prize for Drama
Alice Ripley (주인공) Tonny Awards Best Performance by Leading Actress in a Musical



5th Ave Theatre 에서 Broadway Musical next to normal 을 보았습니다.
왜인지 대문자를 쓰지 않네요, 의도가 있겠지요.



5th Ave Theatre는 처음입니다.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하고, 프린트하지 않았는데, 와보니 미리 봉투에 담아두었더군요. 원래 이런건가 봅니다. 공연 초보다 보니 소소한 모든게 신기 재미있습니다.



내부촬영하다 혼났지만, 몇 장 올리자면 - 
공연장 건축의 주제는 고대 중국. 저 안에 음향장비가 들어있습니다. 대부분 나무를 깎아 지었습니다.

천정

무대가 끝난 후의 모습. 사람들이 나가고있습니다. 아주머니 흐뭇한 표정이네요.

멀리서 본 무대. 저렇게 3층 구조로 지어져있습니다. 세로로 또한 삼등분으로 나누어져있고, 계단을 통해 극 중 배우들의 동선이 매우 다양합니다.
가장 왼쪽 윗 칸은 기타 연주자가 공연 내내 앉아 연주를 하십니다. 기타는 통과 일렉을 번갈아 사용.
왼쪽 둘째 칸은 바이올린 연주자 둘
오른쪽 윗 칸은 드럼과 첼로
오른쪽 둘째 칸은 한 분 께서 피아노 / 쉐이커 / 지휘를 하십니다.
건반을 치시면서 고개로도 지휘를 하시고, 건반을 치지 않으실 때는 손으로 지휘를 하십니다. 카메라가 있어 연주자들의 호흡을 맞춥니다. 관객 쪽 위로도 화면이 있더라구요.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 무대와 조명이였습니다.
배경의 빛이 파랑, 보라, 초록, 노랑, 빨강 사이에서, 서서히 넘어가기도하고, 극적인 변화의 장면에서는 한 순간에 색을 바꾸기도 합니다. 노란 전구들 또한 빛의 밝기 조절이 되어 극의 내용에 따라 어둡고 밝기가 달라집니다.


사진을 좀 퍼오자면,

크 - 유리에 그려진 눈매, 저 유리는 문처럼 열리기도 닫히기도한다.


눈이 그려진 유리는 대부분 열려있다. 이층의 양쪽과, 삼층의 가운데는, 집을 상징하는 창문과 지붕이 그려진 유리들이 있다. 저 유리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안에서는 연주자들이 있다. 안에서 악보를 읽는 빛이 있어, 연주자들이 보이지만, 조명을 비추지는 않는다.

빛이 벽에서 나오는만큼, 벽에 다가갈 수록 배우의 현상은 그림자가된다. 파아란 배경의 검은 배우의 그림자, 환상적인 장면이 속속 연출된다.




내용을 요약차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 엄마는 조울증, 우울증 등 정신적 합병증을 앓고 있다. 의사 역할의 비중도 꽤나 크다.

3층의 남자: 아들
2층 엄마, 의사
1층 아빠, 딸, 딸의 남자친구

색깔이 매우 훌륭히 사용되었다. 배경도 그러하고 배우들의 의상 색깔이 그러하다. 엄마/아빠의 관계와 딸/남자친구의 관계가 싱크되는 경우에서 그들의 옷 색깔 또한 싱크된다. 엄마/아들의 관계가 강조될때 둘의 옷은 같은 색이고, 아들만 제외될 때에, 그의 셔츠만 다른 색이다.
사진의 장면은 마지막 장면으로, 엄마와 의사만 보라색을 입고있다. 색의 상징성은 다양하다. 극 중에서 빨강과 파랑이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되며,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엄마/아들이 흰 옷을 입고 왈츠를 추던 장면. 아들에 대한 엄마의 순수하고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가장 아름답고 무서운 장면이기도하다.

Theme - 테마가 훌륭하다고 느꼈다.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테마는 '다름과 평범함' 이다.
딸은 클래식을 전공하고싶어한다. 규율과 정석을 지키는, 전형적인 모범생. 반면, 남자친구는 재즈를 좋아한다. 클래식은 틀에 갇혀 즉흥성을 잃는다고 말한다. 딸이 말하기를, 모차르트는 미쳤었지만, 그의 음악은 논리이고, 하모니이고, 아름다움.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찾을 수 없는 경계를 이야기한다.

엄마는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만나고, 터무니 없이 많은 약을 복용한다. 아빠는 그러한 엄마를 사랑하고 가족을 지키려 노력한다. 서로는 서로가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음을 노래한다. 아빠는 엄마를 기다리고, 위로하고, 노력하고, 그녀의 피를 닦는다. 그렇게 그는 지쳐가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의사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소연을 하지만, 의사는 'completely normal'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며,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터무니 없이 많은 약들과 치료 방법들을 사용하면서도, 모든 것은 괜찮고, 드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가족은 포기하지 않는다, hope 희망을 가지고, better 나아짐을 기대한다.

next to normal, 정상의 곁, 정상적이지 않지만, 그것에 가까운 것을 뜻하는 듯 하다. 정상이라, 그 누가 정의 할 수 있겠는가. 정신과 Handbook에는, 누군가를 잃고 4개월 이상 슬픔에 잠겨있는 것은 비정상의 범주라 정의한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4개월 넘도록 마음아파하는 일이, 비정상이라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금지된 영역들이 있었다. 아무도 말하면 안된다고 하지 않지만, 모두들 피하려는 주제들. 선을 그어 놓고, 그것을 넘는 일을 사람들은 '안됨'으로 여긴다. 역사적으로는, 여성인권, 인종차별, 종교 등. 오늘도 물론 껄끄러움이 남아있는 영역들이다. 현 시대의 새로운 기피항목은, 극의 주제로 다루어진 정신적 질환과 동성애가 아닌가 싶다.

모든 현상을 의학적으로 설명가능타고 착각하는 의사들과, 그 말을 곧대로 믿는 대중. 그들은 질병의 환자가 아니라, 현대 의학에 대한 깊은 신뢰의 환자이다. 의사들은 약을 쏟아 먹이고, 그것을 받아 먹으며, 환자는 나아지지 않는다.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 병은 깊어 갈 뿐. 희망을 가진 것은 환자와 가족들, 자만에 찬 의학.

정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뮤지컬이니만큼, 배우들 노래를 장난없이 잘 한다. 안무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음악은 훌륭하나, 춤은 영 아니다.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전반적 작품에 타격을 주지는 않는다. 배우들의 동선은 매우 적절하다. 무대의 공간적 활용, 세트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효과적이다.




배우들이 노래를 매-우 잘 한다. CD를 샀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의사 엄마 아빠
아들 딸 남자친구


두 장 act 1 act 2로 나누어진다




가사가 특히나 주옥같다

"Every day is just another... and another... and another...
I will hold it all together.
We're the pefect loving fam'ly
If they say we're not, then fuck 'em
The perfect loving fam'ly"


"And you play...
And you play...
And everything else goes away
Everything else goes away
Everything else goes away"


"But even if everything else turns to dirt,
We'll be the one thing in this world that won't hurt
I can't fix what's fucked up
But one thing I know I can do...
I can be perfect for you..."


"I miss the mountains
I miss the highs and lows,
All the climbing, all the falling,
All the while the wild wind blows,
Stinging you with snow
And soaking you with pain
I miss the mountains
I miss the pain

Mountains make you crazy
Here it's safe and sound
My mind is somewhere hazy
My feet are on the ground

Everything is balanced here
And on an even keel
Everything is perfect

Nothing is real...
Nothing is real..."

이 노래가 가장 좋다 - 엄마가 부르는 I miss the mountains. 약에 절어 모든 감정을 잃은 엄마.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노래하는, 이 곳은 안정이고 완벽이고 평온이지만, 감각을 잃어버린, 현실과 멀어진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다. 비정상이라는 낙인에, 약을 먹고, 약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어느 것이 정상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작품으로 Tonny Awards를 수상한 주인공 Alice Ripley 엄마역, 목소리가 매우 독특하고 구슬프다, 기억 속에서도 절절하다 -


Posted by wat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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